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어저나 2009. 4. 14. 17:15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요 20 : 11 ~ 18)     (2009. 4. 12)


서일교회 있을 때 유독 많은 이름은 ‘은혜’였습니다. 김은혜. 박은혜, 이은혜, 도은혜, 최은혜, ... 10명 정도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부 담임 목사님의 작품입니다. 아들은 ‘충만’입니다. ‘은혜 충만’ 듣기에 꽤 괜찮았습니다. 성경에도 동일인이 많이 등장합니다. 남자 이름으로는 ‘야고보’ ‘유다’입니다. ‘예수’란 이름도 그 당시에는 흔한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구약의 ‘여호수아’, ‘호세아’ 등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마리아’

우리를 조금 혼란스럽게 하는 여자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구약성서에서는 ‘미리암’ 예델의 딸에게 쓰이고 있으나, 신약성서에서는 대략 6명의 여자가 마리아란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 흔한 이름으로 생각됩니다. 가장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 4명의 여자 중에 한명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죽음으로 까지 함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 이후 성경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의 남편 요셉과 함께 ‘순종’ 대명사를 붙일 수 있는 위대한 여인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 불리어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이며,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입니다. 글로바는 알패오(마 10:3, 막 3:18, 눅 6:15)와 같은 사람입니다. ‘글로바와’ 알패오’ 는 이름은 다 같이 아람어 하르피의 변형으로서 글로바와 마리아는 사도인 작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세의 부모입니다(막 15:40에는 ‘요세’, Joses'로 되어 있다. 눅 24:10). 이 마리아를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자매라고 하는 설이 있으나, 요한복음 19장 25절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다른 두 부인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매가 같은 이름을 가졌을 없으며 또, 헬라어 본문에는 ‘이모’의 다음에 콤마가 있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를 구별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들이 예수의 제자이며, 그 중 한 사람이 사도였다는 사실 이상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십자가와 매장, 그 후 사흘째 되던 날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갔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입니다.


세 번째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유일하게 사도행전 12장 12절에만 언급되어져 있으며 그녀의 집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네 번째는 로마의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로마서 16장 6절에 나오는데 그녀에 대해서는 바울을 위해 수고한 많이 한 여인으로 소개되고 있을 뿐입니다.


다섯 번째는 베다니의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눅 10장 38절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주님 발 앞에서 말씀을 들음으로 칭찬 받은 여인입니다. 사복음서 모두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옥합을 깨고 향유를 부음으로 예수님께서 “온 천하에 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37절에 익명의 여인을 ‘죄인’으로 묘사하는데 중세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인으로 이해되기도 했지만 요한복음으로 보건데 타당하지 않고 막달라 마라아와는 다른 마리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댄 브리운에 의하면 ‘미스테리의 여인’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댄 브라운’이 이야기하는 젊고 아름답고 예수님과 밀담을 나눈 여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 3절에 보면 “또한 악귀를 쫒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에게 헤롯이 자기의 내탕고를 맡길 때 어린 사람을 택했을 리가 없습니다. 최소한 40대 후반은 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니 막달라 마리아가 이런 여인들과 친분이 있다는 걸로 볼 때 중년의 여자 이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 상당한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과부였으며 40대 후반 이상의 나이를 가진 여자였습니다. 이런 여인과 예수님이 사랑을 나누었다고 말하는 것은 억측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창녀로 인식되게 된 것은 A.D 590년에 교황에 오른 그레고리 1세가 성경을 잘 모르고 591년에 부활절 설교를 하면서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마리아인 ‘베다니의 마리아’를 창녀이고 ‘막달라 마리아’로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베다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고 가난하고 소외된 동네입니다. 이 동네는 ‘벧-아니’ 즉  ‘베다니’는 ‘슬픔의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오가면서 나사로가 살고 있는 이 마을 자주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사로와의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했고 그를 살렸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마르다와 마리아 두 여동생들이 있었고 그녀들은 예수님을 존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마을에 바리새인인 ‘문둥이 시몬’이 살고 있었으며 그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의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기적을 바랬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이웃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절에서 3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분명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베다니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입니다.


댄 브라운 ‘다빈치 코드’는 저자의 상상에 의존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복음서’에 의존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마리아와 새로운 삶을 꾸렸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복음서’는 영지주의적 문서로서 기독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문서입니다. 그 내용 자체가 성경의 사실과 너무 확연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찬송가에도 이런 오류가 있습니다. 찬송가 346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에서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 받아서’ 명백한 잘못입니다. 성경에서 향유를 부은 여인 베다니 마리아입니다. 혼동해서는 안댑니다. 많은 사람의 흥밋거리로 전락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부정하는 어떠한 논리나 이야기나 영화나 다큐멘터리는 부정되어야 하고 상영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부활의 첫 새벽 

주님의 죽음을 옆에서 함께한 여자는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앞에 살펴본바와 같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년배 쯤 되는 여인이었으며 예수님의 후반기 선교활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으로 고생하고 있었을 때 예수님에 의해 치유함을 받고 난 후에 예수님에게 헌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상당한 재력가 이었기에 예수님의 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또한 세대배의 부인 곧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의 사역에 재정적으로 큰 도움을 준 걸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누구보다 슬퍼하였으며 예수님이 죽은 뒤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장사 치러졌으나 그 당시의 예법에 걸맞게 충분하게 이러지지 않아 마음이 매우 불편했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놀라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급히 내달려와 빈 무덤을 보고서 그때서야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만 확인했습니다. 의인의 부활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인류의 구원을 위한 부활임을 완전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9절은 말합니다.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한 사실을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보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알지 못한 채 돌아갔습니다.


성경에 11절은 ‘but’으로 시작합니다. 다른 제자들과 대조적으로 보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첫 상봉을 감격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 마리아는 무덤 밖에 홀로 남아 울었습니다. 여기에서 울음은 조용하게 흐느끼는 것이 아니라 큰 소리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통곡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르면서 무덤을 세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너무나 슬퍼하는 마리아에게 닥친 슬픔은 바로 삼 일 전에 사랑하는 주님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슬픔에 무덤 속의 시신마저 없어진 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장례와 장사를 매우 중하게 생각했고 시신에 대한 결례를 끔찍한 일로 증오하였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마리아의 걱정과 불안 그리고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겠는가는 능히 짐작이 갑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그 때 찬사들이 그녀의 애통함을 보면서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물음은 그녀가 어떤 이유로 울고 있는지를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물음은 ‘여자여 그대는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르고 슬퍼하느냐’의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 물음에 대한 마리아의 답변은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고 예수님의 시신이 도적질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신에 대한 무법과 결례가 그녀를 더욱 슬프게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연약한 믿음을 봄과 동시에 주님의 시신을 찾아 예법대로 시신을 안치하겠다는 강인한 사랑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서도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것이나 남편에 대한 신뢰의 문제에서나 나와 관계된 많은 사람들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강인한 사랑’은 있지만 ‘연약한 믿음’ 때문에 실망하게 되고 다시 혼자 어두운 길을 걷게 되는 장면입니다. 이런 순간 예수님은 간절히 찾고 고통스러워하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십니다. 우리의 삶속에서도 고통이 심해지고 마음이 아플 때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는 자에게 만나 주심을 믿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천사들과의 대화중에 예수님은 조용하게 나타나셨기에 마리아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고개를 돌려 예수님을 바라보았으니 그가 예수님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마 부활체인 예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과 차이가 있었나 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니 말씀을 풀어 주시고 음식을 들어 축사하실 때 저희의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누가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하신 말씀으로 추정됩니다. 주님은 그의 백성들의 슬픔을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우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는 그의 백성들의 근심을 아시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너희가 무엇을 바라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로부터 이미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했으며 누군가가 시신을 옮겼다면 찾아서 다시 장례를 치르겠다는 의지가 덧보입니다.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네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애정과 열정이 부활 하신 주님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서 주님으로 가득 차 있으면 분명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본인의 어투로 ‘마리아야’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알고 있습니다.’(요 10:4) 예수님의 ‘마리아야’라는 이 한 마디 말씀은 폭풍 속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나다"라는 말씀과 같은 성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녀는 감격에 벅차서 예수님께 ‘랍오니여’(나의 위대한 스승이시여)란 칭호를 드렸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해 천사들로부터 돌이켰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스승이시자 주인 됨을 고백하는 순간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확신하는 대목입니다.


순간 마리아는 육신적인 만남이 너무 기뻐서 그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기 위해 신체의 접촉을 시도하신 것 같습니다. 그 때 주님은 “나를 만지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이것은 육체적 현현 이외에 영적인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기를 소망하셨기 때문에 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현상에 급급하지 말고 좀 더 멀리 바라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마 ‘나를 만지지 말라’라는 말씀 속에는 “나를 만지지 말라! 더 이상 상세한 것을 묻거나 기쁨을 나눌 시간이 없노라. 이는 내가 아직 승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는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지체치 말고 전력을 다해 달려가라.” 마리아는 주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지체하지 말고 주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기쁜 소식이 전해진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준 것은 “내가 부활하였으나 그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용무를 위해 하늘나라로 갈 것임을 그들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인 생명으로 부활한 사람들은 그들도 부활하여 승천할 것을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이 세상이 그들의 집이요 안식처라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난 자는 하늘로 돌아가야 하기에 사람들은 내가 승천하니 하늘의 것만 구하노라 는 말씀을 명심해야합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과 저희를 통하여 그를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가 승천하셨을 때, 그는 그의 아버지이시자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자들이 그의 승천을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한 처소를 마련하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시기 위해 우리의 선두 주자로 승천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전한 소식 - 우리가 전할 소식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주신 메시지는 기쁨의 소식이요 소망의 말씀입니다. 아직도 주님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빈 무덤만 보고 웅성거리고 있을 제자들에게 확신에 찬 부활의 소식을 전하길 주님은 당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친히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이 소식은 의인 한 사람의 부활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하신 부활의 모범대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제 모여서 주님의 부활을 확증하고 내 생명이 다시 살 수 있음과 모든 사람이 이 부활에 동참할 수 있음을 알려야 합니다. 기쁨의 증거자 되어야 합니다. 확신에 찬 사람이 도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만난 부활의 예수님이 우리의 생 가운데 늘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주일이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그녀는 예수님에게 소중한 여자였습니다. 그녀의 헌신과 순종과 열정이 주님의 부활을 볼 수 있듯이 우리도 우리의 것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의 삶에 동참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전할 소식은 ‘모든 사망 권세를 무너뜨리고 죄의 권세를 부수어 트리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우리의 산 소망이신 그 분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며 나아서야 합니다.’ 구원이 주께로부터 나옴을 선포하고 주님의 나라 더 크게 확장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그리스도의 제자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