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예수님의 쌍둥이, 에수님의 제자

어저나 2009. 4. 14. 16:10

 

예수님의 쌍둥이, 예수님의 제자  (요 1 : 43 ~ 51)       (2009. 2. 8)


어느 산부인과 병원에서 예비 아빠들이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간호사 : 쌍문동에서 오신 손님 쌍둥이 입니다.
아빠 1 : 나는 삼양동에서 왔으니 세 쌍둥이란 말인가?
아빠 2 : 나는 구의동에서 왔는데 아홉 쌍둥이란 말이오?
               
바로 옆에 있던 한 아빠가 기절을 했습니다.

아빠 1, 2 : 여보시오! 정신차리시오!
아빠 3 : 나는 천호동에서 왔는데 정신차리게 됐소?

그런데 복도에 있던 한 남자가 죽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의 집은 만리동 이었습니다.


디두모(쌍둥이) 도마

쌍둥이는 신기롭습니다. 특히 일란성 쌍둥이요. 옆에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쏙을 수 있습니다. 광명학교에도 쌍둥이가 있죠. ‘김기문’형제 맞지요. 예수님 제자 중에도 쌍둥이가 있었답니다. 부엌에서 많이 애용되는 사람이죠. 도마(토마스)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공관복음)에서는 12제자 이름 중에만 나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 이름에 디두모(쌍둥이, 히브리어 도밈)라는 설명이 가해져 있습니다. 그가 특히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그의 합리적인 신앙형태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믿음이 전혀 없는 자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1장25절) 주님은 8일 후 그의 의심을 다른 사람의 유익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1장27절) 도마에게 보이자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로 위대한 신앙고백을 고백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 그의 행적에 대하여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이 생애에 대해서는 외경인 도마행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도마는 유대인으로 인도 선교를 요청허는 주님의 부름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아반이라는 인도의 한 부분을 통치하는 상인에게 종으로 팔았다고 합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일하며 한 궁전을 짓도록 명령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주인이 다른 곳으로 떠나자 궁전 짓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은 덩어리 20개를 다 소비하고 말았습니다. 왕이 돌아 왔을 때 도망치려다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이때 왕의 동생이 죽었는데 그 동생이 하늘에서 도마가 왕을 위해 멋진 궁을 짓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왕의 동생은 다시 땅으로 오게 되었고 도마는 석방되었고 도마에 의해 전도되어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도마의 전도로 해안선을 따라서 기독교인이 증가하였고 그 지역에 일곱 교회가 지어졌다고 합니다. 도마는 72년 경 마드라스 근처의 빅 힐이란 곳에서 창에 맞아 순교하였으며 밀라포르라는 곳에 묻혔습니다. 지금도 인도에는 도마 교회가 있습니다. ‘성 토마스 성당’ 그의 유해가 안치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이 대부분이 외경의 내용이기에 실재성을 의심할 수 있지만 그는 복음전도자로서의 사명을 완수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마행전은 영지주의적 입장에서 쓰여졌기에 정경으로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제자(Disciple)

오늘 설교의 또 하나의 축인 제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제자라는 말은 구약에서 1회 인용되고 있는데 반해, 신약에는 296회(복음서와 사도행전 뿐)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자는 스승에 대응되는 말로서, 교사의 훈육을 받는 자를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자를 말하고, 신약에서는 세례요한의 제자(마9:14), 모세의 제자로서의 바리새인(요9:28)을 가르키기도 하나 주로 예수를 믿고 그 훈련을 받은 자, 그에게 따르는 자의 총칭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제자의 좁은 의미로는 예수의 12제자에 한하고 넓은 의미는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 즉 크리스찬을 가리키고 있다. 사도행전 6장 7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도행전 9장 19절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제자로서의 도는 예수님에 대한 충성이 요구되고 참 제자기 되기 위해서는 일체를 버리고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제자로서 가장 뚜렷한 특색은 서로 사랑하는 일로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5절 말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아멘 ! !


한국교회는 80년대 90년대 제자 훈련을 통하여 크게 성장했으며 2000년데 역시도 그리스도의 제자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사랑의 본질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야 참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식의 확충을 통하고 생활의 강화를 통하여 제자도의 삶을 드러내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빌립과 나다나엘

성경 본문은 예수님이 두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한 사람은 빌립이고 또 한 사람은 나다나엘 입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은 모두가 개성과 성격적 기질에 있어서 애당초 예수님과 닮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나중에 예수의 축소판 쌍둥이가 되었다는 성경 기록도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빌립은 선교사 기질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난 것을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재빨리 달려가서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빌립은 결단성이 조금 부족한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중에서도 예수님의 시험 앞에 나가떨어집니다. 족히 200데나리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직접 해야 할 일도 안드레에게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자발성이 조금 부족했다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나다나엘은 회의주의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을 듣자 말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합니다. 나다나엘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대부분 나다나엘은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봅니다. 바돌로매는 바-톨마이(톨마이의 아들)이므로 시몬 베드로를 ‘바요나’로 불리운 것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마태’와 동일인이라 말합니다. 이는 마태란 명칭의 뜻이 ‘여호와의 선물’이기에 나다나엘은 마태의 다른 명칭이라 말합니다. 아무튼 그에 예수님은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라고 크게 칭찬합니다. 이 칭찬은 나다나엘이 야곱처럼 간교한 사람이 아니라 메시아를 대망하며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를 따르라”(follow me)

예수님은 빌립과 나다나엘 두 제자에게 “나를 따르라(follow me)"고만 말할 뿐입니다. 빌립과 바돌로매는 모두 예수와 빼닮은 ‘일란성 쌍둥이’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처럼 되어라’(Be like me) 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를 따르라(follow me)"고만 말할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처럼 되는 것을 말할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쌍둥이가 아니라 제자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말씀을 통하여, 간증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수많은 정보를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예수님처럼 되어갑니다. 마치 예수님의 쌍둥이처럼 행동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인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결국 자신을 신격화하며 이단의 길로 들어서는 안타까운 일마저 발생하기도 합니다. 너무나 순수하고 진실하게 살던 신앙인들이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 ‘나처럼 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럼 ‘나를 따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자신의 본 모습을 가짐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빼닮은 쌍둥이가 되라고 요청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되기 위해 우리 자신을 활짝 열어놓기를 요청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자신의 본 모습이 없는 복제품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각자의 인격, 성격, 재능 등 다양한 모습들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만약 교회에 모두 예수님 쌍둥이이라면 교회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고 계십시다. 당신의 뜻에 합당하고, 당시 사역에 필요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사역의 현장에 사용하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쌍둥이가 아니라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런 모습을 띠어야 합니다. “오 주님 나의 사람 됨됨이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취하셔서 당신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소서. 내가 모자라는 부분을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나의 모습 빚으소서” 아멘


미국의 어느 부흥사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 제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주셔서 미국의 아브라함이 되게 하소서.”

“네가 아브라함처럼 되고 싶으냐? 그럼 너는 아들을 내게 바칠 수 있니?”

“나는 아들을 번제물로 바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너는 아브라함처럼 될 수 없단다.”

“하나님, 그러면 모세와 같은 지도력을 주셔서 미국의 모세로 만들어 주소서.”

“모세처럼 되고 싶으냐? 그러면 모세처럼 사람을 죽여 모래에 파묻을 수 있느냐?”

“나는 살인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너는 모세처럼 될 수 없단다.”

“하나님, 그러면 엘리야와 같은 능력을 주셔서 미국의 엘리야가 되게 하소서.”

“엘리야처럼 되고 싶구나. 그러면 너는 많은 이방인을 죽일 용기가 있느냐?”

“나는 그런 끔찍한 일을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너는 엘리야처럼 될 수 없단다.”

성경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들어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그분의 대답은 모두 부정적이었습니다. 부흥사는 화가 나서 하나님께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 그러면 나는 누구처럼 되라고 하는 말입니까?” 그러자 하나님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너답게 되어라.”


이 예화를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청소년, 청년들이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타 신드롬’에 걸려서 남들 좇아가기에 바쁩니다. 열심히 가다보면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게 되고 상업주의 덧에 걸려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팔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집니다. 잘못된 정체성의 확립이 모든 것의 최고 가치에 ‘맘몬’(재물)을 두게 됩니다. 오로지 하여 물질의 성취에만 매진하게 되어 자신의 본질을 상실하게 되고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자살도 동일합니다. 어떤 연예인이 자살하면 자신도 자살하는 유명 연예인과 같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사람, 또는 자신이 모델로 삼거나 존경하던 인물의 죽음을 접하고 그것을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하여 자살하는 것을  사회심리학적으로 모방자살(Copycat Suicide), 또는 동조자살이라고 부릅니다. ‘베르베르 효과’라 합니다. 이러한 일이 현실화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된 것을 깨닫지 못해서입니다. 자신을 주님이 부르신 거룩한 도구되었다는 사실을 신앙으로 고백하지 못해서 일어난 결과입니다. 대중문화는  교회라고 해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분별의 눈을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에 여러분들의 많은 것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여러분 자신을 버리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성과(부모, 자식, 친구 등) 성취된 것(명예, 재물 등),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 등 이러한 것들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 말씀입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버리면 영생을 얻습니다. 남들이 누리지 못한 영원한 생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삶이 제자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근본을 잊어버린 채 남만 좇아가는 이류신앙인이 되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중심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럼 없는 일류 신앙인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교회들이 자신의 위치에 걸맞게 행동하고 그 교회의 세워진 뜻, 정신, 사명을 잊어버리지 많아야 교회도 주님을 좇는 제자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광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참된 제자 되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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