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어저나 2009. 9. 12. 12:02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 고전 1 : 27 ~ 28 )              ( 2009. 9. 13 )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인천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 가운데 누가 과연 먼저 한국 땅에 상륙했을까?” 왜 이런 질문이 만들어졌을까요? 조선에 대한 선교에 주력한 선교단체는 지금처럼 선교단체에 의해 이루어지보다는 각 나라의 교파 중심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분할 정책에 의해 평안도 경상북도 지역에는 미국 북장로교회(장로교 합동, 통합), 부산 경남 지역은 호주 장로교회(장로교 고신), 전라도 지역에는 미국 남장로교회(장로회 개혁), 충청도 강원도 남부 지역과 경기 일부 지역에는 미국 북감리교(감리교 , 성결교), 강원도 북부 지역은 미국 남감리교회, 함경도 지역은 캐나다 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선교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교회가 지역별로 교파가 형성된 것은 이런 연유 때문입니다. 대구 지역에는 장로교회 월등히 많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를 크게 둘로 나누면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입니다. 물론 순복음교회가 70년대에 선풍적으로 성장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지만 ‘장자 교단’ ‘모 교회’라고 자부하며 역사 신학적 논쟁을 버리는 것은 소모적인 것 같습니다. 처음 질문에 인천에 도착한 두 선교사 중 언더우드는 미국 장로교에서 파송한 사람이었고 아펜젤러는 감리교에서 파송한 선교사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파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성경번역에 있어 ‘하나의 성경’을 사용하기 위해서 ‘성경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지금의 ‘대한성서공회’의 모태를 이루게 했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의 성경을 사용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감리교, 장로교라는 교파적 차이 때문에 갈등하지 않고 “선교 중첩과 불필요한 경쟁을 피한다.”는 원칙아래 선교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훗날 천국에 가서 아펜젤러, 언더우드 두 분을 만났을 때 “두 분 중에 누가 먼저 조선 땅을 디뎠습니까?”라고 물어 본다면 그들은 그 물음에 대하여 웃음으로 즉답을 회피하리라 생각합니다. 더 강하게 답변을 요구하면 “둘이 함께 왔지”라 말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두 분은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독점이 아닌 나눔으로 한국 개신교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한국 교회의 장자교단은 누구일까요?, 한국 최초로 세워진 교회는 어느 교회일까요?(소래 교회),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는 누구일까요?(토마스), 이런 문제는 역사학자들에는 소중한 문제이고 우리에게도 소중한 문제이지만 이것 때문에 자신의 교단 우월주의 빠진다던지 선교의 본래의 정신을 잊어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한국 개신교 초기의 선교사들은 자신의 생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하나님께 모두 바쳤으며 짧은 생을 마감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들의 소중한 헌신위해 한국 교회는 성장해 왔으며 우리 또한 선교지로 선교사를 파송할 때 교파적 경쟁심이나 우선 의식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함으로 매진하길 바랍니다.


한국 교회의 최초의 목사는 누구이었을까요?

저는 장로교에서 자랐고 총신대학원에서 공부했습니다. 저는 장로교이외의 교회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장로교회에선 안수 받은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이기풍 목사님을 한국 최초의 목사님이라 알고 있었으며 그렇게 가르쳐왔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폭을 넓혀보니까 한국의 최초의 목사는 평양 신학교의 7명이 아니었습니다. 이 7분은 엄밀히 말하면 장로교 최초의 목사님이었습니다. 최초의 개신교 목사는 감리교 계통의 김창식, 김기범 목사님 이었습니다. 이분들은 1901년 5월 14일 날 서울 상동교회에서 안수 받으셨습니다. 길선주 목사님 외 6명보다 6년이나 앞선 때 이었습니다.

 

김창식이(Kim Changsiki(y)

1901년 5월 14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미감리회 조선 선교회 연례회에서 ‘집사목사’(오늘의 준회원 목사에 해당) 안수를 받은 김창식과 김기범이 주인공들이었다. 김창식은 1924년 정년 은퇴할 때까지 영변, 수원, 해주 지방을 돌아다니며 125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48군데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그는 한 곳에 머물러 장기 목회하는 장기목회보다는 ‘순행’ 목회자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조선의 바울’이라는 명칭을 부쳐 주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김창식이’가 된 연유는 그가 처음 선교사 집에 소개되어 왔을 때 그의 주변 사람들이 “어이, 창식이!”라며 불렀는데 선교사들이 그의 이름을 ‘김창식이’인 것으로 착각하고 표기할 때 ‘i, y'를 첨가하여 넣었습니다. 김창식은 굳이 그것을 빼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천한 신분인 ’머슴‘이었는데 자신의 낮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가 은혜의 자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여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롬 12:16) 그는 말씀을 바르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선교사 집에 위장 취업

김창식 목사님은 황해도 수산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농촌에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음을 알고 열다섯 되던 해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몰래 가출했습니다. 가진 것도 없는 배운 것도 없었던 그는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남의 집의 머슴살이, 마부, 지게꾼, 장돌뱅이 등 밑바닥의 일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15년을 떠돌아다니다가 스물아홉에 박씨 성을 가진 여인과 결혼하고 서울 남대문 안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흉흉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조선의 아이를 데려다 지하실에 가두어 놓고 하나씩 잡아먹는다더라.” “예쁜 애들은 밤에 끼고 자고, 싫증나면 자기 나라에 노예로 팔아  넘긴다더라.” 이 소문은 1888년 여름  3년 전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우고 고아와 가난한 집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선교활동을 전개할 무렵 수구파들이 퍼트린 헛소문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학교와 병원이 문을 닫고 종교 집회도 중단되는 선교의 절대 위기였습니다. 이를 ‘영아소동’(baby riot)이었습니다.


김창식도 이 소문을 듣고 분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 선교사집에 취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침 선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올링거(F. Ohlinger) 선교사집에 ‘행랑아범’이라 불리는 하인으로 위장 취업했습니다. 올링거는 성실하게 일하는 김창식을 ‘요리사’로 승진시켰는데 그는 주인집의 내실까지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으나 그가 기대하는 만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를 양반과 같이 동등하게 대해주었으며 그에게 사랑으로 대해주는 모습에 마음이 바뀌어 집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올링거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그는 전도에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1893년 의료 선교사 홀(W. J. Hall)과 함께 짝이 되어 평양에 선교지를 개척하였습니다. 당시에 평양 관찰사 민병식은 평양에 기독교 확산을 막으려고 기독교도 체포령을 내렸는데 장로교인과 감리교인 10여 명이 투옥되었습니다. 민병식은 이들에게 배교를 강요하고 매질하였으나(평양 기독교 박해 사건) 미국공사관에 알려지고 미국 공관에서 조선 정부에 항의하자 정부에서는 기독교인을 풀어주고 배상금을 물었으며 관찰사는 좌천되게 되었습니다. 김창식은 매질에 반죽음이 되어 나왔으나 오히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평양 관찰사의 위세도 선교사와 기독교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 러일전쟁 중에서도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교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도를 계속하면서 신학회에 들어가 정식 목회자 수업을 받은 후 1901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머슴에서 시작하였지만 신분의 차별을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신분이나 빈부의 차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약하고 가난하고 힘없고 병든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진심으로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아봄으로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이름이 널리 전파되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 그의 제자 되는 삶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이 땅에 잃어버린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영광을 받는다면 하늘에서의 상급은 없어질 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존귀케 됨을 위하여 현재의 나를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삶이어야 합니다. 저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지식이 온전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 깊이 있게 깨닫게 됩니다. 지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삶에 적용되지 아니하고 비판과 변명과 자기 합리화의 방법으로 사용되어진다면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합니다. 바울도 고백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8~9)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음이요 그 믿음은 하나님께로서 난 의임을 믿습니다.


복음은 신분을 초월하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나의 지식이 나의 의로움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게로서 난 의라야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약한 자를 더 돌아보셨습니다. 한국사회는 학력이 많이 높습니다. 그런데 학력이 높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다 드린 사람들을 더 많이 사용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을 삼으시는 줄 믿습니다.


고전 1장 27절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여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의 관점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관원들과 부한 자들과 레위지파인 성직자들의 죄과를 지적하며 그들에게 심판을 예고하였고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도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지적하시고 그들에게 화가 임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실제로 기원 후 70년 경에 유대의 성전과 예루살렘은 완전히 훼파되었습니다.


한국 교회 초대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었으며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권력자와 부한 자와 지식을 가진 자를 사용하시기도 하였지만 권력 밖에 있던 사람들 노비, 여자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양반도 노비도, 남자도 여자도 다 하나였습니다. 단지 그들이 중심이 어디에 있는 지를 보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이들을 세우시고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고전 1장 28절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그가 무슨 큰 일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우상을 만들던 사람이었으며 그 또한 굉장한 부를 소유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이 믿음을 하나님이 온전하게 받으셨습니다. 이방 여인 룻을 보십시오. 그녀가 가진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녀는 오로지 신앙고백 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그녀가 가진 것은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 고백이 다윗왕가의 사람이 되고 예수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복음은 차별이 없습니다. 복음에 차별이 생긴다면 그것을 하나님이 그냥 보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최초의 목사가 머슴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광장이 크게 다가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우리 교회도 역시 크지 않고 여건도 좋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무엇이 채워져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갈망,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열정,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사회의 약자에 대한 우리의 사명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 교회를 강하게 그리스도의 군사로 만드시는 줄 믿습니다.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주님의 용사되어 살아간다면 이 공동체를 하나님이 크게 세우시며 마지막 때에 크게 들어 쓰시리라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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