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기다리는 사람들 (시므온)

어저나 2009. 4. 14. 15:45

기다리는 사람들 1  -  시므온(눅 2:21 ~ 35)                           2008. 11. 30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에는 주현절(1월 6일. 공현절(公現節)이라고도 한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온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당일, 즉 예수가 제30회 탄생일에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공증(公證)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축절이다. 영국 등 서방교회에서는 이 축제일을 그리스도가 동방의 3박사에게 나타난 날로서, 주현절을 탄생 후 12일째 되는 날이라 하여 12일제(祭)라고 한다.), 사순절( 그리스도교에서 부활절 전에 행해지는 40일간의 재기(齋期),부활절, 오순절(그리스도교에서 부활절 후 50일 되는 날, 즉 제7주일인 오순절(五旬節)날에 성령이 강림한 일(사도 2장)을 기념하는 축절(祝節)), 대강절(Advent) 등이 있으며 그 중에서 주님의 탄생(성탄절)과 관련되어진 대림절, 또는 대강절이 우리에게 크게 와 닿는 절기입니다.

그런대 이 대강절에 대한 정확한 의미와 그에 따른 바른 이해에 대한 약간의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탄절을 4주간 앞두고 시작해서 지키는 ‘대강절’은 문자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가다리는 절기’라는 뜻인데, 그 ‘오심(降)’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논란은 그리스도의 성탄 즉 첫 번째 오심(성육신)을 기다리는 절기냐, 아니면 역사의 마지막에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키는 절기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첫 번째의 의미, 주 예수께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나신, 곧 성육신 임마누엘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로만 생각하고 지키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배에 관한 많은 책들이 그렇게 쓰여 있고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설교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으로도 약 1천년 동안 그러한 뜻으로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그 후 12세기부터는 그것이 더 넓은 뜻으로 해석 적용되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로까지로 의미가 확대되었습니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라틴어 전례용어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성탄)과 재림 두 시실을 모두 지키는 절기로 되어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성탄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시작된 것과 앞으로 세상의 종말에 심판주로 재림하심을 기다리는 절기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의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보혜사)의 임재를 뜻합니다. 즉 성령이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은혜로 임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로까지 확대하면, 대강절은 과거의 역사로는 그리스도의 탄생(성육신)으로 오셨음을, 미래의 사실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오실 것을, 현재의 사실로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계속적으로 임재하는 것을 다 포괄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린다.

이 대강절의 의미를 생각할 때 기다림이란 신앙과 영성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요소가 여겨집니다. 현대 사회가 되면서 문명이 발전할수록 기다림의 미학은 살라져 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급속하게 빠르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본인이 감지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과거 전통사회는 현대 문명 이기의 혜택을 받지 못해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불편하게 생각되어 집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되돌아보면 그들 나름의 여유로움과 유유자적함의 넉넉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돌아보면 가을의 풍성한 수확이 있고 난 겨울의 사랑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의 신앙 선조인 청교도의 삶 역시도 가을의 축제에서 겨울의 신앙의 수련을 볼 수 있습니다. 사경회와 기도회 등 신앙의 성장의 동력을 가지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다보면 신앙의 회복을 위한 계절이 없음을 안타까와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대림절을 맞아 4주 동안 말씀과 묵상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우리들이 주님의 오심(성육신과 재림, 성령의 거주하심)을 기대하고 있는 지 살펴보고 우리의 신앙을 회복하는 기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전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시므온

시므온은 간절한 기다림으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으로 시므온은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오래 기다림으로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본문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이스라엘의 위로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시므온은 세상의 유익과 쾌락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시므온은 부귀와 출세와 명예를 가다리지 않았습니다. 시므온이 기다린 것은 만인을 향한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림 끝에 구세주인 예수님을 보고 안는 축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시므온은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나이 많았으나 예수님을 그가 그렇게 기다리고 사모하던 예수님을 안는 영광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찬송을 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에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그럼 어떤 기다림입니까?


첫째, 어떤 약속을 의식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초두(1~2장)는 기다리는 사람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기다리고 있었고, 마리아도 기다리고 있었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데리고 갔을 때 시므온과 안나가 성전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떤 약속을 의식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가랴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마리야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눅 1:13, 31)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6장7절에서 제자들에게“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실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사도행전 1장 4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그들은 예수님의 분부대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기도했을 때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믿음의 선조 역시 약속을 기대하며 기다렸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아들을 얻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압제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기다리며 기대함으로 가나안을 차지했습니다. 유다왕국 멸망 후 포로 된 70년 후에 하나님이 고레스왕을 통하여 다시 해방될 것을 선지자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다림으로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성육신하신 예수그리스도의 기다림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재림으로 드러날 것임을 믿음으로 기다립니다. 우리 역시 약속을 기다립니다. 간절하게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둘째, 기다림은 능동적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기다림이란 아주 수동적인 것이며, 전적으로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사건에 의해 결정되는 희망 없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사라는 천사가 네가 아이를 갖게 되리라 했을 때 그녀는 아들을 사모하였지만 속으로 웃음으로 천사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기다린다 말하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 삶 속에서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성경 속의 인물에게만 나타나는 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 하지 않고 기다림은 절망이 될 수 있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중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의 운명은 절망이 되었습니다. 준비하는 기다림이 주님을 맞을 수 있습니다.

능동적인 기다림이란 그 순간까지 온전히 그 곳에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있는 그 곳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으며, 내가 그곳에 있기를 원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임을 믿으면서 그 순간까지 그 곳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성급한 사람들은 늘 다른 어떤 곳에서 진짜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합니다.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성급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 목자가 되리라.”(마 2:6) 미가(5장 2절)의 예언의 말씀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어떤 역경 속에도 이겨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 맺음이 있습니다. 그 자리를 지키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 알의 씨가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시므온은 그 자리를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성령의 지시하심을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그랬기에 그런 아기 에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막연한 소원(wishes)들이 없었습니다. 소망(hope)으로 충만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내하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언제인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은 도적같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준비된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랑과 함께 혼인 예식을 치룰 수가 있습니다.


셋째 성령과 동행하며 기다라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구약에 성령에 대해 말하는 부분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직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기 이전입니다. 시므온 에게 성령이 동행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성령안에서의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마지막 때에 지혜롭게 우리의 말할 바를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축제 속에서 고요히 그 의미를 되새기며 보냈으면 합니다. 같이 기도의 시간과 경건의 모습으로 주님 오심을 기다리면 우리의 신앙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명(본디오 빌라도)  (0) 2009.04.14
풍성한 삶  (0) 2009.04.14
네번째 동방박사  (0) 2009.04.14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 (목자들)  (0) 2009.04.14
기다리는 사람들(동방박사들)   (0) 2009.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