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누구에게나 성장통은 있다.

어저나 2009. 9. 26. 21:37

누구에게나 성장통은 있다. ( 히 5 : 11 ~ 14 )             (2009. 9. 27)


어렸을 때 팔이나 다리의 뼈가 부러져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조심성이 있는 아이였습니다. 집으로 가려고 골목길로 접어드는데 갑자기 자전거가 달려와 저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일어서려고 하는데 설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아프던지 몇 발 걷기도 못한 채 주저앉았습니다. 그 때가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병원에 가지 않고 밤을 보냈는데 한 숨도 자지 못하고 아파서 울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날 ‘접골원’에 가서 뼈를 맞추었습니다.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나를 잡고 원장이 다리뼈를 맞추었습니다. 공포였습니다. 그리고 깁스를 했고 거의 두 달 후에 깁스를 떼는 날 무서웠습니다. 전기톱으로 깁스를 자르는 것 이었습니다. 전기톱의 소리가 저를 잡아먹는 듯 했습니다. 그 후 어릴 때 날씨가 흐릴 때면 다리가 아팠습니다. 아프다하면 어른들이 “원래 다 그런거야!”라고만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 제가 키가 자라는 것을 모르고 부러진 다리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럭무럭’은 순조롭게 힘차게 잘 자라는 모양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랍니다. 애기들은 하루 밤 자고 나면 하루가 다르게 자라납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일정 시점이 되면 병치레를 하는 것을 자녀를 키우면서 경험합니다. 그 시기 시기마다 피해가지 않고 성장통을 경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픔의 시간이 지나면 아이가 쑥 자라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저 또한 놀랄 때가 있습니다. 육체적 성장과 정신적 성장이 맞물리면서 자녀를 키우는 아버지로서의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아이가 생기고 난 뒤 알았습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를 뱃속에서 키우는 순간부터 느끼니까 남자보다 더 빨리 어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성장합니다.

“계속 성장합니다.” 라고 말하면 나 이제 다 잘랐는데 라고 말할 사람이 여기 대부분입니다. 성장판이 닫히고 육체의 성장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합니다. 저에게는 성장보다는 노화현상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신체 곳곳에서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를 경험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회를 바라보는 식견, 사회 속에서의 관계성, 자녀에 대한 교육방법, 세상의 이치 등 많은 부분에서 자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있어 ‘변한다’라고 말하지 성장한다고 말하지 않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시기 시기마다 생각의 틀들을 바꾸어 왔습니다. 문학가들은 그의 작품을 보면 그의 변화상들을 시기별로 찾아낼 수 있습니다. 굳이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작품 속에 그의 변화상을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화론적인 세계관에 익숙해 있으면서도 진화론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이중적 태도 속에 갇혀 있는 게 사실입니다. 어떻게든 진화론을 배격해야 훌륭한 신앙인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생물학적 진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문화론적, 사회론적 진화론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정신세계의 진화를 이루어나가고 있습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자연의 변화에 인류는 끊임없이 순응하기고 하고 도전해가며 많은 문제의 해결을 가져다 왔습니다. 그럼 인류분명의 찬란한 진보(진화)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마 신종 플루가 50년 전에만 나타났어도 인류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스페인 독감으로 2,000 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하고 있는 데 그 때 우리나라에 약 10만에서 15만 명이 독감으로 병사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진보(성장)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진화론적 세계관에 대한 변환)

우리 기독교의 세계관 중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이원론적 세계관입니다.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문제입니다. 육체와 정신과 영혼은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우리의 행동과 실천에 관계되어져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류의 역사는 언젠가는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해왔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가 탐욕과 욕심으로 인해 병들어간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기독교 역사가들은 로마의 멸망을 육체의 욕망에 의한 성적 타락에 기인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들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이 부분은 전체의 부분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류 역사가 종결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부분은 성경에 나와 있기에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심판으로 규정하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기에 하나님 나라의 진보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심판과 완성을 동시에 말해주는 곳은 성경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악을 그냥 두시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은 구약에서 충분히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즉각적인 응징이 우리를 두렵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과 완성을 동시에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후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과 진보에 대해 깊이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이루심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루기 힘들기에 성령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장은 하나에 국한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영역에서 동시적인 확산과 이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장과 진보에 대하여 닫힌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열려져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화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절할 수 있는 안전판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인류의 변화의 끝은 종말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시기에 우리는 인류의 종말을 늦추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인간 구원을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변화를 시도해야 할 때입니다. 올바른 성장과 진보를 사랑과 평화의 핵인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남들이 죽어가는 것을 기뻐하지 보다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11절)

‘때가 오래므로’는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 오래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본 절은 수신자들의 신앙이 성숙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만큼 신앙의 연조가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변화나 성장의 주역이 되지 못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연조 문제입니다. 교회가 개혁되어지거나 변화되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오래된 신앙인이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더라도 큰 부흥의 불결이 흘러간 교회는 연조가 오래된 곳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들입니다. 이들이 새 역사를 써나가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노력이 중심이 되고 변화를 싫어하는 곳에 머물러 계시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노래와 예배와 역사와 전통만이 존재하지 성령님의 임하심을 볼 수 없습니다.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거의 다 소멸되어져 역사상의 흔적만을 남기고 있습니다. 역사의 흔적 속에 서구의 교회들이 관광사업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하고 꿈꾸던 교회들이 사람들의 구경거리 속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자유로이 움직이시며 새로운 갈급함이 있는 곳에 자유의 영으로 함께 거하시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신앙의 연조나 전통 속에 거하시지 않음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처음 받았을 때와 지금의 변화가 없다며 이 역시 박제화(화석화)된 것입니다. 저도 두려운 것은 새 술을 새 가죽 부대와 담아야 하는데, 변화가 전혀 되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언제든 떠 날 수 있습니다. 사울에게 임했던 영이 떠나고 그에게 악신이 임하였을 때 그는 멸망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 영은 다윗에게 임하였고 그는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책망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될 것은 우리의 생명과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삶에 관계된 부분을 장난칠 수 있습니까? 교회의 어른들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교회의 교사들은 심각하게 받아드려야 할 부분입니다. ‘먹는 것으로 장난치지 말라!’라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목자’는 양들의 생명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는 그들을 보시고 애통해하시며 애간장을 태우셨습니다.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헤치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 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길은 목자가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입니까?

오랜 신앙생활에도 선생이 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를 다시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근본 원리에 대하여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남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무엇인지, 삶의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밝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준비되지 못하였다면 처음부터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은 훈련받는 것을 즐겨합니다. 세미나를 즐겨합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획일화된다는데 있습니다. 전 그리스도인이 다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보십시오. 어릴 때에는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동일한 행동과 모습을 볼 수가 있으나 자라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양성’의 인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당당한 신앙인으로 건실하게 자라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확실히 자리 잡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 속에서 발견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문제는 성장해야 하는데 성장하지 않고 멈추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복 받으러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는 생각에 쌓여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한다는 말씀입니다. 자율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왜 젖을 먹느냐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그것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의의 말씀을 경함하지 못한 것은 진리에 대한 태도를 말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두려움입니다. 싸움을 할 때는 긴장하거나 겁을 먹은 모습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진리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가 두려운 것은 그 진리에 대해 행동할 힘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둘째는 게으름입니다. 박지성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그의 별명대로 ‘산소탱크’ 쉬지 않고 그라운드를 누빈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에게 가장 큰 적은 게으름입니다. 영적 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쉬거나 말씀을 읽는 것을 쉬며는 그것이 쌓여서 더 이상 진보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영적 지도자의 가장 큰 적중의 하나도 게으름입니다. 어느 정도에 서게 되면 요령이 생겨서 설교준비 등 많은 부분을 말의 기술로서 넘어갈려는 태도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셋째는 핑계(합리화)입니다. 지식층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출발하여 자기에게 모든 중심을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기 보다는 사회 환경적 요인에 문제를 떠넘기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이중적 태도로서 자기는 살 수 있으나 남은 죽일 수 있는 일입니다. 힘없는 자는 지식에 대해 어느 정도 경외심을 갖기 때문에 강자의 논리 속에서 자신이 하루 하루 죽어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자기 합리화는 남을 죽입니다.


넷째는 피곤함입니다. 현대사회는 너무나 바쁘게 지나갑니다. 모임이 너무 많습니다. 볼 것이 너무 많습니다. 수많은 뉴스를 보아야 하고 사회, 문화, 스포츠, 연애, 막대한 분량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관계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생계와 관련된 것이기에 자유하지 못하여 늘 피곤해 합니다. 문제는 주일날도 피곤하다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유 안에 거하면 기쁘고 즐거워야 하는데 피곤하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너무 바빠서 피곤하다면 자기의 시간의 순위를 정하여 만남을 줄여야 합니다. 감당할 수 없다는 피해야 합니다. 아니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많은 문제점을 해결해야만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누구에게나 자람에 있어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아픔에 대하여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 성장통을 앓고 있는 수백만의 사람을 인도해 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겨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성장통을 앓고 있다고 그냥 지나칠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우리는 옆에서 든든한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늘이 되어야 합니다. 수수방관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너무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해 것 그것을 빨리 알고 채워주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주지 않아도 될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 순간에 그는 구원의 손길을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의 정서입니다. 은근히 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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