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어저나 2009. 4. 14. 17:1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 : 34)       (2009. 4. 5)


시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입니다.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죽지 않았을 때 ‘유고 시집’이 나왔던 시대의 기인이었던 천상병 그에게는 항상 많은 것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의 아내(목옥순)가 운영하는 카페 갈 수 있는 돈 이 천원, 선그라스, 하루에 맥주 2컵 욕심 없이 백치같이 살다 하나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깊은 감명으로 다가와 마음속에 내려 앉아 아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그의 시는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뒤에도 살아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흔적을 지운다고 없어지지 않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의 말과 글과 행위가 남아 있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전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서 감동을 받아 몰래 눈물 흘린 적도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을 ‘아름다운 소풍’이라고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으며 그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는 생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 ‘기쁨’ ‘사랑’을 나누어서 행복해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유명한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 유언입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류관순 열사의 유언입니다. 17세 소녀의 말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당당한 기풍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죽음이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이유를 이 유언의 말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류관순 열사는 믿음의 눈을 통하여 민족을 마라보고 행동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녀의 당당함은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거나, 유언의 말씀을 지키려고 부던히 애를 씁니다. 유명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의 유언을 집에 붙여서 보거나 아니면 외워서 그들의 삶을 추앙하기도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를 기리는 마음으로 천주교회에서 교구별로 미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성경에도 요셉은 자기의 뼈가 가나안에 묻혀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유언으로 남겼으며 후대에 출애굽 때에서야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유명한 유언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24장 15절 말씀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는 확실하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습니다.


동서고금, 하나님을 믿던 믿지 않던 유언은 소중하게 간직 되어 왔으며 후대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을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라 말합니다. 그의 삶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사림들입니다. 우리는 그의 말씀을 배우며 지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 다 소중합니다. 이제 사순절의 끝자락인 고난 주간을 맞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을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는 시간들입니다. 그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고난 받으시면서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을 알고 계시는지요. 전 이번 일주일 동안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신 7마디(가상 칠언)를 여러분에게 전할려 합니다. 사람들이 소중히 생각하는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첫 번째 말씀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의 말씀으로 은혜의 시간을 나누고자 원합니다.   

‘아버지여’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예수 그리스도를 미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는 특권을 부르게 되었으며, 로마서 8장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구약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두려워서 ‘야훼’의 이름만 나와도 ‘아도나이’라 부를 정도로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과 동등 되심을 말씀하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시작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처음으로 말씀하신 이도 예수님이시고 가르쳐주신 이도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시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의 고통으로 죄를 사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1. 예수님은 죄 문제 해결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여정은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었으나 인간은 누구도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죄 고통으로 인하여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악의 문제 앞에서 굴복하고 죄의 권세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하나님은 자신이 친히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와서 죽임을 당하므로 아담의 죄로 인한 인류의 파멸을 십자가의 짐으로 해결하시고자 이 땅에 오셨으며 죽으심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18, 19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예수님의 순종으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으며 사망의 권세가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었음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그의 피로 우리가 정결케 됨을 믿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 문제의 해결은 우리의 병, 고통, 슬픔 의 죄악된 것 속에서 나온 모든 것들이 해결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죄를 문제를 분명 해결 받았음을 선포합니다. 이제 우리를 어둠의 길로 인도할려는 죄악의 권세가 물러감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2.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지니셨습니다.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자를 치유해 주실 때 ‘네 믿음이 구원했다’고 하셨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실 때) 병의 치유의 근원은 믿음이었습니다. 때로는 말씀으로 병을 물리치셨습니다. 직접 귀신을 물리치심으로 병을 치유했습니다.(군대 마귀 들린 자, 귀 먹고 어눌한 자),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대적하게 한 말씀인 ‘네 죄가 사해졌느니라.’ 죄 사함을 통한 치유였습니다. 마가복음 2장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의도는 “인자가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라.”(막 2:10) 라는 것 이었습니다. 향유 부은 여인에게도 예수님은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눅 7:48)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이루실 때 죄 사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기에 죄를 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십자가상에서도 죽어 가면서도 죄 사하여 주시길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의 죄 뿐 아니라 원수의 죄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원래 불순종의 자식이었으나 예수님의 사랑으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죄 많은 우리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에서 함께 하늘에 앉으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그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신분에 놀라운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공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히브리서 12장 4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죄와 전쟁을 선포해야 합니다. 죄와의 전쟁 선포는 마귀와의 전쟁입니다. 이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기에 이 싸움의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승리를 선포하며 나아가며 반드시 승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 높일 것입니다.

                                                                  

2) 원수의 죄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 아버지께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라고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위대하셨습니다. 자신을 죽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길 원했으니 그는 참 하나님 되셨습니다. 빌라도와 유대 종교 지도자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빌라도나 유대 종교 지도자의 죄도 다하신다는 말씀을 십자가상 위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판 가룟 유다의 죄와 온 인류의 죄를 다 사하신다는 십자가상에서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는 홀로 모든 것을 이기어 내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예수님이 모든 것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4.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 주기도문에서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기도문 드릴 때마다 가장 고백하기 힘든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많이 찔리는 부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온전하게 용서해 주셨는데 아직 온전하게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주님을 닮기 위해서 많은 기도와 마음의 다스림이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용서는 평생 동안 훈련하고 다스려야 할 부분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피흘리기까지 싸우라고 바울 사도는 말했나 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우리는 주님의 거룩함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죄를 멀리하고 의에 이르는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기에 우리는 주기도문을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더 의롭게 살게 됩니다. 용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2) 일흔 번에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 하면 490번인가요?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책무를 수치화하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벤시라 같은 이는 범죄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을 말하고 있고(외경 집회서 19:13-17), 또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 이 더한 일곱 번을 용서할 것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숫자는 강한 상징성을 내포한 말로서 숫자상의 어떤 기준이나 실제적인 용서의 범위를 초월한 끝없는 용서, 무제한적인 사랑을 가르친 말이다. 즉 형제들간의 용서는 결코 횟수나 일정한 정도에 의해 제한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용서에 있어 새로운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이들을 용서하시고 구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위기에 처하기도 하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구하기 위해서 ‘죄 없는 자는 돌로 쳐라’말씀하시고 그 여인에게 ‘다시는 범죄 하지 말라’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용서와 관용의 삶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제일 문제는 ‘흑백 논리’입니다. 토론할 때 가장 힘든 것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논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중간의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처럼 절대 진리도 있지만 삶의 부분에서는 ‘상대 진리’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삶을 살지 않아야 합니다. 남을 정죄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시각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관점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다문화 속에서 바르게 판단하고 올바르게 수용하는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계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원래 계명의 본질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내가 해석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역사 안에서 바르게 볼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럴 때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 말씀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러하고” ‘용서’의 본질은 예수님이 하셨듯이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용서하며 받아들이며 관용의 자세로 이웃을 바라보며 자신을 키워 가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가장 어려운 길에 있습니다.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죄의 확신에 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이 믿음 안에 거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