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 (목자들)

어저나 2009. 4. 14. 15:58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목자들(눅2:1~20)              2008, 12, 22


성탄절은 12월 25일입니다. 간혹 집에 불청객들이 찾아옵니다. “교회에 다니십니까?”, “예 교회에 다닙니다.” 근데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당신이 믿고 있는 성탄절이 12월 25일 이냐고 되묻습니다. 그리곤 성경을 들어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성탄절은 로마의 신인 ‘정의의 태양’(Sol Invictus) 대치한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믿는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일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12월 25일 성탄절로 지킨 것은 336년부터입니다. 동방교회(그리스 정교)에서는 예수님의 세례를 기념하는 1월 6일에 지켰습니다. 5세기 중엽부터는 동방 교회도 거의 12월 25일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549년까지도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켰습니다.

셩경에는 분명 예수님의 탄생을 역사적 사실로 기록하였으나, 언제인지는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에 2장 8절에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양떼를 지키더니”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의 목자들은 교대로 밤을 세워 가며 도둑이나 다른 들짐승으로부터 양떼를 지켰습니다. 목자들은 4월부터 11월까지 이런 일을 반복하며 양떼를 밖에서 방목하였으며 겨울철에도 춥지 않을 때에는 종종 그렇게 했습니다. 본문 상으로는 예수님이 어느 계절에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동방박사의 방문, 선지자들의 고백(시므온, 안나), 가이사 아구스도(시이저  아우그스투스)가 영을 내려 호적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복해야할 사실은 예수님이 언제 태어났는가가 아니라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가? 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본질을 보지 못하고 비본질을 바라본다면 참다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참다운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원래의 이름은 안상홍 증인의 교회입니다. 안상홍 자신이 성령 하나님이라 말하였고 자기가 죽은 후에 부활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는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구절, 구절 자기의 뜻에 맞게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잘못 볼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목자들

성경에서 탄생한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누구일까요? 저도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 동방박사라 말했습니다. 근데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탄생하신 지 하루 혹은 며칠이 지난 후였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2장 11절에 “저희가 집에 들어가 그 모친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은 구유(마구간)였습니다. 집에 라고 하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이 탄생하신 이후에 집으로 옮긴 듯합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가장 먼저 아기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목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목자라는 직업은 아주 천시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목자들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목자들이 하는 일이 유대인의 규례에 의하여 부정한 일로 간주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 주었고 이들을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아기 예수님에 대한 찬사들의 이야기를 마리아와 요셉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5절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에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루어진 일을 보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진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복음은 맨 먼저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목격하고 경배한 사람들은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있던 사두개인도 바리새인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던 서기관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메시야를 대망하던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알다시피 동방박사들(외국인), 시므온, 안나, 목자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주님을 인내하면서 기다라던 자들 이었습니다. 권력과 부의 속성은 현실 속에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되도록 지금의 삶이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복음은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큰 희망입니다. 민중들은 사회의 변화를 갈망합니다. 새로운 지도자가 나오면 흥분하고 열광적으로 그를 추종합니다. 유대사회가 그리했습니다. 로마의 압제 속에서 그들에게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탄생한 그 시기에도 자칭 메세야가 있었고 사람들은 유혹되어 따랐으나 곧 없어지곤 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36절 37절에 드다,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400명 따름)가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진짜 그들의 희망과 소망을 주신 예수님 탄생한 그 밤은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들의 목자들은 양을 지키고 사람들은 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 고요와 적막은 깨는 소리는 아기의 울음소리였습니다. 그 울음소리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찢어지는 아픔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아멘 아멘!!

하나님의 탄생을 찬사들이 놀라운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는 부분이 바로 누가복음 우리가 읽고 제가 설교하는 본문입니다. 고요하고 적막한 그곳에 천군 천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 찬송을 목자들은 목격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주님이 도적같이 재림하는 그 날 그 영광스러운 그 자리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저도 두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부분입니다. 정작 성경을 잘 알고 있고 연구하던 그들은 몰랐고, 성경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소망함으로 바라보는 그들에게는 천사들이 가르쳐 주고 주님을 경배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가난한 자 에게 전파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저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님을 낮은 자를 돌아 보셨습니다. 일생 동안 그의 주위에는 힘들고 지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주위에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또한 낮은 곳에 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늘 가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믿고 따르는 명예를 가지고 부를 가진 그들 또한 함께 했습니다.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 삭개오 등 특히 복음을 위하여 사도 바울 택하기도 했습니다.

복음의 정신이 바르게 이해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로 충만케 하며 그들에게 함께 헸습니다. 부자도, 권력과 명예를 가진 자들도 주님은 사랑하셨습니다.


목자들에게 찬사들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고 이들이 예수님을 경배하고 만난게 된 것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둘째는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마저 아끼지 않는 선한 목자처럼 인류를 위해 당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이심을 넌지시 암시합니다.

마태복음 20장 18절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요한복음 1장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또한 여호와께서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언약하는 내용을 상기해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7장 8절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이 말씀 속에서 다윗을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메시야의 선조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나옵니다. 그리고 신구약에서 목자는 하나님 자신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자들을 상징적으로 가르킵니다.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되시니” 히브리서 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예수님도 자신이 친히 목자되심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7절 “나는 양의 문이라” 10장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성경에는 예수님 자신이 목자되어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목자의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신을 죽이고 참고 인내하는 삶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믿습니다.


셋째는, 목자들이 복음을 최초로 전해들은 사람들이었소 또 최초로 복음을 전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이 그 아기에 관한 기쁜 소식을 듣고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15~17절) 이들의 방문과 천사들의 전하여 준 말들이 요셉과 마리아에게 큰 확신과 소망과 기쁨을 주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복음은 ‘유앙게리온’ ‘기쁜 소식을 전하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으면 자신의 기쁨만 됩니다. 하지만 널리 알리어 질 때에 더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게 됩니다. 18절 말씀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을 기이히 여기되” 아마 추정컨대 목자의 기쁜 소식을 마리아와 요셉외에도 더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목자들이 이웃사람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고도 짐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목자처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그 소유를 다 팔아 밭을 삽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만듭니다. 거기서 끝나 버리면 안됩니다. 그 기쁨을 인하여 잔치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탄생일 잔치를 벌려야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천국 복음의 잔치를 벌려야 합니다. 복음은 누룩입니다, 널리 퍼져가는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라납니다. 우리는 이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복음 전하는 일에 최우선 가치를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부디 우리 영광교회는 특수학교와 대구대학교 대명동 켐퍼스와 우리의 지역사회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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