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변명(본디오 빌라도)

어저나 2009. 4. 14. 16:03

변명(본디오 빌라도)   마27:11~26                      (2009. 1. 4)


지옥에서 매 주일마다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예배드려질 때마다 사도신경이 낭독되기 때문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사’가 낭독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본디오 빌라도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동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는 에수님의 처형을 안타까워했고 고민했다는 사실은 성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 보고서’ (이 보고서(報告書)는 메시아 시대에 법정에서 만들어진 공문서로서, 현재(現在) 터어키의 성(聖) 소피아 사원(寺院)에 소장되어 있다. 50권(券)으로 되어 있는 이 원고는 서기관(書記官)의 손으로 씌어졌는데, 각권이 2x4피트로 되어 있는 것의 전문(全文)을 옮긴 것이다.)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인생의 끝을 알 수 있는 산이 있는데, 스위스의 루째른이란 도시에 가면 필라투스(우리발음으론 빌라도)란 산이 있습니다. 이 산 이름이 필라투스라 불리게 된 연유는 로마시대의 시저 다음으로 왕권을 잡은 옥타비아누스가 죽자 티베리우스란 괴팍하나 아주 영리한 늙은이가 황제가 되었다 했습니다. 이 늙고 뚱한 황제가 어느 날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온 동네 명의를 다 불렀으나 헛수고였습니다. 소문에 들리는 말이 유대에 용한 이가 있는데 쳐다만 보아도 아픈 것이 낫고 만지기만해도 죽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게 하는 자가 있으니 '예수'라 했습니다. 당장 불러오라 했습니다. 헌데 이미 십자가형에 죽었다 했습니다.

죽인 놈이 뉘냐? 그놈을 대신 잡아오라. 해서 본디오 빌라도가 황제에게 잡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죄 없는 예수를 어떨 결에 죽여 양심이 찔리던 빌라도는 견디기 힘들어 자살을 했답니다. 이에 시체를 로마의 테베강에 버렸는데 그곳에 홍수가 빈발해 인명피해가 발생하니 그럼 사람이 적게 사는 스위스 산골짝 조그만 호수에 버리라 한 것이 오늘날 빌라도의 슬픈 영혼이 정착하게 되어 근방의 산 이름이 되었다 합니다.(전승, 전설)


근데 빌라도는 정말 예수를 어떨 결에 죽였을까. 성경 복음서에는 예수의 재판과정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만 묘사됐을 뿐 구체적인 '뒷 담화'는 없습니다. 이에 우리는 뒷 담화를 듣고 왜 빌라도는 예수를 죽이라는 판결을 내려야만 했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잘 기록한 역사가가 바로 유대인 '요세푸스'와 알렉산드리아인 '필로'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빌라도는 티베리우스의 심복인 세이아누스란 자의 추천에 의해 유대총독이 되었다 합니다. 이에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들이 좋아할만한 정책과 행동을 했으나 그것은 반대로 자신의 관할인 유대인을 자극한 일로 일명 '깃발' 사건이며 두 번째가 '황금방패' 사건 세 번째가 수로를 만드는데 드는 비용을 성전 금고에서 지출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잠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먼저 요세푸스입니다. “티베리우스가 유대 총독으로 임명한 빌라도는 한밤중에 여러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는 깃발을 몰래 예루살렘으로 들여왔습니다. 날이 밝자 이 사실을 안 유대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 도시에 어떤 형상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신봉하는 율법이 짓밟힌다고 생각하며 경악했습니다. 도시 주민들의 분노는 이내 지방 사람들을 자극하게 되었고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뒤를 따라 급히 가이샤라로 내려가 총독인 빌라도에게 예루살렘에서 깃발들을 치워 조상들의 율법을 범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거절했고~  오히려 무장군인들을 시켜 무리를 위협했으나 무리들은 차라리 율법을 어기느니 죽는 게 낫다며 목을 내미니 빌라도는 놀라 예루살렘 안에 있는 모든 깃발을 즉시 치우게 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약점이 생기고 빚을 진 셈이 되었다 했습니다.

그럼에도 빌라도는 또 다시 정치적인 입지 확보를 위해 유대인을 자극하는 짓을 하니 필로의 증언에 의하면 로마에서 정치적인 입지가 약해지자 빌라도는 황제의 환심을 얻기 위해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짓을 하다 또 망신만 당했다는 겁니다. 그게 황금방패 사건입니다. 결정적인 수로사건도 요세푸스의 증언을 보도록 하죠. “그 후 본디오 빌라도는 50마일 밖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를 건설하는데 드는 비용을 코르보나스라고 하는 성전 금고에서 지출하려 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됏다.”그리스도께서 재판받던 당시의 배경이 이러했다는 겁니다. 빌라도가 자신의 정치생명을 위해 시도한 일들이 오히려  유대인들의 신뢰를 잃어 총독의 지위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빌라도의 실수들이  훗날 빌라도를 만고의 죄인이 되하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의 지배계급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자신들의 신분보장과 생존을 위해 사사건건 자신들의 권위와 신분을 위협하는 예수를 죽여야만 했고 빌라도는 자신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없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했다는 겁니다. 이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빌라도의 서글픈 심정을 성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함을 군중에게 누누이 말해도 오히려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손을 물에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죄를 당하라.”  “이때에 온 유대백성이 입을 모아 합창을 하니 예수가 흘린 피의 죄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유대인들에게 약점이 많은 본디오 빌라도는 민란이 발생할까 두려워 그들의 요구대로 죄인중의 죄인인 바라바는 살려주고 죄 없는 예수는 채찍질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마태복음27장 19~26절)


아무튼 빌라도 정치적인 입장에서 결정을 내리기에 곤란했고, 당시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인의 수가 적어서 폭동이 일어난다면 진압하기가 쉽지 않았고, 가이샤라에 원군을 요청해도 올 때까지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당시의 로마의 법은 철저했고 우수한 법과 관리들로 번창했습니다. 또 용감하고 양식이 있는 사람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다는 사실은 그가 예수님을 죽인 범죄에 가담한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변명하기에 급급하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를 살리면 로마의 충신이 아니라는 협박에 자신의 안전이 조금이라도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 결론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최후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 까 추측합니다.


우리 삶의 가운데서 ‘상황’의 논리를 많이 폅니다. ‘상황 윤리’로 많은 문제에 접근 합니다. 다들 문제에 해답에 어찌할 수 없었다는 변명을 들고 나옵니다. 에덴동산에서 벌여진 인류 최초의 범죄에 아담과 하와 역시 자기의 죄과를 떠넘기기 합니다. 어떻게 보면 죄를 지은 이유가 마치 하나님에게 있는 듯한 인상을 품기게 말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만약 동산에 선악과를 만들기 않았다면 우리가 따먹지 않았을 거고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아담은 분명 하나님과 언약했고 그는 동산의 모든 것을 다스릴 특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해야 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살아가고 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며 풍성한 삶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이후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피하고 말씀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숨었습니다. 자기의 벗은 몸이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가리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피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물음에 자가의 잘못은 시인하지 않고 그 잘못을 하와에게 돌립니다. 인류 최초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변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변명의 시작은 인류 역사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뻔뻔스럽게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아담의 죄악이 가인에게 크게 역사한 것입니다. 죄에 대한 변명은 더 큰 죄악을 만들게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없는 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가인이 그러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와 동떨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되지 않습니다. 지금의 나를 발견할 때 무서운 죄악 덩어리인 변명(핑계)의 재제(제목)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성경에 보니까 아담과 하와도 변명했고, 모세는 “나는 입이 둔한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라고 변명했고, 기드온도 “나는 므낫세 지파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저에게 징표를 보여 주옵소서”라고 했으며,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도 자기의 본업인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근데 우리처럼 약한 자들이 어떻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변명의 결과는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 나타납니다. 요한 계시록에 수많은 사람들이 바위 뒤에 숨고, 숨어 보지만 그들에게는 고통밖에 없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은 지금 여러분을 복음 증거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일군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혼인 잔치에 여러분을 초청했습니다. 여러분도 성경의 사람처럼 “장가 가야하고, 소도 사야하고, 논과 밭에 나가 할 일이 많다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시지 않으시렵니까?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람을 별하시고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라 명하셨고 그 잔치 자리를 가득 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변명하고 응답하지 않은 사람은 멸하셨습니다. 그들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영광교회 성도님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경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빌라도 그는 불쌍한 자이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하신 말씀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은 사람입니다. 아니면 그는 유대의 총독이 아니었으면 좋았겠습니다. 그의 시작이 불의로 가득찼고, 자신의 자리에 연연했기에 부당하게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에서 우리기 받을 수 있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첫째, 불의와 연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자신의 자라에 연연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정의에 대한 용기가 부족했다는 사실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섯째, 그는 그의 죄를 이스라엘 사람에게 돌림으로 해결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자기의          죄는 결코 남이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제가 이 본문의 말씀을 설교의 주제로 정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확신이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부정에서 출발한다.” 여기에서 자기 부정은 나는 죄인이며 하나님 외에는 완전한 분이 없으시며, 그 분 만이 나의 생을 책임질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려면 자기 십자가를 십자가을 지고 주님을 좇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였습니다. 자기 부정은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그 출발은 자기 부정으로, 작 부정은 곧 의인의 의로운 삶의 길로 들어서게 되며 거기에서 긍정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의로운 군사 되어 악한 마귀의 권세를 대적하며 하나님 나라의 큰 일군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은 변명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죄의 인정을 통해 하나님의 만져 주심을 통해 회복되어졌으며 하나님 나라의 일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 기드온, 이사야, 예례미야, 베드로, ...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영광교회 형제, 자매 여러분!! 올해 변명하지 맙시다. 복음의 능력을 믿으며 ‘우리는 할 수 있다.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신념으로 내달려 나아갑시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곡 이룹시다. 한 발 한 발 믿음의 발자국을 띠어갑시다. 이아들이 걸음에 성공할 때까지 1만 5천번의 넘어짐이 있었답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할 때 300번의 실패가 있었답니다. 우리에게는 변명이 아니라 용기와 희망이 필요합니다. 이 긍정의 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입니다. 2009년의 시작은 모든 여건이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 복음의 능력으로 많은 것을 치유해 나가며 회복시키는 일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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