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변장공동체 변화 공동체

어저나 2009. 4. 14. 16:04

변화 공동체 변장공동체? 마 23:27~28  엡 4:22~24    (2009. 1. 11)


솔개는 가장 장수하는 조류로 알려져 있습니다. 솔개는 70살 까지 살 수 있는데 이렇게 살려면 약 40세가 되었을 때에 매우 중대한 결심을 해야 합니다. 솔개는 40세가 되었을 때  발톱이 노화되어 사냥감을 잡는데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맘대로 쓰기에 힘들어집니다.  깃털도 역시 길고 두껍게 자라 날개가 매우 무거워져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 오로지 못하게 됩니다. 이즈음이 되면 솔개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습니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던가 아니면 반년에 걸친 매우 힘든 갱생의 기간을 가지던지 말입니다. 갱생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를 부수고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 난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10개의 발톱을 뽑아 버립니다. 그리고 발톱이 새롭게 돋아나면 이번엔 그 많은 날개의 깃털을 하나씩 뽑아내어 버립니다. 이리하여 일년이 지나면 새로운 깃털이 돋아나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되어집니다. 그리고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삶을 더 살게 됩니다.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뼈를 깎는 아픔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위해서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아픔을 이겨내며 최선의 삶을 살아  갈려고 애를 씁니다. 최고의 삶을 위해서 말입니다. 요즘 미국에 경제 위기 속에서도 한국식 사교육 열풍이 불고 있다 합니다. 성적을 공개하고 경쟁시키면서 야간 수업도 불사하고 이른바 스파르타식 교육 방법이 유행한다 합니다. 다들 궁극적 목적은 ‘최고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경쟁사회 속에서 남들을 제치고 앞서 가지 위한 몸부림입니다. 이 몸부림들의 중심에는 ‘남’을 위한 배려의 삶을 위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의 변화를 추구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변화의 시대  

우리는 급격한 사회변동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 역시 놀라고 있습니다. 특히 IT기술의 변화는 혁명적입니다. 머지 많아 우리의 삶은 정보화 삶을 눌려서 우리의 삶 자체가 정보화에 갇힐 것 같은 위기의식도 느낍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삶이 현실화되고 나의 삶 모두가 통제 받고 조작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합니다. 우리의 정신적 가치가 통제 받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만든 기계에 의해 조작되는 ‘목적 전치’의 시대를 살아가게 됩니다. 일어나서는 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한편으로 거짓말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말을 진심으로 믿고 불필요해진 사실은 잊어 버렸다가 그것이 다시 필요하게 되면 망각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고 객관적인 현실을 부정하면서 부정해버린 현실을 고려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중사고’란 말을 사용할 때까지 이중사고를 행해야 한다. 이 말을 사용하면 현실을 왜곡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여기서 다시 이중사고를 하면 이 사고를 한다는 것을 지워버리는 것이며 그리하여 무한히 계속 될수록 거짓은 항상 진실보다 한 발 앞서 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당이 역사의 흐름을 장악해 있고 앞으로 수 천 년 동안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이 ‘이중사고’에 의해서 가능하다.” 섬득한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결국 현대 사회는 이 ‘이중사고’의 흐름에 따라 우리가 변장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대 사회만의 문제이었을까요? 과연 우리가 살고 이 시대만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힘들어했을까요?우리는 너무 갇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예수님 시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다양한 그 시대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사회의 기득권을 누리던 대제사장, 제사장 가문의 사두개인, 성경을 필사하고 해석하던 서기관, 율법의 회복을 외치면 경건운동을 주도하다가 이 혁명에 성공하자 형식주의적 집단으로 전락한 바리새인, 로마의 식민지정권에 협력하여 살아가는 세리와 관원들, 사회 경제적으로 무시를 당하는 민중들, 고통 가운데 병들고 가난하고 아픔을 가자고 살아가던 이들 사회적 역자들 다양한 구성원들이 존재했습니다. 권력(기득권)을 지닌 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민중을 교란하고 달래면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사회의 변화를 극히 싫어했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예수님이 눈에 가시처럼 보였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음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들을 규정하여 ‘변장 공동체’라 부르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들을 가르쳐 ‘독사의 자식’이라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엄히 꾸짖으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13, 16, 23, 25, 27, 29) 무려 여섯 번 번복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치부를 낱낱이 파 해칩니다. 27절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들에게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십일조, 금식, 구제, 의로운 삶을 사는 것 같으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그들은 철저히 변장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참 하나님 되신 예수님은 그들의 중심을 보시고 그들에게 심판을 선포합니다. 23장 35절입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예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70년경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해서 처참하게 멸망당합니다. 그들의 자신의 죄과를 짊어지고 멸망당했습니다. ‘변장 공동체’의 운명은 멸망이라는 처참한 구렁텅이로 빠지게 합니다.


‘변장공동체’와 ‘변화공동체’ 

변화에 관련된 헬라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μετασχηματιζω(메타스케마티조오)입니다. 뜻은 변장하다, 모습을 바꾸다, 실제로 관련 있는 상황을 상상하여 다른 것으로 바꾸다 입니다. 이는 외형적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고후 11장 14절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 하나나” 여기에서 ‘가장하나니’의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변장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여기에서 ‘변케’몸의 변화를 의미하고 있습니다(모습을 바꾸다). 이 변화는 실제적인 겉모양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의 시대에 변장하고 가장한 무리들인 서기관 바래새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위장한 채 자기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비유하시면서 ‘삯군’에 대하여 엄히 경계하고 계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요 10 ;11,12) 로이드 존스목사님은 강단에서 자기의 인기영합에 이목에 눈길을 끄는 자들을 ‘강단꾼’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공동체의 운명이 좌우 될 수 있습니다. 한 공동체 ‘변장공동체’쉽게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지도자가 변장하여 그릇된 말씀을 선포하고 삶의 방식이 변장된 삶이라며 공동체의 소속원 역시 이중적인 삶의 형태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중적 삶의 형태에 대해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길로 들어서여 합니다.

성리학에서는 지나친 욕구로 인해 잃어버린 본래의 마음을 찾기 위한 수양의 방법으로 '궁리(窮理)', 혹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강조했습니다. 이는 본성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우주의 이치를 모색해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노력은 자신이 갖고 있는 욕심을 철저히 배제하고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려는 태도, 즉 '거경(居敬)'의 태도와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거경의 태도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배가 부르거나 열흘을 굶었거나, 자신이 처한 특별한 입장에 기대지 말고 늘 신실한 태도로 임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선조 선비들은 이런 방법으로 자신으로 수련했습니다. 이러한 수행방법은 자신을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게 하며 다른 사람의 삶의 귀감이 될 수 있으나, 삶의 완성된 인격의 변화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모습은 논리적 논쟁으로 비화되어 서로를 죽이는 아픈 일들을 가져 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화’, ‘당쟁’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역시 치욕적인 멸망과 바벨론 포로의 추억을 지워버리고자 그들만의 율법을 다시 만듭니다. 그리고 계명 613가지 만듭니다. 성경에 나오는 ‘유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본질을 잊어버렸고 이 유전에 잡착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경건은 외적인 경건으로 표시되어집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정죄했으며 자신들만이 구원의 대상이 되는 ‘배타적 선민의식’에 젖어들게 되었으며 많은 우매한 민중들을 비화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에 더욱 열중하며 종교적 경건주의 모양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변장된 모습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비판하며 죄의 각성을 외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외치십니다. 변장된 삶을 벗어버리고 삶의 참된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은 본질의 회복을 원하십니다. 가면을 벗어 던지고 그 근본정신을 회복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림으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변장공동체’를 거부합니다. 외식인 것을 반대합니다. 
둘째는,
μεταμρφοω(메타모르포호오)입니다. 그 뜻은 ‘형태를 바꾸다’ ‘변형되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형되었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또 ‘영적인 변화를 겪다’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린도후서 3장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여기에서의 변화는 영적으로 새롭게 변화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있는 공동체를 ‘변화 공동체’라 부르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영광교회 공동체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를 지향한다면 ‘영적인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한 공동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개별적인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져 그것이 거대한 물결 되어 영광교회 전체를 뒤덮어야 합니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이곳에 충만해져야 합니다.(물이 바다 덮음같이 함께 찬양)

에베소서 4장 22절에서 24절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할렐루야(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 중심에 ‘심령이 새롭게 되어’라는 변화를 수반하여야 합니다. 성령의 변화의 바람을 타야 합니다. 영광교회 공동체가 성령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주도 하나이요 성령도 하나이요 세례로 하나이듯이 우리는 하나 되는 공동체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주인 되심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변화되는 공동체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안에서 하나입니다. 모두 한 목소리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라.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5.6) 아멘 아멘 !!!

우리는 이러한 변화공동체가 완성되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 벽돌 되어져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에베소서 2장 21절 22절 말씀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서 예수님이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체 그 변화공동체가 만들어져 가는데 뒷짐 지고 계시렵니까? 동참하시길 소망합니다. 공동체가 커짐으로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고 우리들 또한 주님의 사역자로 서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티테디오스 :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바울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줄로 불리우던   호칭이다.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 화장은 지워진다

화장을 맨 처음 시작한 사람들은 고대 이집트 여인들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천연두가 유행하던 중세에는 마마 자국을 감추려고 화장을 진하게 했다. 서커스단의 분장사는 사람들을 웃기려고 피에로 화장을 한다. 아프리카나 뉴기니 원주민들은 전쟁을 할 때 무섭게 보이려고 화장한다. 마치 카멜레온이 상대방과 싸울 때 붉은 색을 진하게 내듯이 말이다.

화장을 하는 이유는 제각기 다르지만, 근본 이유는 결국 남을 속이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화장을 잘하면 얼굴의 결점도 감춰지고 더 아름답게 보인다. 화장은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만 그 형태가 다를 뿐이다. 남녀 구별 없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화장한다. 학벌, 가문, 출신 지역, 돈, 명예 따위의 다양한 화장 도구를 사용한다. 그것으로 자신의 본래 모습을 감추고 남들 앞에서 좀더 멋진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쓴다. 하지만 얼굴에서 화장이 지워질 때, 추한 모습이 하나 둘 드러난다. 지워진 자국에서 차츰 드러나는 본래의 얼굴이 곱기는 어렵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얼마든지 화장하며 살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화장은 언젠가 지워지게 마련이다. 설령 이 땅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해도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게 지워질 것이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자주 질책하셨다. “회칠한 무덤 같은 너희들, 외식하는 자들아!������ 무슨 말씀일까? 화장에 익숙한 자들이란 말이다. 속을 그대로 보이라는 말이다. 겉과 속을 달리하지 말라는 말이다. 위조 화폐가 통용되지 않듯, 하늘나라에서는 거짓이나 위선이 통하지 않는다. 언젠가 화장은 지워지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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