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하나되게 하소서

어저나 2009. 9. 20. 20:49

하나 되게 하소서 ( 엡 2 : 11 ~ 22 )                        (2009. 9. 20)


이집트나 시리아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데 이들은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표식으로 팔목에 십자가 문신을 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여러 가지 불이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에 팔목에 십자가를 새겨 넣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공동체성을 유지해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공인받기 이전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카타콤(지하 공동묘지)에서 은신하며 살아왔으며 그들은 서로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표시하는 것으로 바닥에다 물고기 모양을 그림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기독교에서 자신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음과 자신의 신앙의 확신을 보여주며 신앙을 고백하는 예식은 성례식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이제까지의 구습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으로 거듭났음을 궁중 앞에서 증거합니다. 세례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되고 참 생명을 소유하는 증거가 되므로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기쁨의 자리입니다. 에베소서 4장 4, 5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그리스도인들의 하나 됨의 표식이 세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 됨의 표식인 이 세례는 처음에는 유대인의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민족적 우월성과 구원에 있어서 자신들에게만 누려진 특별한 사유의식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율법적인 사람들에게는 할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신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은 후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성령님이 임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을 때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은 ‘불과 같은 성령’을 경험하게 되며 그들의 입에서는 자신의 언어가 아닌 그 당시의 지중해 연안의 모든 지역의 언어로 말하는 ‘방언’이 나타나집니다. 이는 이제 구원이 유대지역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온 나라와 온 민족을 향한 것임을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예루살렘 지역에만 국한하며 말씀을 증거 하는 데만 애를 썼습니다. 그 가운데 복음의 확산을 위하여 핍박이 있었고, 스데반의 순교가 있었으며,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와 에디오피아 내시에 대한 전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시도된 ‘바울의 회심’이 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과 유대 안에서의 전도를 이제 소아시아, 지중해 전역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실현시켜 나갔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는 환상을 보게 되고 또한 이것을 통하여 이방인에 대한 구원을 진행시키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통하여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음을 확신하고 고넬료의 가정엣 복음을 전하였을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함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며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을 높임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그는 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구별함이 성령세례를 통하여 물세례 통하여 막힌 담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전하는 곳에는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오늘날에도 세례의 외적 표징뿐만 아니라 내적 표징 또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증거 되는 어느 곳이든 세례를 통하여 하게 되게 하는 역사가 있음을 믿습니다.금 우려스러운 것은 ‘성령세례’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구원 받은 모든 사람에게 보혜사 성령이 내주하며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간구하고 계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성령세례’가 임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은사(카르스마)’임합니다. 여기에서 ‘은사’는 방언, 방언 통역, 예언, 지혜의 말씀, 권능, 신유, 고전 12장에서 말하는 은사에 국한 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섬김과 봉사, 나눔과 남을 세우는 것, 가르침의 은사, 구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은사들이 각양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집니다.


사람들에 따라 특별한 은사들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세례를 통하여 내속에 구원의 감격함이나 구원의 신비에 대한 비밀이 풀려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령님과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성령세례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면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성령이 임하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 관계된 것이기에 미루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가 임하였을 때 성령이 임재하였으며 자신의 죄에 대한 심각한 각성이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세례는 집단 최면이나 집단 상담을 통하여 나타나는 자신의 감정의 일시적인 안정감이나 속 시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근원적인 죄에 대한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게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의 이입을 의미합니다. 신비적인 체험이 될 수 있고 평이하지만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생의 문제의 해결을 의미합니다. 아직도 구원에 확신이 없다면 성령의 임재를 성령세례를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실 줄 믿습니다.


성령세례를 통하여 공동체성을 회복하자.

성령세례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문제를 해결합니다. 공동체성을 회복시키며 성령 안에서 모인 무리를 함께 변화시키십니다. 오순절날 성령 강림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서로 모이기를 힘쓰며 서로를 돕고 기도하며 찬송함으로 살아갔습니다. 성경에도 바나바는 자기 밭을 팔아 교회에 헌금하였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어려움을 초대 교회는 자신의 소유를 바침으로 해결해 나갔습니다. 한국의 초기 교회에서도 ‘땅 바치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일제시대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교인들이 교회에 땅을 바쳐 자립기반을 마련해 나갔습니다. 바쳐진 땅은 교회가 관리하며 기증자가 살아 있는 동안은 교회가 그의 생활을 책임져 주었습니다. 그래서 혈육이 없는 과부교인들은 살아 있는 동안 생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고 자신의 바친 것이 선한 것으로 사용됨으로 기뻐했습니다.


공주에 ‘협산자 예배당’이 있는데 ‘협산자’의 의미는 ‘옆구리에 우산을 끼고 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배당 건축에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아 이런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1939년에 세워진 양두현 지루두 공덕비가 있는데 1923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부인 토지 소유뿐만 아니라 매년 쌀 70섬을 바쳐 일제 어려운 시기에 교회의 교역자들이 교인들이 어려움 당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논 1만 8천 평, 밭 2천 7백 평을 받쳤습니다. 그리고 과부교인 ‘홍루두’는 논 8천 평과 밭 8천 평을 받쳤으며 양반 교인 ‘황하영’은 기름진 땅 10 두락을 받쳤습니다. 일제시대에 공주읍교회가 소유한 땅이 4만 3천 평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평양 대 부흥 운동 이후 각지 일어난 부흥 운동의 결과들입니다. 초기의 한국교회는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것을 자신의 소유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쌓여지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아낌없이 감사함으로 드렸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 됨을 이루게 하시는 일 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장로와 선교사의 포응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 때 길선주 장로님이 (그해 10월 목사 안수 받음) 설교하셨는데 설교 도중 연극 한 편을 실현했습니다. 줄을 하나 가져오라 해서 허리에 줄을 묶어서는 단단히 잡고 있으라 했습니다. 그러고 장로님은 강단 반대쪽에 앉아 있는 선교사님에게 가려고 했습니다. 줄을 당기기 위해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는데 길선주 장로님은 예수 믿기 전에 선도 수행과 각종 차력도 했고 힘이 장사였습니다. 길선주 장로님의 힘도 대단했지만 잡아당기는 사회자의 힘도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한참 애를 쓰던 장로님은 청중을 행해이것이 바로 나를 세상에 묶어 두고 있는 죄의 사슬이요 이 사슬을 끊고 하나님과 영생 나라에 들어가야만 하는데 죄가 나를 놓아두지 않는구나!”그리곤 힘을 불끈 쓰자 끈이 끊어지면서 장로님은 튕겨 나가듯이 선교사님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선교사님도 엉겁결에 두 손을 벌려 장로님을 얼싸 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내가 자유하게 되었소!”


이 외침이 있자 1천명이 넘는 회중들의 통성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과거에 지은 죄로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사람, 공개적으로 죄를 자복하는 사람, 죄사함으로 은혜에 감격하여 기뻐 춤추는 사람..... 은혜의 도가니였습니다. 정작 길선주 장로님과 매큔 선교사님도 은혜를 받고 미국 전통과 문화에 자부심이 강했던 사람과 한국에 대한 전통과 자부심이 강했던 두 사람 또한 죄를 회개하고 하나가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길선주 장로님과 매큔 선교사님은 회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물을 쏟으면서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이후 매큔 선교사님은 누구보다 더 한민족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3.1 운동 만세 시위를 도운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습니다.


복음은 이방인이든 할례당이든 무할례당이든 차별이 없었습니다. 미국 사람이든 조선 사람이든 원래 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는 외인들이었으며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구원과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우리의 화평 되신 예수의 피로 인하여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둘로 된 담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막힌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되었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막힌 담을 허물어 주십니다. 죄의 깊은 담이 허물어져야 옆의 사람들의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완전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기에 사람들 간의 관계를 힘들어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부흥이란 영정 성장이란? 내 자신의 정신적 문제나 성격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지 잠시 동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흥을 감정적인 문제의 해결로만 불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영의 문제와 매 몸의 육의 문제와 관계의 문제가 모두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잠시의 문제가 아니라 영원과 관계된 문제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속에서 만들어진 담을 허물어 주옵소서.

이삭은 아브라함이 뚫었던 우물을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이것은 단지 우물의 복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아브라함의 우물 다시 파면서 과거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 내면에 신앙의 장애,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좀 더 냉철해야 합니다.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편견, 고정관념, 신념, 자신의 의지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자신의 영적 교제의 방해꾼이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래된 전통, 사회적 신념, 이데올로기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킨다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의 의지와 신념, 관념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분명히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면  내 마음이 막혀 있던 우물이라면 다시 파야 합니다. 새로운 물이 쏫아 날 수 있도록 다시 파야 합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파서 생수를 얻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졌듯이 우리 또한 거룩한 영적 교제를 위하여 새로이 자신을 정비하고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위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문화적, 환경적 차이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막힌 담을 허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십자가는 치욕스러운 것이었고 아픈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친히 지시고 형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회복시키시려고 자신이 친히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이것의 궁극적인 이유는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8절) 우리가 하나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가능해진 일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성전 돌 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19~22) 예수님이 기둥 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는 돌들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하여 거룩해진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예수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양의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관용과 배려를 통하여 건물만 화려한 것이 아니라 삶이 새로워지고 아름다운 성도님들이 되셔야 합니다. 영광교회 되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성령세례를 통하여 성령님의 내 안에서 날마다 역사하심으로 하나 됨을 체험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 됨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더욱 충만하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성령세례를 통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욱 풍성한 삶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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