마가복음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

어저나 2009. 4. 19. 21:23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 마 5 : 21 ~ 34 ( 2009. 1. 22 )

 

가다라 지방 사람들이 예수님의 오래 머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곳에 머물지 않고 곧 배에 올라 다시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곳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 중에 회당장 중 한 사람인 야이로가 매우 겸손한 태도로 그리스도께 무릎 꿇고 자신의 뜻을 간절히 간구했다. 그에게 12살 된 귀한 딸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죽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야이로는 예수님이 손을 얹어 기도하시면 딸이 낮게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에 둘러싸인 채 길을 가고 계셨다. 그 가운데 한 여인이 있었다. 12년의 혈루증으로 고통 받던 여인이었다. 여기서 혈루증(subject to bleeeding, NIV)은 현대의학 용어인 “혈루병”이 아니다. “혈루병”은 여자에게 유전 인자로 잠재할 수는 있어도 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남자에게는 유전으로 잠재성과 병으로 모두 나타난다. 따라서 여기서의 혈루증은 만성 하혈증(下血症)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자궁(uterus) 안에 종기가 생기거나 어떤 이상이 생겨 불규칙적으로 피가 흐르는 증세일 것으로 간주된다. 이 여인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치료하고자 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오히려 더 심해져만 갔다. 그 당시 의사에게 치료를 받을 정도였다면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여러 의사를 통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허사였고 재산을 탕진하게 되었다. 아마 가족들도 그녀의 치료를 포기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여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주님한테 모든 것을 맡기게 된다. 모든 것을 잃고 난 다음에야 주님을 만나고자 하였다. 재산을 치료비로 다 허비하고 남은 것은 병든 몸 하나이고 그나마 병은 더욱 악화되고 병의 부정함 때문에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여인의 모습은(레 15:25-28) 인간 최악의 한계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삶과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상실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은 4장의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과 5장 2-5절의 귀신들린 사람과 22,23절의 죽음 직전에 이른 야이로의 딸과 함께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유한성과 인간적인 노력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그 혈루증의 여인은 더 이상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구원자 예수를 찾게 된 것이다.

 

여인은 유대의 제의적 부정에도 개의하지 않고 군중 속에 섞였고 예수님의 주위에 이르게 되었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하더라도 자기가 온전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28절 “내가 그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무리 가운데 섞여 와서’ 간신히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즉시 병이 안은 것을 느꼈다. ‘그의 혈루 근원이 마르매’ 그녀는 그녀의 온 몸이 순간적으로 완전하게 회복된 것을 즉시 느낄 수 있었다.(29절) 여인은 접촉만으로 치유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라고 있었다. 마가복음 3장 10절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음으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러라.” 6장 36절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그러나 누구나 다 예수님의 옷을 만지만 해도 치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통로는 바로 믿음이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병의 근원을 치유해 주셨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원인을 제거해 주셨다. 즉 연인의 영적인 치유도 이루어 주셨다. 주님의 치유는 영과 육의 동시적인 치유인 것이다. 전인적인 치유를 통하여 구원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치유의 순간 동시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이 나갔음을 아셨다.(30절) 예수님은 환자를 보고 싶으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이 물음 불쾌한 물음이 아니고 다정하게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조금 불쾌히 말했다. 예수님은 그녀의 대담한 행동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하신 일이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이것을 통하여 병나음을 보증하고 확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불쌍한 여인은 두려워 떨며 주님께 모습을 나타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옷에 손을 댄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두려워 떨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발 앞에 엎드리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 그 때 주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34절) 격려했다.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 라고 감동적인 선언을 하고 있다. 여기서 “평안히 가라”(Go in peace, NIV)는 문자적로 “평화를 향하여 가라”는 뜻보다 “평화의 상태를 지니고 가라”로 보는 것이 좋다. 즉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평화의 은총을 선사하신 것이다. 이 평안은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말인 “샬롬”(삿 18:6 ; 삼상 1:17)을 훨씬 능가하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공하신 것이다(요 14:27).

 

위의 내용을 통하여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으나 이번 설교에 있어서 세 가지로 축약하여 은혜를 나누었으면 한다.

 

첫째는 예수님이 거하시고 가시는 곳은 다 축복의 장소이다.

혈루증 여인을 만난 곳은 다름 아닌 길이었다. 많은 사람이 함께 하는 순간이었고 떠밀리고 서로 예수님의 모습을 보려했고 만나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복잡하고 혼잡한 순간에서도 주님은 사람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들을 만져 주셨다. 안정된 장소가 아니라 할지라도 믿음을 가진 자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필요를 채워주셨다. 주님의 외부의 환경적 제약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관심은 영혼의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우리는 장소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편견을 지워야 한다. 어디서든지 기도하는 사람을 들어 쓰시며 역사하신다. 주님은 산에서도 말씀하셨고, 광야에서도 기도하셨고, 집, 배위, 길, 다락방 그 어디든 사람이 모이는 곳에 말씀하시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다. 예수님의 관심은 영혼 구원에 있었기에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우리도 그의 증인되어 어느 곳이든 주의 복음 들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나가야 한다.

 

둘째는 내부의 은밀한 것이라도 부끄러워하지 말라.

5장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군대 마귀 들렸던 사람은 해악이 외부에 나타나는 것이다면 혈루증 여인은 내적인 낭비와 쇠퇴에 있다. 여인은 병으로 인하여 많은 것을 잃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26절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여인은 병으로 인하여 치쳐 내적인 힘이 많이 쇠약해졌을 것이다. 또 율법에 여인의 만성 하혈증의 율법에 의해 부정한 것으로 취급받기에 사람들과 정상적인 교통이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레 15장 2절 ~ 12절 “누구든지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유출병을 인하여 부정한 즉” 안장, 질그릇 쓰는 모든 것이 부정하게 된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그 자리에 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다. 자신의 내부의 은밀한 부분까지 주님은 아시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다 내어 놓을 때 주님은 우리를 받아 주신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부분을 다 용서하시길 원하신다. 간음한 여인의 죄과를 주님은 용서하셨다. ‘죄 없는 자 돌로 쳐라’ 우리에게는 사람을 정죄할 권한이 없다. 하지만 사단은 우리의 불의함을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고 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통의 단절을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략에 말려들지 않아야 한다. 숨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아담은 죄를 짓고 숨었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용서하셨다. 죄는 들어나게 되어 있다. 다윗의 간음도 하나님은 철저히 파헤치시고 정죄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자리로 돌아와 우리의 모습을 들어 내고 주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 주님은 분명 치유해 주신다.

 

셋째는 은혜 받은 자는 반드시 간증해야 한다.

이 여인은 자기의 부정을 생각하여 공공연하게 주 잎에 나아가기를 주저하고 은밀히 주의 뒤에서 옷을 만졌다. 또 그녀는 고침 받은 것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두려워 떨지 않고 부끄럼 없이 아뢰었을 때 구원의 확증이 이루어졌다. 간증함으로서 더욱 확신이 굳어졌다. 은혜 받은 자는 반드시 간증해야 한다. 우리는 복음을 말로만 받은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은 사람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믿는다. 그러기에 분명 복음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고침 받고 주님의 주신 은혜가 있으면 서로 나누어서 기쁨을 함께 하시길 소망한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한층 더 성장하길 소망한다.

'마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례요한의 죽음  (0) 2009.04.19
12제자의 파송  (0) 2009.04.19
고향에서 배척 당하심  (0) 2009.04.19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0) 2009.04.19
거라사 축사 사건  (0) 2009.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