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나를 팔아 천국을 사라

어저나 2009. 9. 12. 12:00

나를 팔아 천국을 사라! ( 눅 18 : 18 ~ 30 )                (2009. 9. 7)


‘사람의 몸값’은 정말 얼마일까?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사람의 몸을 값으로 따지면 얼마일까”를 다룬 것이 있는데, 인체의 성분 원소로 공업제품을 만들면 비누 7개, 성냥개비 2000개, 설사약 1봉지, 못 1개, 연필 2000자루 등 요즘 물가로 10만원어치도 안 된다는 것이 그 책의 결론이었습니다. 또한 생리학자들은 성인 한 사람이 하루에 신진대사를 통해 소모되는 에너지 2400㎉를 전기로 환산하면 약 166W가 되는데, 이를 전기세(55.1원/㎾H)로 환산하면 70년 평생 동안 약 14만원의 전기를 생산한다는 계산을 내놓았습니다.


반대로 생화학 시약회사에서 판매하는 헤모글로빈, 알부민, 콜라겐, 트립신, 인슐린 등 각종 호르몬 제제를 약품의 값으로 따지면 600만 달러(60억원)에 달한다는 계산법도 있고, 피부조직과 인체 기관 및 장기의 값으로 따지면 6000억 달러 이상이라는 계산법도 있었습니다. 외신보도에 따르면 2004년 현재 미국에선 시신 1구당 약 20만 달러(약 2억원)에 밀거래가 이루어지고 있고, 지난해 국내에서 단행본으로 발행된 <시체를 부위별로 팝니다.>(원제:Body Brokers, 2006년)에 따르면 시체를 통째(?)로보다 부위별로 파는 것이 더 비싸다고 합니다. 현재 미국의 시신 밀거래 시장 규모는 1990년대 후반에 연간 2억 달러였던 것이 최근에는 10억 달러(약 1조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보니 ‘부르는 게 값’인 상황인데다, 금전적 이익에 비해 규제와 처벌은 미약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계산방법이 뭐든 실제 사람의 몸을 돈으로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을 넘어 무도한 일이고, 값으로 매길 수도 없습니다.


나의 가치를 어디에다 둘 것인가?

나의 존재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며 살아간다면 나의 존재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내가 평생 동안 모을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될까요? 한 달에 80만원씩 저축해야 1,000만원을 모을 수 있습니다. 10년을 꾸준히 모아야 1억을 모을 수 있습니다. 신문 기사에 보면 “적정한 노후 생활비는 은퇴 전 생활비의 70%가량”이라며 “은퇴 후 30년 동안 매달 200만원을 쓰려면 은퇴 시점에 8억6800만원의 돈이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은행 PB팀에 따르면 3040세대는 평균 37.5세를 은퇴준비를 시작해야 할 시기로 보고 있으며, 평균 19.3년간 은퇴준비를 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은퇴 후 필요한 자금인 8억 원이 넘는 돈을 19.3년간 마련하려면 매달 200만원 가까이 저축을 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연금, 보험 등에 자신의 미래를 두고 보장 받으려 합니다. 전문가들은 인생을 30+30+30으로 보고 있으며 30년 동안 직장을 잡기 위한 준비기간이며 30년 동안을 노후를 준비하는 과정이며 30년을 노후 생활을 가질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근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가치의 근원을 한 방향으로 이끌어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후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신앙에만 매진하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에 젖어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모든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놓고 본다면 너무 초라해집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 모든 것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저도 아직 노후에 대하여 깊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밤에 문득 집안을 둘러 볼 때 쑥 쑥 커가는 아이들 이제 아이들 방이 좁게 보입니다. 둘이 자는 공간으로 부족해 보입니다. 아내의 흰 머리까락과 힘들어 지쳐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많은 생각에 잠겨 듭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건데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기 까지 주님은 한 번도 주리게 하신 적이 없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굶주리게 하신 적이 없고 헤어진 옷을 입지 아니하고 신발이 떨어진 적이 없게끔 인도하신 것과 같이 내 자신과 가족의 삶 역시도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주체가 된 것을 살펴보면 초대 교회도 핍박을 받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약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국가의 공인 받기 전 까지 일반 민중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받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부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때에 교회는 부자가 되었으며 사회의 중심층, 권력층이 되자 교회는 부패하기 시작했으며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을 주도하던 사람들도 대부분 핍박으로 인하여 풍요로운 삶들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지의 땅으로 갔던 ‘퓨리탄(청교도)’들은 핍박받고 사회에서 소외받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미지의 땅을 풍요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미국의 신앙의 터전 위에 세워진 곳입니다. 그 풍요의 땅도 점차 위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신앙의 가치가 그 나라위에 바르게 서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 고요한 나라 조선’ 간혹 지구본을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 어떻게 보면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내가 살고 있는 대구를 보면 거의 끝자락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복음이 어쩌면 가장 늦게 전해진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스토리우스교(경교) 전래의 끝으로 보입니다. 불국사 석굴암을 간다라 미술의 극치라고 말하는데 간다라 미술의 끝자락에 우리의 사는 곳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개신교가 전래 된지 120년이 된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소유한 선교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제가 어릴 때 상상하던 이상의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개신교의 전래와 절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우리나라는 예전에 서구 열강들과 어께를 나란히 할 정도로 발전되었습니다.


가치 전환의 문제

이제 성자의 가치에서 분배의 가치로 많은 전환을 이루었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배고픈 것이 현실입니다. 문제는 ‘가치’의 중심에 ‘경제적 가치’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선물을 살려면 하면 다들 ‘현금’을 선호합니다. 언제 인가부터 ‘돈’이 중심이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돌, 환갑, 칠순, 결혼기념일, 생일 등 다들 ‘현금’을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윤리를 배우고 가르쳤습니다. 사회의 가장 중심 되는 권리가 무엇인가? ‘기본권’ 기본적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가치가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리고 본질적 가치인 ‘자유와 평등’이며 사회적 가치가 우선시 되고 개인적 가치가 가장 나중이었습니다. 분명히 사회는 이러한 가치들이 우선시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회의 흐름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합리주의’를 잘못 해석한 ‘개인주의’ 사고방식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린도 이러한 사회의 움직임에 동참해야 합니까? 도덕적 가치가 무너지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는 막연히 바라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가치전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경제적인 부분만으로 살아갈 수 없게끔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다 생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을 지닌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처음 사람들은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동산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났으며 남자들에게는 노동을 해야만 살 수 있게 하셨고 여자는 해산하는 고통을 받게 되었으며 남편을 평생 사랑하며 섬겨야 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지배와 종속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지배와 종속의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로 어두운 삶의 여정 속에 인류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서히 인류는 자신을 위해서는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을 당연히 생각했으며 남의 지배를 받지 않고자 힘 있는 사람을 자신들의 왕으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왕은 니므롯입니다. 그리고 성을 쌓아 자신들의 안위를 지켜가지 시작했습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화폐가 등장하였고 사람들은 자신을 만족시킬 물건들을 찾아다니며 모든 것의 중심에 하나님을 버리고 경제적 가치를 중심으로 모이기도 흩어지기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점차 심화되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처음 창조될 때에 하나님과 교통하며 아름답고 행복하게 동동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가치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영적 교제’의 삶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교제할 때 가장 기쁘고 즐겁게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의 가치 기준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있으며 그 교제를 통하여 인생의 참 만족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자 청년 이야기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마태와 마가에는 ‘어떤 사람’으로 ‘누가’에는 관원으로 나옵니다. 세 복음서에 공통으로 ‘그는 돈이 많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젊은이는 그 당시 사회에서 엘리트이며 경제적으로 부한 ‘귀공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지식으로 많은 것을 만족하려 했던 것 같고 경제적인 부분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깊은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아마 무언가 채울 수 없는 고민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열심있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정말 바르게 자란 사람입니다. ‘바른 생활 청년’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부족함이 없는 청년입니다. 저도 간혹 이런 청년을 만날 때마다 너무나 기쁩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의 문제의 본질을 알고 계셨던 것 같이 보입니다. 앞에서 19절“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분명하게 말씀하시면서 계명을 말함으로서 문제의 본질이 ‘선한 데’ 있지 않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도덕적 성결, 율법적 성결로 영생의 문제를 풀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 묘사하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이 청년은 자신의 율법적 성결을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답변으로 그의 부족함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나를 쫓으라’라고 명하십니다.


부자 청년의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그의 중심이 그의 도덕적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에 근원을 두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부르실 때에 마치 왜 부르지 않았는가 하는 방식으로 즉시 따랐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이들은 자신의 생업을 버리고 주님의 명령을 따라 즉시 따랐습니다. 그들에게도 고기 잡는 것이 자신의 생계의 전부였습니다. 제자들은 전부를 부인하고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즉시 따랐습니다.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도 주님과의 만남을 간절히 사모하였으며 주님 앞에 자신의 것을 부인하며 주님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부자 청년을 다 할 수 있지만 재물만은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조금만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다 팔아’라고 말씀하였던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생은 세상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소중함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6)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 하나님은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고기를 피 채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중심이 무엇인지, 본질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십니다. 저는 천국은 어리버리하게 들어가는 곳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영생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돈의 가치를 버림으로 얻을 수 있음을 말씀하고 게십니다.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이냐 돈이냐 할 때에 바로 하나님만이 내 삶의 주인이시며 중심되심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영생이 천국이 보장되었음을 선포하고 게십니다. 부자 청년이 팔아할 것은 ‘자신의 재물’이었습니다. 그것을 팔아 영생을 사야만 했습니다. 저도 이제 팔 수 있는 것이 생겼습니다. 집, 자동차, 지식 등 점 점 많아질 것 같습니다. ‘저도 팔아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영생을 얻으려면, 제자가 되려면 팔아야 합니다. 자신이 값지다고 생각하며 아끼고 있는 것들을 팔아야 합니다. 숨기고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다 팔아’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주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삶을 소유하려면

참된 삶의 소유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활하다보면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치러야 할 희생(노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사회는 더 치열해져서 얻기 위해서 자기 몸만 파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팔아야 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사회는 살벌한 사회입니다. 그래도 농사는 정직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심은 대로 노력한 대로 거두니 말입니다. 지금의 사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엇을 주기 앞서 마치 자신 앞에 충성하기를 요구하고 무릎 꿇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과 버림의 삶을 살아야 영원한 자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 제일 힘든 것은 ‘고문관’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고문관’이라는 것은 조금 바보스럽고 모자라서 조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군대에서 가장 힘든 사람도 고문관이지만 어찌 보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것도 고문관이 되는 것입니다. 고문관이 되는 순간 고참들이 그에 대한 기대를 버리기 때문에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잘 나는 것도 무척 중요하지만 때론 고문관이 되면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이 방법은 성도들에게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부인의 길 자기희생의 길은 너무 험난한 삶입니다. 하지만 영생을 소유하기 위해서 생명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가야만 할 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조급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도 성질이 급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조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때라 기다리라.” 인내하고 참아야 할 시간들이 우리에게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되게 하소서  (0) 2009.09.20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0) 2009.09.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0) 2009.09.12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0) 2009.08.28
"내 삶의 목적되신 하나님"  (0) 2009.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