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마르다와 마리야의 헌신

어저나 2009. 4. 25. 14:51

마르다와 마리아 헌신 (눅 10 : 38 ~ 42) (2009. 4. 5)

 

‘여전도회 헌신 예배’ 가장 많이 들었던 설교가 ‘마르다 마리아의 헌신’에 관한 설교입니다. 항상 마라아의 행동은 칭찬 받았으며 마르다는 늘 책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르다가 크게 잘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정말 마르다가 큰 잘못을 했다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설교를 많이 들었을 것인데 마르다가 정말 잘못했습니까? 죽은 오빠을 살리시고, 여동생의 병마저 고쳐 주신 예수님이 왔는데 거창하게 동네 사람들 불러 모아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함께 식사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 잘한 것 아닌가요?

 

반대로 말하면 마르다 보기에는 마리아가 얼마나 얄미웠을까요? 자기는 음식 준비하고 손님 맞기에 분주한데,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병 고침을 받은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에서 말씀만 듣고 있으니 짜증이 났겠죠? 처음에는 참았겠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마리아는 도와줄 생각은 없고 말씀만 듣고 있는 겁니다. 이제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서운하게도 예수님의 마르다의 청을 거절하고 다정하게 이야기합니다.(대부분 설교자들을 예수님이 마르다를 호통 치듯 말했다고 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두 번씩 부르는 것으로 볼 때 너희 수고를 내가 알고 있다는 예수님의 다정한 어투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야는 주님을 섬기는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고 싶으신가요? 아마 대부분 마리아가 되고 싶을 것입니다. 누구나 칭찬 받고 싶지 야단맞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본문 말씀에서 마리야의 칭찬만을 강조하다 보니 다 마리야가 되려고 하지 마르다는 되고 싶지 않기에 교회에서 일 하려는 자매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헌신의 방법의 차이입니다. 중심을 보지 못하니 엉뚱한 이야기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헌신의 방법의 차이를 보셨습니다. 보이는 사람의 관점에서 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관점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말씀 듣는 일이 소중하고 사람을 섬기고 대접하는 것이 나쁘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의 한계를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한도를 보고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전에 여자는 ‘부엌띠기’라 했습니다. 밥 먹을 때에도 할아버지, 아버지, 형, 저 남자들 항상 그리고 누나들과 어머니는 부엌 근처에서 시중들다가 남은 것을 먹는 적도 많았습니다. 요즘 그랬다간 큰 일 나죠. 여자들이 일의 중심에 서는 것이 아니라 보조자 역할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똑 같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근데 마리야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여자로 등장하니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볼 수밖에 없죠. 마리야의 중심에 예수님을 흡족하게 할 만한 무엇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마르다 편에 설려 해도 이 본문에서는 마리야의 헌신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했다는 말씀입니다. 마르다의 항변에 대한 마리야의 판정승입니다.

 

그 대신 마르다를 항상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마르다가 주님이 원하시는 헌신이 무엇인지 바르게 보지 못하기에 인정받지 못했을 뿐이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르다의 고백은 우리의 선입견을 깨게 만듭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느냐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의 물음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의 고백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제 본질적인 부분의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1. 헌신의 중심이 무엇인가?

마르다와 마리야 둘 다 헌신의 여자들입니다. 그런데 두 여자가 누구의 관점에서 열심을 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자기 열심’에 취해 있습니다. 그에 반해 마리야는 ‘예수님의 원하시는 일에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헌신의 중심에 누구를 두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분주합니다. 예수님에게 먹는 것으로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강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창하게 손님을 접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합니다. 중심에 주님의 말씀 듣기보다는 일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매사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늘 분주한 사람,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들은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천국에서 교회에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바라 보셨는데 사람들이 자꾸 예배 시간과 기도회 중에 작은 상자를 들고 자꾸 뭐라 뭐라 말하는 게 보였습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동일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베드로야 지금 사람들이 누구하고 말하고 있느냐” 베드로는 “주님 사람들이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 아닐까요?” “아니 나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데...”

우리의 중심이 지금 너무 분주합니다. 휴대폰이 인터넷이 애물단지입니다. 없으면 너무 허전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는데 김집사님의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울렸습니다. 목사님은 김집사를 야단쳤습니다. "예배시간에는 휴대폰을 꺼야지요....." 그 때 마침 목사님의 휴대폰이 역시 요란스럽게 울렸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당황하지도 않으시고 휴대폰을 받았습니다. “예!!!! 하나님!!! 말씀하시지요. 김집사 너무 야단치지 말라구요? 알겠습니다. 하나님!”

 

마리야의 중심은 말씀의 경청입니다. 마리야는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옥합을 깨는 장면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는다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야는 자신의 가장 귀한 향유가 든 옥합을 깨 주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로 씻어 줍니다. 마리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성경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녀의 행동이 칭찬을 받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설 때에 그 시간에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님이 필요로 하는 것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는 일일수도 있고 청소하고 손님 맞는 일일 수도 있고 노동의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가치의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최우선 가치로 둘 것 인가?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무엇입니까? 잘 분별하시는 눈이 필요 합니다. 순간 바른 판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중심은 우리가 압니다. 자신이 자신을 평가할 수 있는 판단력은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일을 하고 난 뒤 자신의 행위에 대한 판단만 할 것이 아니라 일 하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봐야 합니다.

 

2.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진정으로 말씀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예수님은 마르야에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와 '한 가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둘 다 음식의 가지 수로 보는 견해. 이렇게 볼 때 예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즉 마르다는 너무 많은 종류의 음식을 만들려 했기 때문에 바쁜 것이니만큼 음식의 가지 수를 몇 가지로 줄이거나 또는 한 가지만 하여도 족하다는 것입니다. (2) 전자는 물질적인 것을, 후자는 영적인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접대 행위 자체보다는 영적인 것에 관해 가르쳤다는 디벨리우스의 견해에 따라 (2)의 견해(見解)가 더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예수께서 물질적인 것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일을 다 잘한다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오늘 교회가 처한 현실이 그렇습니다. 다 잘하려고 하니 힘듭니다. 그래서 작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대로 살기를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팀 사역이 강조되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문제는 있습니다. 감당해야 할 일은 많은데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복잡 상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그 자리를 메우는 사람이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참답게 자신에게 헌신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같은 교회에 일군을 부르고 있습니다. 때로는 말씀의 자리에서 내려와 마음과 행동으로서 자신의 헌신을 주님께 드러내야 합니다. 마리야가 말씀 듣는 일 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까요? 마리아는 그날에는 말씀이 그녀에게 최대의 헌신이었기에 주님께서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헌신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처한 현실을 볼 때 우선적인 것은 영적인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배가 회복되고 기도가 회복되고 찬양이 회복되고 더 강화시켜 나가야 할 부분입니다. 그뿐 아니라 현실적인 부분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일할 수 있는 ‘분주하지 않는 마르다’일의 중심을 알고 차분하게 정리해 나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영광교회에 훈련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전도의 생활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공급되어짐으로 일을 감당한다면 어려움이 사라지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일이며 그것을 강화시키는 일입니다. 더욱 간구하며 나아가면 하나님이 반드시 취하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분주하지 않는 마르다’와 ‘발 밑의 마리야’ 모두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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