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사순절은 사랑의 절기입니다.

어저나 2009. 4. 14. 17:11

 

사순절은 사랑의 절기입니다. (롬 5 : 8 ~ 11)            (2009. 3. 29)


우리나라의 국화는 ‘무궁화’입니다.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 꽃 피었네 피었네 우리나라 꽃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 꽃’ 제가 초등학교 때 불렀었던 노래입니다. 민족주의를 내세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동네 곳곳에 무궁화 심기를 했습니다. 미술 시간에는 무궁화 그리기도 했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권위주의 시대가 가고 ‘민주화’의 시대가 오자 무궁화 꽃은 사라지고 온 나라가 벚꽃에 매료되어 축제가 열려집니다. 저도 벚꽃을 좋아하고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기도 합니다. 벚꽃이 ‘사꾸라’ 일본의 국화라 해서 싫어하거나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우연히 창조사학회 김성일 장로님의 글 중에 ‘한민족의 기원’이란 글을 읽던 중에 제 마음을 끄는 곳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무궁화’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역사적으로도 근거가 있기에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환웅은 무궁화가 핀 적성산에서 신시를 열었다 합니다. 고대로부터 동이족의 꽃으로 인식되어져, 신라시대 화랑의 머리에 장식하는 꽃 그리고 조선시대 때는 장원 급제자에게 내리는 어사화, 그리고 오늘날 우리나라 대통령의 문장 가운데 있는 꽃도 무궁화요, 우리나라의 국화(國花)도 바로 무궁화입니다. 이 무궁화는 일제에 의해 수난을 겪었지만 우리나라의 꽃으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무궁화의 학명은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Hibiscus Syriacus) 이것은 ‘시리아에서 온 꽃’이란 뜻으로 그 근원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바벨론과 니느웨성 등 고대 앗시리아 지역에는 현재 무궁화 모양으로 장식된 고대 건축물들과 성벽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무궁화의 영어이름이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라는 것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왜냐하면 '샤론'이라는 곳이 이스라엘에 속한 지역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샤론(Sharon)은 이스라엘의 욥바에서 갈멜산까지 이르는 길이 약 90km, 너비 약 18km의 해안평야지대입니다. 이곳은 살림벌채로 인해 대규모적인 목초지가 있을 정도로 비옥하고 경관이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성경의 속담으로 자주 언급된 장소입니다. 오늘날 샤론은 대대적인 관계시설을 갖춘 채 감귤류 숲과 다른 상업적인 농장을 위해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는 비옥한 땅입니다. 이곳은 옛날에 아름다운 야생화로 덮여 있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그 중 대표적으로 자생하는 꽃이 수선화입니다. 성경에는 백합화로 대부분 기록돼 있고, 대부분 팔레스틴 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서식하며 자주색 또는 흰색 꽃을 피우는 아네모네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일반적인 '샤론'은 원래 넓은 평야와 관계가 있는 빽빽한 초원을 말합니다. 샤론이 ‘평탄한’, ‘곧은’, ‘옳은’, ‘의로운’이라는 뜻의 ‘야사르’에서 파생된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샤론을 여호와의 영광으로 새롭게 변화된 인간의 상태, 곧 구원과 영원무궁한 평화의 안식처로 기록하기도 합니다(사35:2, 사65:10).


성경에서 샤론의 장미로 알려진 ‘샤론의 수선화’(KJB: the rose of sharon, NIV: a rose of sharon) ‘무궁화’는 모습과 색깔과 향기에 있어서 꽃 중의 꽃, 여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매는 중요 식품의 재료로 사용하기도 하며 의류용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평범한 꽃입니다. 어디에서나 자라기에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별다른 고귀함이나 화사한 아름다움은 갖추지 못한 흔한 들꽃입니다. 예수의 고난을 예언한 이사야 53장 2절에서 기록한 것처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꽃’입니다.

 

아가서 2장 1절은 ‘사론의 수선화’를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대설교가인 스펄전(C.H.Spurgeon)은 아가서 2장 1절을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의 예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빌2:5-6)로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무궁화는 이스라엘에서 시작한 인류에 대한 사랑과 구원을 말하는 꽃입니다. 무명 시인이었던 아이다 가이리(L.A. Guirey)여사는 ‘샤론의 꽃 예수’(찬89장)이라는 시로 이것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궁화가 ‘샤론의 장미’라고 지금까지 불리워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김성일 장로님의 말씀대로 ‘조선’은 일찍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았다는 하나의 징표로 무궁화를 지적하고 있지만 오늘 무궁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구원의 징표로 무궁화를 바라본다면 무궁화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지리라 확신합니다.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꽃이지만 온 인류를 위하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이하기에 사순절을 맞이한 즈음에 진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민족이 일찌기 무궁화를 사랑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선민의식’과 연관시켜 바라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류 사랑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 로마서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 어떻게 나타났는지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위한 사랑입니다.(롬 5:8)

7절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데 있지 '의인'과 '선인'을 구별하는데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7절의 말씀은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 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을 크게 드러내기 위하여 인간 세상의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형식의 비교법을 사용하고 있는 7절은 8절의 내용의 서론격입니다. 7절이 8절 내용에 대해 서론격이라함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8절에서 바울 사도는 요점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인간 본성의 죄악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인이라는 말에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 ‘당신은 죄 때문에 멸망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우리는 그러한 표정에 반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악성을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반응은 자신의 마음이 찔림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그럴 때 복음은 더 강하게 역사하는 줄 믿습니다. 아마 저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다면 저의 죄악성을 모른 채 살아갔을 겁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님이 저의 죄악성을 알게 해 주셨으며 그 때 주님을 나의 죄를 사해줄 영원한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드릴 때 시작됩니다.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신에게 속아가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통하여 선행, 구제, 진실, 철학, 노력을 통하여 충분히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절대 불가능한 사실임을 말합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현재 상태에 대한 분명한 각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0)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있을 때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살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친구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최고의 사랑으로 사셨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근원적인 것이며 사람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요일 4: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이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9절  말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시작도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사랑을 본받고자 원합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 그 근본정신을 ‘박애’라 말합니다. 그 사랑의 근원에 하나님이 인간을 너무 너무 사랑해서 자기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그 죄악의 벽을 허물어 화목되게 하시게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그 사랑에는 죽음(대속)이 있습니다. ‘피’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임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참된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 예수’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몸소 그 사랑을 드러내게 됩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고 예수님을 위한 사랑으로 구체화되고 몸으로 그리스도를 닮아 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아서 그 사랑의 주인공으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확증하셨느니라’에 해당하는 원어의 의미는 ‘추천하다’, ‘드러내다’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역 성경을 ‘나타내 보여 주다’(demonstrate)로 번역하거나(NASB, NIV), 혹은 단순히 ‘보여 주다’(show)로 번역하기도 했다(RSV).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바울이 동사의 시제로 현재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현재에 발생하는 단순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 진행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슈니스테신'을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나타내 보여주고 계시느니라’(is demonstrating)로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줍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구원 역사는 지금도 계속해서 나타나며 진행 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예배, 말씀, 기도, 교제 중에 체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즐거워하십니다.

11절 말씀 “이제 우리도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에서 ‘즐거워하느니라’는  ‘자랑하면서 즐거워하다’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미하는 ‘즐거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즐거움일까요?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속(救贖)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즐거움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둘째로, 영원한 소망을 바라는 즐거움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이 즐거움을 언급했으며 본서의 다른 구절과 고린도후서에서도 수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 8:18에서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고 8:24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으며, 고후 5:1에서는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참된 즐거움입니다. 현재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일시적이요 가변적이며 또한 거짓되고 기만적이나 그 근원과 이유를 하나님께 둔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요 보증이 있는 즐거움이기에 참된 즐거움이 됩니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요 축복 그 자체이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남이 누릴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함께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소유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설교문을 작성하기 전에 요한복음의 말씀을 읽던 중에 너무 감사했고 기뻤던 말씀을 소개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다.”(요 15:15~17) 아 말씀은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하신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벗’으로 소개된 사람은 ‘아브라함’ ‘모세’ 밖에 없습니다. 그 칭호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는 우리에게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벗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택함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했다 했습니다. 부름은 우리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내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시게 되었습니다.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실이 항상 있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굶주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부족하게 살게 하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의 명대로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는 계속해서 공급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약속의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몸소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사랑에 빚진 자 되어 복음의 증인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전파하는 사랑의 전도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은 축복입니다. 사순절은 고난만 떠 올리게 되는데 사랑이 있었기에 고난도 죽음도 가능했습니다. 우리도 사랑이 있다면 어떤 고난도 두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에 동참하자’면 다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 거합시다’라고 말하면 다 사랑 안에 거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두려움을 내어 쫒고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곳에 충만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