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내 삶의 목적되신 하나님"

어저나 2009. 8. 24. 12:11

“내 삶의 목적되신 하나님” (고전 10 : 31)             (2009. 8. 23)


(고전 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토요일 오후 2시경 CBS를 들었는데, 대구대 대명동 켐퍼스 재활과학대 5층 영광교회에서 CBS 목요 경배와 찬양이 열리는데 주제가 “내 삶의 목적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정말 하나님이었는가? 깊게 더 깊게 생각하게 했습니다. ‘목사’라면 그래도 다를 성직자라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 구별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말합니다. “목사는 인간이 아닙니까? 내가 아는 목사님은 술도 먹고, 담배도 피고, 제사도 드리고 우리와 다 똑같아요.” “왜 그리 유별스럽습니까?” 그럼 우리는 왜 달라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구별된 자다.

우리는 창세전에 이미 선택되었고 구별된 하나님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똑 같은 삶을 산다는 말입니까? 달라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도 거룩한 성도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집사님들은 자신들을 ‘잡사’라 부르면서 웃습니다. 이게 웃을 일입니까? 부끄러운 말이고 자기 얼굴에 침 밷는 짓입니다. 우리는 태중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


우리는 하나님께 ‘자기 포기’로 헌신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기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포기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부인’이라는 말이 더 합당할 것 같습니다. 나의 모든 소유를 부인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온전한 헌신을 하겠다는 고백이고 그를 통하여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는다고 했습니다. 잃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 지어지고 형제, 자매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 12:49~50) 우리가 복음을 위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얻게 되며 먼 지평을 바라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지금의 것은 하나님에게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면 다시 하나님이 처음 것과 비교되지 않을 것을 예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예배 때문에 직장 일도, 가정 일도, 공부하는 일도, 다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뒤에서 기도만 하고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태도를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고 이 세상에서 치욕과 능욕의 길도 마자 아니하였다. 그런데 너희들은... 하나님의 고통이 있습니다. 구약의 소돔과 고모라가 타락했지만, 예수님 시대에도 타락한 백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혹 우리가 고라신과 벳새다의 백성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 요한계시록 18장 16절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를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 간에 망하였도다.” 오늘날 이후 범죄한 우리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면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헌신이 되려면 나를 버리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중심의 주인자리에 주님이 좌정해야 합니다. 내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실패해서 갈 길이 없어서 주님의 사람, 사역자가 되는 것은 또 다름 상처와 실패를 경험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물론 그 중에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결정은 가정의 파괴와 교회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자기의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히 내 속에서 불 일듯 일어나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대면

하나님과의 대면은 지금 시대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구약에서도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여호와의 사자’ ‘인자’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성자 예수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대면하였습니다. 타락 이후 범죄 이후에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 많은 인간들이 자신을 봄으로 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세에게는 뒷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환상 중에 어느 누구도 경함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기고 합니다.


하나님은 음성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십니다. 엘리야도 극히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은 백성의 죄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는 부정한 자라 말했을 때 제단의 숫불로 태워 주셨습니다. 예례미야도 나는 작은 아이라 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주시며 선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내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자신의 부인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을 주님임을 고백하며 그의 다스림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통해

내 삶의 주인 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나의 삶을 이끌어가고 다스리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내 삶을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바라시며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내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배워 갈 수 있습니다.


내 삶의 목적되신 하나님을 찾아가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두렴 없이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매일 매일 물어가면서 성실한 삶을 통하여 임하는 은혜를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성도님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