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교회 이야기

죽일 수 없는 사람 (이영식목사)

어저나 2009. 10. 27. 19:31

 

 

 

한인 심중의 그리스도(영한 합본) 김부열저 김윤국역

 

제 2 장  죽일 수 없는 사람


 “공산당원들이 나를 뒷 동리로 끌고 가서 사격장에 세웠을 때, 나는 틀림없이 마지막을 당했다고 생자했지요.” 이 영식 목사는 고소(苦笑)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이상하게도 주검의 무서움이라든가 내 가족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든가 하는 고통은 없었고, 오직 내가 사는 동안 너무도 한일이 없었다는 자책감(自責感)을 느낀 것이었지요.”


  이 영식 목사는 9년 동안 대구 시외에 있는 친명이나 되는 문둥병자 수용소에서 목사 일을 본 분이었다. 그는 문둥병을 두려위하지 않았다. 무서운 병에 걸려서 모양 없이 된 불쌍한 환자들과 그는 매일 섞여서 지내왔다. 그는 이 병이 비록 보기에는 그렇게 흉악(凶惡) 하나, 결핵(結核), 장질부사(長疾扶斯), 적리(赤痢), 임질(淋疾) 같은 병보다 덜 무서운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통하여 많은 문둥병자들이 좋은 기독교인이 되고 있었다. 대개 수용소(收容所)에 들어오기 건에는 믿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버림받은 무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주시는 것은 곧 알게 되는 것이었다.


  나이 많은 눈 먼(盲者) 환자들은 성경을 수 천 절이나 월 수 있었다. 이럴 때에 그들의 부은 얼굴에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빛이 빛나는 것이다.


  제 2차 세계대건 때에 이 목사는 일본(日本)에 가 있었다. ‘교도’(京都), 저 유명한 우상 신전의 도시, 전쟁공업 시설이 없다고 해서 미국의 공습(攻襲)을 받지 않은 ‘교도’에서 그는 맹아학교(盲啞學校)를 알게 되었다. 눈 감은 어린이들이 손으로 글을 일고, 귀 먹은 어린이들이 입술을 보며 말을 배우는 것을 보고 그의 마음은 뛰었다. 고향인 대구(大邱)에 그런 학교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그의 가슴이 고동(鼓動)된 것이었다. 둘론 서울이나 평양(平壤)에는 그런 기관이 있었어도 대구에는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동시에 그는 대구 형무소(刑務所)에서 교화목사(敎化牧師)의 일을 시작하였다. 1946년 저 유명한 십일사건(十一事件) 때에 그는 형무소 목자로 있었다. 수용된 공산당을 목사는 최선을 다하여 교도(敎導)하였다. 물론 공산당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친절과 사랑으로 그들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이 목사는 ‘교도’의 맹아학교(盲啞學校)를 졸업하고 점자(點字)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또 아자(啞者)를 가르칠 수 있는 부인도 한 사람 만나게 되었다. 맹아 학생들은 쉴게 모을 수 있었다.


  어떤 날 이 목사는 선교부(宣敎部)를 찾아 와서 다 파괴된 채 수리되지 않은 선교사 집  한 채의 사용허가를 구하였다. 그 집이라고 하는 것은 문도 창도 없었으며 떨어질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다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이 목사는 이 냉큼한 집의 사용 허락을 받아 학교를 시작한 것이다. 창문에는 종이를 바르고 문짝 대신으로는 휘장을 했다. 많은 어린이들이 거기서 살았다. 불(火)이라고는 오직 깡통에 피는 숯 불 뿐이었다. 그런데 숯불은 어린이들의 몸에 위험하기 때문에 그것도 마음대로 못 피우도록 규정될 수밖에 없다고 선교부는 주장했던 것이었다.


  1950년 여름 공산당의 남침(南侵)이 점점 대구로 육박(肉迫)해오자 이 목사는 낙동강(洛東江) 저쪽 성주군에 사는 친척과 친구들의 형편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그는 강을 건너 그들을 찾아가서 같이 피난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강으로 되돌아 와 보니 강 길은 끊기고 미국 군인들이 길을 지키 있었다. 피난민은 한 사람도 강을 건너 남하(南下)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너무 많은 피난민의 이동은 길을 막게 되고 전투(戰鬪)를 방해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 목사와 친척 친구들은 섭섭히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목사는 할 수 있는 대로 숨으려 했으나 결국은 공산경찰에게 체포(逮捕)되었다. 그는 재판을 받아 사형(死刑)을 받게 되었는데I 그 죄는 아래의 세 가지였다.

  첫째로, 그는 반동정권(反動政權)의 경찰이었다는 것.

  둘째로, 기독교인이었으니까 우익분자(右翼分子)이었다는 것.

  셋째로, 목사였으니까, 미국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주구(走狗)라는 것 이었다.


  사격반(射擊班)의 처형(處刑)이 가까와 올 때에 이 목사는 끝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悔改)할 간절한 마음이 일어났다. 그의 회개는 어떤 범죄에 대한 것이나 거짓과 증오와 간악한 행위에 대한 회개가 아니었다. 그의 가슴에 사무친 고통은 그가 살아 온 길이 너무도 가치가 없었다는데 대한 것이었다. 그가 남을 위하여 살아야 될 줄 알면서도 그 아는 대로 남을 위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었다.


 “나를 쏘기(射) 전에 잠간 기도할 시간을 주시기 원합니다.” 이목사는 책임장교에게 구하였다. 장교는 힐긋 이 이상한 간청에 놀라며 측은한 눈초리로 허락했다. “좋다, 그러나 빨리 해라.”


  이 목사가 땅위에 꿇어 앉아 기도를 드리려 하는 순간, 사격반원(射擊班員) 한 사람이 그를 알아보게 되었다.


  “저 사람, 저 사람, 아는 사람이다. 그럼! 내가 대구 형무소에 있을 때 저 사람이 있었지‥‥ 저 사람은 우리를 친절이 대했어‥‥ 다른 순경들 같지 않고‥‥‥ 아 저 사람은 우리 당원들에게 아주 좋게 대해 주었지.”


동료의 말을 의미 깊게 듣던 책임 장교는 이 목사를 향하여 소러를 질렀다. “뭐라고 할 말이 없는가?” 이 목사는 기회가 은줄 알고 끝까지 다 말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신 친구요, 나 뿐 아니라 불쌍하고 가난한 보든 인민들의 친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것은 그 때문이지요, 나도 그를 따르는 신자입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나는 누구의 주구도 아니요 오직 우리 국민들의 불행을 돕기 위한 목사입니다. 내가 순경들이 관할하는 형무소에서 일한 것은, 거기 수용된 이들은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지요. 저 분이 말해 준 것처럼 나는 형무소에 수용된 분들을 도우려고 애썼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는 다른 불행한 분들도 도우려고 애써 왔지요. 9년 동안 나는 우리 국민들의 문둥병자를 위해서 일해 왔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자리가 없어서 수용소에 들어오지 못하고 집에서 앓는 불행한 문둥 환자가 많이 있어요. 그들의 고통은 크고 가진 것은 없어요.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을 도우려고 했습니다.”


  “또 그 밖에도 우리 동포들 중에는 앞 못 보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불쌍한 사람들이지요. 나는 대구에 이 맹아들을 위한 작은 학교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읍니다.”


  “내가 죽는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지요. 나는 죽는 것, 무섭지 않아요.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까요. 나는 영생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누가 저 불쌍한 맹아들을 돌볼 것인지? 누가 저 불쌍한 문둥환자들을 돌 볼 것이겠소?”


  그는 장교에게로 향하며 말했다. “만일 당신의 어린 딸이 앞을 못 본다고 하고 또 그애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이를 누가 죽인다고 하면 당신은 어떨 것이요?”


  그 장교는 신기한 눈으로 이 목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죽일 수 없지‥‥‥‥” 그는 크게 고함질렀다. “뛰라!” 그리고는 부하에게 말하기를 “도망가는 대로 버려두라.” 이 목사는 자기가 뛰는 동안에 건에 들은 말과 같이 공산당이 잔등을 쏠 줄로 생각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목사는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숨이 끝나고 의복이 땀으로 젖어 버릴 때까지 산을 향해서 뛰었다. 그는 ‘맥아더’(MacArthur)장군이 인천(仁川)에 상륙하고 공산당이 북으로 도망할 때까지 숨어 있다가 살아 나왔다.


  이 목사는 자기를 기다리는 어린이들을 찾아 대구로 돌아 왔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을 데서 살아왔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시로부터 어떤 부서진 집 한 채의 사용허가(使用許可)를 얻었다. 선교회는 그 집을 수선(修繕)할 돈을 얼마간 얻어 들이었다. 그는 창에 유리문을 넣고 마루를 갈았다. 한국을 방문하던 ‘밥 피어스’(Bob Pierce) 박사의 도움과 ‘존 밀톤회’(JohnMilton Sooiety)의 도움으로 그 학교는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공부가 정식으로 시작되고 새 선생들이 채용되었으며 일본으로부터 점사판(點寫版)이 입수되었다. 어린이들은 ‘가나다’를 배우기 시작하고, 벙어리 어린이들은 ‘아어오유이’를 발성  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끝나게 될 즈음부터 전쟁의 무서운 결과는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들이 유황탄(硫黃彈)에 맞아 얼굴은 변형(變形)되고 눈을 잃었다. 부모를 죽인 무서운 폭탄은 남은 어린이들의 눈을 멀게 했으며, 사랑하는 길을 없어지게 한 폭격은 그 무서운 소리로 귀를 멀게 하였다. 하나 둘씩 이들은 이 목사가 경영하는 학교로 찾아 들게 되었다. 이 목사는 보두 받아 들였다. 마음 넓은 이목사 확인은 두 팔을 펴서 찾아 드는 불쌍한 어린이를 어머니의 사랑으로 받아 안았다. 이 목사의 자은 집은 이 어린이들로 우굴거렸다. 맹아(盲兒)들은 처음에는 하나씩 먹여 주어야 했으며 차차 스스로 먹기를 배우게 되었다.


  이 목사 맹아생(盲兒生)중에 재간 있는 어린이 몇을 공립학교를 데리고 나가서 그들이 배운 것을 보여 주었다. 이들을 통하여 손 때 묻은 지폐(紙幣)가 모여져서 학교는 유지되어갔다.


  1952년 봄에 이 목사는 몇 명의 졸업생을 내게 되었다. 일보러 나왔던 미국 민사 원조처직원들은 이들을 보고 크게 놀랐다. 한 소경된 처녀 아이는 손가락을 사용해가며 졸업식 연설을 하고, 그 옆에 선 벙어리 남자는 연설하는 소경의 입술을 보고 손가락으로 다른 벙어리에게 통역을 하고 있었다. 한쪽에 있는 맹아들이 일제히 “주의 말씀 듣고서 준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터 닦고 집을 짓는 잘세”를 부르면 건너편에 앉은 벙어리들은 선생의 인도함으로 손을 펴서 그 뜻을 형용으로 반주(伴奏)하는 것이었다. 소경과 벙어리의 함창 !


  이 교장은 어린이들이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을 배움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이들이 자력으로 독립 생활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구두 짓는 집  하나, 수건, 공장 하나, 그리고 농사터를 준비하였다. 맹아들이 자라서 믿지 않는 나라에서  처럼 거지 생황을 하게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이 목사는 이들에게 생계(生計)를 교육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예수 그러스도의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다. ‘찰스 웨슬레’가 희망하던 “만입(萬口)”의 찬송이 어린 맹아들에 의해서도 불리워지는 것이다. 나는 친히 그들의 노래를 들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이세.” 진실로 이들은 예수께서 사랑하심을 잘 알고 있다. 예수의 사랑은 이들에게 따뜻한 잘 곳과 먹을 것을 주었으며, 익고 쓰고 세상에 뵈는 것을 배우는 학교를 주셨을 뿐 아니라, 뵈지 않는세상의 일을 배울 길도 준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들을 사랑하는 따뜻한 팔과 그들을 인도하는 다정한 손을 통하여 배워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사랑하신다. 참으로 예수님은 이들을 사랑하신다. 이 영식 목사와 그의 마음 넓은 부인의 심령 속에 이 예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이 목사의 명성(名聲)이 차차 퍼져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미국에 있는 제 3군은 군목비(軍牧費)로 5,000불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돈을 어데다 쓸 것인가? 이 세상에서 제일 도움이 필요한 한국에 제 3군 군목은 대구에 있는 통신대 군목 ‘에스티스’(Estes)에게 편지를 내었다. “이 돈을 쓸 수 있는 제인 좋은 사업은 무엇일까?”하고, ‘대구의 등대(燈臺) 맹아학교(盲啞學校)’라고 회답은 갔다.


  장로교 선교회는 5,000불을 더 보태었다. 주한 민사 원조회는 약 12,000불 가치의 물자를 제공하였다. 주한 미국(美國) 군사고문단(軍事顧問團)도 원조의 손을 써 주었다. 미국(美國)해외(海外) 맹인재단(盲人財團)에서 충당금을 보내왔다. ‘밥 피어스’(Bob Pierce) 박사도 선물을 보내왔다. 대구시에서는 구 공동묘지를 청소 정리하여 사용하도록 할당해 주었다.


  1953년 가을까지에는 부엌 식당 목욕탕이 있는 기숙사(寄宿舍)가 건립되었다. 이 기숙사 헌당식(獻堂式)에는 경북도지사, 대구시장, 미군사령관 ‘론톤’(Lawton) 장군 등이 출석하여 식을 빛나게 해 주었다. 미국 수도 와싱톤(Washington, D.C.)에서는 군목(감軍牧監) ‘이반베 릴’(Ivan Bennett) 장군이 오게 되어 있었으나, 당일 갑자기 생긴 공무로 오지 못하였다.


  소경과 벙어리 어린이들이 함창을 했을 때에 백전(百戰)의 경험으로 잔뼈를 굵게 한 노 장군 사령관은 감격에 넘쳐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지금 미국 해외 맹인재단은 육군의 원조 물자의 보충을 받아 이층의 훌륭한 교사(校舍)를 짓고 있다. 어린이들도 역시 놀지 않고 공사를 돕고 있다. 이 교장은 이들을 맹아(盲兒) 아아(啞兒)의 순서로 나란히 세워 놓고, 트럭이 싣고 온 벽돌을 집 짓는 곳까지 한손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는 것이다. 벙어리 어린이들은 벽돌을 받는 대로옆에서 손을 들고 기다리고 섰는 소경 아이의 손에 곡 건해 줄수 있다. 이렇게 벽돌은 한장씩 한장씩 손에서 손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이렇게 하기를 재미나는 유희로 알고 열심 있게 잘 하는 것이다. 이 목사는 이들을 잘 훈련시켜서 벙어리가 소경아이를 잘 이끌 수 있도록 하였다. 이들은 피차에 도우면서 즐겁게 유희할 수 있고 일할 수 있다.


  이 학교는 지금 좋은 위치에 우뚝 서서 큰 인물들의 방문처(訪問處)가 되어 있다. 한국에서 국제연합군(國際聯合軍) 사령관(司令官)을 지낸 ‘밴 플맅’"(James Van Fleet) 장군이 특사(特使)로 잠시 한국을 방문 했을 때, 그는 이 맹아학교로 안내함을 받았었다. 극동 사령관(極東司令官) ‘헐’부인(Mrs. Hull)은 이 학교를 보기 위하여 특별 비행기로 와서 저 늙은 군인이 한 것과 같이 눈물을 홀리고 돌아갔다.


  이 목사는 아직도 큰 꿈을 꾸고 있다. 그의 눈은 장래에 여기에 이루어질 예배당, 고등학교, 기술학교, 운동장, 농장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그렇게 실현될 줄로 안다. 그러나 이 목사는 일만 하고 쉴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아직도 정든 옛 문둥 병원을 잊지 않고 있다. 이 놀랄만한 사람은 주일이면 외로운 대구 시외에 시설(施設)해 놓은 문둥병자 촌을 찾아가서 하루를 지내는 것이다. 그 곳에 그는 교회를 설립했다. 주한 제5공군(駐韓第五空軍) 소속제 58폭격대(爆擊隊)가 공급해 준 자재는 훌륭한 예배당이 된 것이다. “교인은 얼마나 됩니까?” 하는 물음에 “600명 가량 되지요.” 이 목사는 대답한다. “이들이 이 촌으로 오기 전에, 믿는 사람은 몇이나 있었을까요?” 나는 나이 많은 집사에게 물었다. “한 사람도 없었지요. 이 목사님을 만나기 건에 믿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사를 만나자 모두 예수 믿기를 원했어요.” 하는 것은 집사의 대답이었다.


  이 목사는 그저 빙긋 웃으며 말한다. “공산당이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주님께서 이제는 좀 값있는 생을 살라고 한 번 더 내게 기회를 주신 것이었지요. 그런데 내 갈 길은 아직도 멉니다.”


이 책은 ‘韓人 心中의 그리스도’(英韓合本)의 2장 내용이다.

신학박사 갑부열 저

신학박사 김윤국 역

가남사 1986년 4월 15일 2판 발행


광명학교 책 정리를 하던 중에 버려진 책을 아내가 주워다 왔다.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자료가 될 것 같다. 1945년 해방 이후와 1950년대 한국전쟁과 어려운 시절의 한국 교회를 외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책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감부열선교사 한국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선교사인데 이가 한국인들의 교회를 미국과 세계에 전하기 위해 지은 책이다. 깊은 감명을 받았고 우리 선조들의 신앙이 뿌리가 되어 더욱 큰 나무가 되어 해외에 그리스도의 빛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 여기에 1980년대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어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한센인 등의 용어가 여과 없이 사용되고 있다. 바라는 것은 영문학도가 다시 재번역을 해서 출간할 만한 책이라 사려된다.

 

 감부열(Arch Campbell) 부부

 

사랑과 봉사의 사도인 감부열 선교사(1954) : 대구맹아학교에서 설교하셨다.

 

 

대구 등대 맹아학교 교장 이영식목사 (등대 맹아학교라 불린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다. 당시 교명은 대구맹아학원이었다.)

 

 

맹아생들이 학교 건물을 짓기 위해서 벽돌을 나르고 있다.

 

 

국기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주 예수게서는 이영식목사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다.

  

 

'영광교회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광교회 이전 예배  (0) 2009.12.23
장애인 선교와 영광교회 사역  (0) 2009.11.09
영광교회 이전 예배 초청장  (0) 2009.10.20
이전 감사 예배 순서지(주보)  (0) 2009.10.20
영광교회 이전 예배  (0) 2009.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