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사이에 서기 위해
틈(Gap) 사이에 서기 위해(중보기도) (요 17장) (2009. 2. 22)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뭔 말이냐고요? 지난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 나름대로 주일에 했던 여러 가지 문건을 재정리하고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금 있자 아내가 “저녁 먹자”고 했습니다. 자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 아내가 한 마디 하는 겁니다. “숟가락도 놓지 않고 어떻게 밥 먹느냐?” 사실 섭섭하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자기도 주일 날 예배드리고 점심하고 성경공부하고 집에 와서 저녁까지 다 준비했는데 자기들끼리(여기에서는 저와 두 아들, 즉 남자) 의리 없이 자기 숟가락도 놓아 주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짜증이 낳겠죠? 사실 속으로 순간 긴장했습니다. 후 폭풍을 두려워해서입니다. 그러던 중 준서가 날린 한 마디가 저희 부부를 웃게 만들었죠.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준서의 해석은 이러했습니다. 집에서 실질적인 권한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지만 어머니에게 눌려 말을 할 수 없는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는 배이고 어머니는 배꼽인데 거의 집에서 배꼽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빗대어 말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한 큰 원동력은 기도였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60년대 이후 산업화의 물결 속에 모두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한 삶을 그리스도인은 ‘새벽기도’로 나타내었습니다. 가족을 직장과 학교로 보내기 전 먼저 기도하고 와서 준비를 했습니다. 바로 어머니의 기도 운동으로 한국 남다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말씀 운동’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심령 대 부흥회’가 교회들마다 사람들을 모아 들였습니다. 골목 골목의 전봇대에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포스터가 목사님 사진과 함께 붙여져 있었습니다. 말씀에 능력 있는 목사님이 오신다고 하면 교회에 자리가 없었습니다. 부흥회 기간 내내 맨 앞자리를 뺏기지 않으려고 주무시는 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저희 모교회도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될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를 여기에 견주어 볼 수 있다 생각합니다. 말씀이 교회의 권위를 세우고 중심이지만 배꼽의 역할은 작지만 크디 큰 능력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는 말씀의 권능이 역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70, 80년대의 기도 운동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80년 세계 복음화 대성회 기간 중에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여의도에 100만 명이 모여 뜨겁게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가족 구원과 민족 구원을 행한 성도들의 뜨거운 기도가 결실을 맺어 90년대 기독교인 1000만 명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물론 그 기도운동의 한계점은 있었습니다. 개인과 가족의 축복, 개교회 중심주의, 선장 일변도의 설교와 기도였습니다. 90년대에 들면서 교회들은 경제 성장과 사회 민주화의 발판을 딛고 한층 더 발전된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연합주의 운동, 사회 개혁을 위한 운동, 경제 정의 실천 운동, 환경 운동 등을 주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도 운동이 사회 운동과 연합함으로써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일부에서는 교회가 기도가 죽었다. 한국 교회가 메말랐다. 이렇게 흥분하며 말하는 것을 보면서 일면 동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일고 있는 기도 운동의 바람은 한층 더 게고 진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보기도학교’‘중보기도세미나’등 많은 교회들이 연합하여 이런 기도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자기와 관련된 기도만으로 국한시켜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복음화와 가난하고 약한 민족들을 향한 사랑의 기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실로 고무적인 일입니다. 기도가 메말라 가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크게 성장하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교회의 대 사회 역할에 대한 큰 변화를 말해 주기에 더 크게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중보기도의 의미와 유익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중보 기도의 뜻과 의미
중보의 의미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을 먼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디모데 전서 2장 5절에서 ‘중보’라는 원어(메시데스)의 의미는 화친이나 계약을 맺기 위해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도 ‘mediator'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를 의미합니다. 한글 개역에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보는 죄를 자기가 대신 받고 남을 구원해 달라는 간청, 기도를 말합니다. 히브리서 8장 6절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그외 히 9:15, 히 12:24, 갈 3:19~20에서 동일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디모데 전서 2장 1절에서 나오는 ‘도고’는 원어(엔튜크세이스)의 의미는 사회적 교제의 개념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기도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 모두가 다 ‘intercession'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글 개역에는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해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도고’라 말하고 있습니다. 원 의미로 살펴 보건대로 ‘중보기도’란 말보다는 ‘도고’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많은 교회에서 사용되어 왔고 그 말의 사용으로 인하여 문제시 되지 않는바 ‘중보기도’라 사용해도 무방하리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새로운 용어로 쓰게 되면 혼란을 초래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래도 중보의 원래적 의미를 잘못 이해하여 에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여기는 언어적인 누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쓰고 있는 ‘중보’는 ‘도고’로서 남 위한 간구로 이해하면서 ‘중보기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라틴어에서는 중보는 ‘inter cedere'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다투고 있는 두 사람 사이를 의미하는 “갈라진 틈 사이에 서다.”란 말입니다. 중보기도는 기도자가 다른 사람 혹은 민족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서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기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06편 23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 택하신 모세가 그 결렬된 중에서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않게 하였도다.”에스겔서 22장 30절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이외에도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의 치유를 기도(대하 32:20~23), 느헤미야가 자기 백성의 안위를 위한 기도(느 1:8~10),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에베소 교우들에게는 서로 위하여 중보기도자가 될 것을 적극 권고하였듯이 자기의 문제를 기도하며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해 줄 것을 부탁한 기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는 ’기도자가 하나님께 나아가 중재적 위치에 서서 개인이나 교회나 민족이 처한 기도 제목을 붙들고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중보기도(도고)를 네 가지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성도를 위하여 하시는 중보기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자기를 믿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로마서 8장 24절 말씀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또 히브리서 7장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또 예수님은 지상 사역 하실 때에도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특별히 시몬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1절 32절 말씀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이러한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베드로를 엄청난 시험에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되었고 순교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홀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중보기도를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홀 : Scepter(Sceptre)권위의 상징으로 왕이 손에 쥐던 단장, 혹은 패. 한국 고 제도에 있어서는 신하가 아침에 왕을 알현 할 때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던 길이 한자, 넓이 두치 정도의 얄팍하고 길쭉한 패였다.)
둘째는 성령님이 성도를 위하여 하시는 중보기도입니다.
성령은 성령에 의지하고 성령 안에 사는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 말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우리는 신앙고백을 통하여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으며 내안에 성령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내안에 거하시며 동행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약한 모습 늘 보고 계시며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힘을 얻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낙담하여 넘어지지 않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심을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내안에 계신 성령님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셋째로 하나님의 종들이 성도를 위하여 하는 중보기도가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싸움이 끝나기까지 손을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이 기도를 들르셨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출 17:11~14)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환경을 인하여 원망하였을 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어 심판하셨을 때 모세가 기도하므로 그들이 놋뱀을 봄으로 생명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무엘도 첫째가는 사역이 중보기도임을 스스로 자인하면서 기도목회를 결연히 다짐한 바 있습니다. 사무엘 상 12장 23절 “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목회자 바울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또한 후배 동역자 디모데를 위하여서 중보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목회는 서신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9절 10절 말씀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이외 곳곳에서 바울의 중보기도를 말합니다.(고전 1:4~7, 고후 1:2, 갈 1:2~5) 실로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높이 들린 손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41절 말씀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든 손은 천지를 넘나드는 가장 큰 손이요, 가장 긴 손이며, 하나님의 보좌를 칠 수 있는 손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말씀에도 죠지 뮬러의 기도 응답의 열쇠는 빈손이라 하였습니다. 하늘 보좌를 뒤흔드는 것은 바로 중보기도의 빈손입니다.
넷째는 교회와 성도들이 주의 종을 위하여 들이는 중보기도가 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가 손을 들 때에만 승리했었습니다. 모세가 힘들 때 바로 옆에 아론과 훌이 협력했음을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 전투의 승리는 모세와 아론과 홀의 협력이 눈에 돋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의 기도의 동역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 5절 말씀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바울은 수차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중보기도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동바자인 동시에 주님의 종들의 동역자입니다. 위대한 복음 전도자인 무디목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사님도 그의 강단아래에 그의 말씀의 능력 있는 전파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을 두었습니다. 저이 동역자는 여러분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기도로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위해 기도할 때에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게 하옵소서!”라 기도해 주십시오. 또한 제가 훌륭한 신앙의 선배처럼 바르게 살 수 있도록 기도의 동역자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중보기도의 영적 유익
중보기도는 많은 영적 유익이 있습니다. 경험하고 살아가고 계시겠지만 제가 한번 정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 기름지게 해 줍니다.
중보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남은 위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기도대상자의 삶을 바꾸어 놓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목회서신인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를 보면 바울이 그의 영적 아들이 디모데와 주님의 동역자요 믿음의 군사된 디도에게 많은 말로 그들을 위로하고 있으며 목회에 있어서 많은 고언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한 중보기도의 마음을 글로 표현하였으며 디모데와 디도는 그의 기도로 인하여 복음 전파에 많은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또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이 감옥에서 낳은 영적 아들인 오네시모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서 1장 10절에서 12절 말씀“갇힌 자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한 사람의 일생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개의 종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의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중보기는 참으로 다른 이에게 유익함을 주는 줄 믿습니다.
둘째는 중보기도자 자신 또한 영적 유익을 얻습니다.
기도하는 자신 또한 은혜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중보기도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믿음의 동역자로 얻게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행위를 크다. 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그들이 천국의 주인됨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0장 2절 말씀 “그가(고넬료) 경건하녀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그의 기도를 통하여 이방인이었던 이들에게 성령이 충만한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해 줍니다.
중보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믿음이 많이 성장하게 합니다. 주변의 변화는 내 자신에게 영적인 강화를 주어 더욱 더 기도하게 만듭니다. 느혜미야, 에스라, 학개 이들은 선지자, 학사들이였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후 다시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예언을 믿었으며 그들이 다시 고향에 돌아갔을 때 황폐한 성읍을 보고 실망하고 낙망한 백성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으며 다시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백성들의 믿음을 말씀과 기도로 강화시켜서 다시 멸망 하지 않도록 백성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나갔습니다. 우리 또한 기도의 사람으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강화시켜 나가는 힘찬 그리스도인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넷째로 다른 사람을 치료시키는 은혜를 받게 합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에서 16절입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아멘!!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들을 치료하십니다.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이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병 고침 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영광교회에 치유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증거가 되어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줄 확신합니다.
중보기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의 창고요 믿음의 역사의 창구입니다. 하늘의 열쇠를 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축복의 자리에 함께 동참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이루시라고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 시작되는 특별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나’ ‘너’‘우리’모두 축복 받는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진실로 사람 사람 사이로 갈라진 틈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갈라진 틈들도 기도로 메워서 성령의 교통의 역사를 경함하여 한층 더 성장하는 영광교회를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