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네가 믿음이 있느냐?(실제적인 믿음)

어저나 2009. 4. 14. 16:08

네가 믿음이 있느냐? (롬 10 : 17 , 약 2 : 17, 18)        (2009. 2. 1)


우리들의 구원의 통로이고,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시되는 믿음, 예수님의 수많은 치유의 통로가 되었던 믿음,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했을 때에도 믿음이 적은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옮기 울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신앙’, ‘믿음’이 모두 영어로 ‘faith'라고 합니다. 믿음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믿음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 있나 고민을 했습니다. 목회자인 저 역시 믿음을 바르게 알고 있는 가 고민을 했습니다.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우리의 일상용어로 믿음은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믿음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또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을 위로할 때 “믿음으로 승리하세요!”그리고 결혼의 첫째 조건도 ‘믿음 좋은 사람’이 제일의 기준이라 말합니다. 이렇게 자주 말해지는 ‘믿음’의미를 파악하고 우리가 참다운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갈 준비가 되었는지 말씀에 비추어 확인하고 진실로 믿음이 깊어지는 영광교회 교인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사실 설 연휴가 끝나고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무엇을 전할 까? 많은 고민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중 신앙의 가장 핵심이고 구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믿음에 대해 설교해야겠다는 마음의 울림이 일어났습니다. 자료를 스크랩하면서 믿음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 또한 발견하기도 했고, 몰랐던 부분도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여러분과 함께 은혜의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믿음이란

구약에는 믿음이란 말 자체를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간혹 이 말이 나올 때에는 신뢰하는 의미의 정도를 가집니다. 그러나 ‘믿다’, ‘신뢰하다’, ‘소망하다’등 여러 단어들이 믿음의 개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의나 우상 혹은 인간의 힘을 신뢰하는 것은 비난을 받았으며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마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을 믿음이라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아브라함의 믿음은(창15:6) 성경에서 믿음의 전형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약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신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와 언약관계를 맺고 신뢰할 것을 요구하였을 때 전적으로 약속을 믿고 신뢰하였으며 실천적으로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보여 준 것입니다. 실로 그는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우리가 쓰는 아멘, 아만 히브리어 믿는다는 동사입니다.)


신약에는 믿음에 해당하는 다양한 단어가 무려 300여회 이상 나타납니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관련하여 믿음이 강조되었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존하기를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존하는 태도를 일컫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행전 16장 30절 31절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에 나타나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 믿는 이들이 전심으로 그리스도에게 결합하여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 말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그렇습니다. 그리스도 대속의 죽음 이후 우리는 새로운 계약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계약관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지탱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에 대한 신뢰가 깊어지게 됩니다. 고린도 전서 12장 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을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라” 아멘 !! 믿음은 성령을 통하여 더 확충되어집니다.


실제적인 믿음 - 믿음에 대한 그릇된 오해

우리는 믿음을 실제적이고 일상생활로 생각하지 않고 영적인 영역에 속하는 신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서 얻어진 경험도 마치 믿음이라 여깁니다. 신비체험이 많은 사람을 ‘믿음이 좋다, 혹은 그 사람의 믿음이 크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 신비 체험의 에너지가 감소하게 되고 내가 언제 그런 힘을 얻었나 할 정도로 허무해 지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것들은 믿음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촉매 역할로 보아야 합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수많은 신비체험을 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낫게 하고,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자 다 자기의 생업을 찾아 떠나버렸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인 것입니다. 엘리스 그레이가 쓴 글입니다.

어느 날, 다섯 살짜리 딸이 아빠에게 다가와 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아빠 너무 더워, 수영장에 가면 안돼?”그 아이의 아빠는 “나중에 가자꾸나.” 하고 말했다. 자꾸만 “왜 오늘은 안돼?”하고 묻는 딸아이에게 아빠는 갈 수 있는 도이 없다고 힘들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딸아이는 “하나님께 부탁할거야!”라고 말하고는 약간 도전적인 태도로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호기심이 생긴 아빠는 방문 앞에 서서 하나님께 하는 기도를 들었다. “하나님 여기는 오늘 너무너무 더워요. 진짜 너무 너무요. 난 수영장에 가고 싶어요. 아빠는 돈이 없어서 저를 데려 갈 수 없대요. 그러나 제발 하나님이 어떻게 좀 해 주실래요? 고맙습니다. 하나님 아멘.” 아이는 수영복을 입었다. 그리고 목에다 수건을 두르고 현관을 향해 걸어가며 이렇게 선언했다. “밖에 나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건지 기다릴 거야.”딸아이는 무릎에 팔꿈치를 붙이고 손에 턱을 받친 자세로 현관 앞 계단에 자리잡고 앉았다. 바로 그때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한 사람은 이웃집 부인이었다. “가족끼리 서로 친해지면 좋겠어요. 컨트리클럽으로 수영하러 가려는데 함께 가면 어떨까요? 저희에게 무료 티켓이 있거든요.” 아이의 아빠는 말했다. “좋지요! 그런데 언제쯤 가실 계획이세요? 저희가 준비할 시간이 좀 필요한데요...” 그러자 이웃집 부인이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도 아직 준비가 전혀 안 됐어요. 사실은 몇 분 전 까지만 해도 생각하지 않은 일이거든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믿음을 너무 크게 어렵게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현실 속에서 늘 일어나는 일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사소한 것 까지 세심하게 살펴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실제적 의미


첫째, 믿음은 그 대상에 의지하는 것입니다.(히13:8)

우리의 생활 속에서 만일 배우자가 신실하지 못하거나 혹은 친척이나 친척들로 인해 심한 상처를 받았다면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매우 약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의 신뢰를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을 때 그 믿음을 다시 회복하는 데는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립니다. 믿음은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말이나 행동에 늘 주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약속, 서약, 맹세는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게 되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것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핑계를 됩니다. 자기 합리화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예수님은 절대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 때문에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말라기 3장 6절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민수기 23장 19절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기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예수님께서는 항상 계시고 그가 말씀하신 것을 다 행하시며 미래에도 존재하시고 말씀하신대로 다 이행하실 것입니다. 그는 영원토록 신뢰할 수 있는 분입니다.


둘째, 믿음의 깊이는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의 깊이와 같습니다.(롬10:17)

사림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갈등하게 될 때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온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방법으로 역사하시고 또 어떤 특정한 방법으로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기대합니다. 즉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방법대로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방법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받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70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을 받아 제자로 둘씩 둘씩 파송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했습니다. 귀신들이 항복하고, 사단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과 똑 같은 일을 행한 것보다 제자들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역사하시지 않았을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불순종이며 불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이 이러했습니다. 물이 없어 불평하고, 고기 먹지 못해 불평하고, 가나안 백성을 두려워 불평하고, 결국 그들은 멸망당했습니다. 아무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완전한 믿음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을 때 우리의 믿음이 약해집니다. 만일 주님을 더 깊이 믿고 싶다면 믿음의 대상인 주님에 대해 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이 자기 계시인 말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 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커져 갈수록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나는 믿을 수 있어!”라고 다짐한다고 해서 믿음이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아는 것 이상으로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추측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마암았느니라.”(롬10:17)고 말한 이유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제한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부족해서입니다. 그 지식과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공부를 통해서 지식의 깊이를 쌓아가야 합니다.

  

셋째, 믿음은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약 2:17, 18)

데살로니가 전서 1장 3절 ‘믿음의 역사’‘사랑의 수고’‘소망의 인내’를 말합니다. 믿음은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말씀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일이 없느니라.”믿음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입니다. 실제로 삶의 영역에서 많은 일들을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장에도 ‘믿음의 은사’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행동 속에 믿음이 표현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큰 믿음이 있노라 말하면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야고보서 2장 15절에서 18절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믿음과 행함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대적들의 공격의 빌미를 제공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격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내어 보여야 할 때입니다.


복한 왕자

오스카 와일드가 쓴 행복한 왕자 이야기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제비가 겨울을 보내기 위해 이집트로 가는 중 한 도시에 온 몸에는 황금으로 되어 있고 두 눈에는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으며 허리 옆의 칼에는 루비가 박혀 있는 동상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자의 눈에는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제비는 알았습니다. 왕자는 제비한테 부탁을 했습니다. 가난한 재봉사에게 칼자루의 루비를 전해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청년에게는 한쪽 눈의 사파이어를, 성냥팔이 소년에게는 다른 한 눈의 사파이어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비는 왕자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왕자는 이제 자기 몸에 있는 순금을 떼어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부탁했습니다. 모두들 선물을 받고 용기와 희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비는 왕자의 부탁을 들어 주느라 남쪽으로 가는 날을 하루하루 연기하다가 그만 강남으로 가지 못하고, 왕자와 제비는 겨울이 다가오는 줄도 잊은 채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고 보니, 어느 듯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추운 겨울이 닥치고 말았습니다. 제비는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이미 회색빛 흉한 돌로 변해버린 왕자의 동상 밑에서 싸늘하고 딱딱하게 얼어 죽어 갔습니다. 사람들은 눈과 보석이 빠져나간 왕자의 동상을 끌어내려서 쓰레기장에 버렸고, 제비의 시체 또한 왕자의 동상 옆에 버려졌습니다. 어느 날 하늘에서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져오라고 천사들을 내려 보냈습니다.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서 하늘 천사가 가져간 것은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아니었으며, 또한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도 아니었습니다. 도시 한 구석에 차디차게 식어버린 왕자의 납으로 된 심장과 제비의 초라한 시체가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제비는 내 낙원에서 영원토록 노래를 부를 것이요 이 행복한 왕자는 내 황금의 도시에서 나를 찬양토록 하리로다”는 말로 동화는 끝을 맺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은 왕자와 그 왕자의 사랑을 실천하게 한 제비의 관계는 어찌 보면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의 대행자로 우리를 불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믿음을 우리의 가슴에 심으신 것은 사랑의 행함이 아닐까요? 그 믿음은 우리의 구원의 성취로 나갈 뿐 아니라 결국 사랑의 정신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아셨듯이 우리도 세상에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세상에 드러내시길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세의 두가지 질문  (0) 2009.04.14
예수님의 쌍둥이, 에수님의 제자  (0) 2009.04.14
I Have a Dream  (0) 2009.04.14
변장공동체 변화 공동체  (0) 2009.04.14
변명(본디오 빌라도)  (0) 2009.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