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어저나 2009. 8. 28. 14:02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행 16 : 16 ~ 34)         (2009. 8. 30)


군에 있을 때 겨울이 되면 토끼 사냥을 나갑니다. 눈 덮인 산에 토끼를 잡으러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토기 몰이를 할 때에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토끼를 발견하면 산 아래로 몰아야 했습니다. 토끼를 뒷발을 이용해서 껑충 껑충 뛰기 때문에 오르막을 우리 보다 훨씬 잘 뛰어 올라 갑니다. 토끼는 내리막에서는 사람보다 잘 뛰기 못합니다. 그래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토끼를 몰아야 합니다. 둘째는 토끼를 잡기 위해서 둥굴게 한 방향으로 몰아야 합니다. 토끼를 몰다가 옆에 토끼를 발견해도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두 마리를 다 잡으려 하다 둘 다 놓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학기를 돌아보면 좀 욕심이 앞섰던 것 같습니다. 뭔가 거창하고 원대한 비전을 받아들여 실행함으로 하나님이 큰일을 행하심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 속에는 자신의 욕심이 베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내 자신 속에 갇힌 하나님을 발견할 때가 있어 하나님께 회개를 합니다. 진정한 길은 하나님을 자신의 울타리 속에 가두어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하나님의 권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 내 자신의 열심이 하나님의 사역에 방해가 된다면 과감하게 내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자기 부인’의 길을 우둔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지난 학기 동안 수요일에 ‘기도’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기도에 응답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시고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시게 하셨습니다. 또한 CBS 죠이엘 찬양팀과 협력사역으로 매주 목요일에 ‘내 삶이 목적되신 하나님’의 주제로 목요 경배와 찬양 집회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방학 중에는 수요일에 중보기도학교를 통하여 기도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하셨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금요 중보기도 모임이 결성되게 되는 전기가 마련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시고 일하심에 대하여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의 작은 기도를 작게 보지 아니하시고 크게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열정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번 학기에는 수요일에 ‘예배’에 대하여 성경공부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이 예배에 대한 우리의 바른 자세와 참된 회복을 주시시라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예배에 대한 회복을 꿈꾸며 또 하나 ‘제자 비젼’을 가지고 힘차게 전진해 나갈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뜨거운 기도와 열심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힘차게 날아오르는 영광교회를 만드시리라 확신합니다.


바울의 유럽 전도

사도행전 16장은 바울의 환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바울이 아시아에서만 전도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이제 복음을 유럽으로 확장 시키시기로 작정하시고 그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며 그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그의 유럽 최초의 전도지는 바로 빌립보였습니다. 빌립보에서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하시고 그녀의 집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증거 되고 세례를 베풀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빌립보 교회의 최초의 성도가 생기는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는 사람도 연관되는 일도 없는 이곳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 루디아를 만나게 하시고 그녀의 가정에 복음이 전파되고 세례가 베풀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렸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역시 은혜가 역사하는 곳에는 사단의 방해도 만만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귀신들린 한 여종을 치유했습니다. 귀신이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며칠을 괴롭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주인은 이제 자기에게 경제적 이익의 근원이 없어짐으로 바울과 실라를 관원에게 보내어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하여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친 후에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발에 쇠로된 열쇠를 잠가 두었습니다.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담대함으로 감옥에서 기도하며 찬송하였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그들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함으로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집중하라

성령이 충만한 바울과 실라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여 주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기를 간절히 기도한 것 같습니다. 이들의 찬송과 기도 후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다고 말합니다. 근데 지진이 일어나면 건물과 땅이 진동하지 사람들의 매인 것이 왜 벗겨졌을까요? 이것은 단순한 지진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4장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시내산에 임재하실 때 진동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베드로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모든 성도의 기도로 인하여 베드로가 천사의 인도함으로 감옥에서 벗어나게 된 사실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섬겼을 뿐 아니라 온전한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하였고 그들의 마음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한다면 집중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십시오. 기도와 찬양으로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사단의 궤계는 우리가 예배와 기도와 말씀 묵상 가운데 딴 생각을 집어넣으려고 부단히 애씁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 나가야 합니다. 방패기도가 부족하다면 대적기도로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한 영의 세력과 미혹의 영의 세력을 물러갈찌어다!” 강하게 외쳐야 합니다. 아니면 기도와 찬양과 예배 중에 떠오르는 잡념들을 기록하십시오. 기록해서 다시 보고 그 생각들이 악한 영의 세력인지 아닌지를 분별해 내십시오. 그래야 내 자신을 극복하며 하나님께 더욱 깊이 다가서게 됩니다. 만약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가족에게 먼저 부탁하고 교회의 사역자 또는 멘토들에게 어려움을 호소하고 함께 합심기도 함으로 해결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한다면 얼마나 힘을 다해 마음을 대해 하나님을 바라보았는가가 기준이 될 것입니다. ‘집중’ 이것이 훈련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축복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절대적으로 집중해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와 말씀 중에 어느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각양의 은사를 허락하셨기에 다른 사람들 향한 존중이 앞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와만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며 그 가운데 성령을 통하여 조정하십니다. 우리의 보혜사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만약 교회에서 일 때문에 분쟁이 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악한 영의 세력이 숨어 있음을 분명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단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구원은 오직 한 길 뿐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바울이 전력을 다한 것은 다름 아닌 절대 진리인 복음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 되셨음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의 사명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중보 되심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감옥 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다 풀어졌음에도 그들은 감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간수의 당황하는 모습이 성경에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할려 할 때 바울은 크게 소리 질러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죄수들이 도망치지 않음을 보고 간수는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고 ‘부복하고’의 ‘앞으로 떨어졌다’, ‘맹렬히...에 돌진했다’는 뜻을 내포하는 바, 이 간수의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간수는 이때까지 심문하는 태도를 버리고 오히려 그들에 대한 존경심이 일어났으며 그들이 기도하고 찬미했던 하나님에 대하여 경외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30절 “저희를 데리고 나가” 바울과 실라를 별도의 장소로 데리고 나가 하나님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질문했습니다. “선생들아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어찌보면 하나님은 이 구원의 계획을 이미 준비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도와 찬양의 권능이 세상의 권력을 복종시키는 대목입니다. 세상의 어떤 감옥도 복음을 증거 하는데 장애가 되지 못함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했으며 수많은 편지를 통하여 그가 세운 교회를 격려했으며 바르게 세우려고 했습니다. 복음은 어떤 장애들도 다 극복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요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기 싫어했으나 그는 큰 물고기에서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니느웨 성의 10만이나 되는 사람을 살리십니다. 베드로도 그의 기도가 끝남과 동시에 욥바에서 온 백부장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며 그의 가정을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물세례를 전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성령 세례가 임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빌립을 보십시오 성령에 이끌리어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성경을 풀어가르치며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범위를 뛰어 넘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초대 교회 복음 증거자들이 전한 메시지의 대주제였습니다. 동시에 이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한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피스튜손'(*, '믿다')은 당연히 단순과거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되는 그 순간, 구원은 그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항상 주 예수께 신뢰와 의탁을 두는 것을 뜻합니다. '너와 네 집'(*, 수 카이 호 오이코스 수)에서 '너'라는 개념이 이미 동사 어미로 표현됐는데도 '쉬'(*, '너')가 첨가된 것은 대명사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간수의 믿음이 자동적으로 아내나 아이들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자기의 인격으로 믿어야 했던 것처럼 그 식구들도 각자의 인격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 자신의 것입니다. 부모의 믿음, 가족의 믿음, 친구의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고백만이 내 자신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의 복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던 도중 부활하신 주님이 그를 부르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웠습니다. 바울에게 다른 사도들에게 주신 것처럼 그에게도 능력 행함을 허락하셨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 할 때 많은 치유와 권능을 행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의 용기와 담력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충만함 이었습니다. 권능자로 세움을 받은 자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시며 교회를 세워나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성령 행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꿉니다.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복음전파의 현장에서 성령의 강한 임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사도행전’을 쓰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로마 전도 여행 이후의 부분을 써가고 있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쓰여지지 않은 뒷 분입니다. 12사도와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와 브리스길리와 아굴라와 같은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 증거 하던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를 통하여 내 자신 또한 연속선상에 놓이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던 잘못된 고정관념을 벗어버리고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임하셔서 일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제는 성령시대가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로 성령이 오신 이후로 성령님은 늘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역사해 오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위기가 고통과 환란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얼마나 충만한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분명 주위에 복음에 갈망하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알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때 복음이 증거 되며 그들에게 복음이 그들의 것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 모두의 것임을 알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를 늘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미 성령이 임한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에게 권능으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심을 경험하는 하루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