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부자와 하나님 나라

어저나 2009. 9. 20. 20:52

부자와 하나님 나라 ( 막 10 : 17 ~ 29 )                    (2009. 9. 20)


돈 버는 재미를 느껴본 적이 있나요? 은행에 내 돈이 차곡차곡 쌓일 때마다 느껴지는 기쁨이란 말할 수 없습니다. 어릴 적에 가정 부업이 있었는데 아이스크림 봉지를 불로 달군 쇠로 한 장씩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거 100장 해야 정확히 모르겠지만 라면 한 봉지 값도 안 된 것 같습니다. 방송에 나오는 것이지만 봉투 붙이기였습니다. 밤에 어두운 전등 밑에서 온 가족이 함께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어렸지만 돈이 들어온다는 사실에 힘든 줄 모르고 했습니다.


저는 어른이 되면 부자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추석이나 명절이 되면 어른들은 어김없이 용돈을 주었습니다. 어른 지갑은 도깨비 방망이였습니다. 근데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 지갑이 잘 열리지 않았습니다. 곤혹스러운 자리는 피하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정직하면 돈을 모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 합리화가 교회 속에서도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거리입니다. 예전에는 교인들 끼리 ‘계’ 모임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의 문제로 교회가 갈라지고 싸우는 일도 있었습니다. 교회들 상대로 ‘다단계’도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간의 이자놀이, 돈을 착취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딸과 밭 한 마지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부가 봄이 되어 소와 말에 쟁기를 메어 밭을 갈려고 하자 제사장이 와서 “모세의 법에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신 22:10) 했으니 그렇게 하지 마라.”하고 명령했습니다. 후에 과부가 씨를 뿌리려 하는데 제사자이 또 와서 “네 밭에 두 종자를 심어 뿌리지 말며(레 19:19)라고 했으니 주의하라”하고 갔습니다. 추수하려고 하니까 제사장이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곡식 단)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신 24:19) 그리고 참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며(레 19:9)라고 했으니 명심하라고 했습니다. 타작 때가 되어 제사장이 와서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잠 3:9) 그리고는 강제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거두어 가 버렸다고 합니다.


과부는 결국 밭을 팔아 버렸고 그 돈으로 함수 양 두 마리를 사서 목축을 했습니다. 그 양들이 새끼를 가지자 제사장들이 와서 “너는 우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라.”(신 15:19) 털을 깎은 때에는 “너의 처음 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너의 처음 깎은 양털을 네가 그에게 줄지니(신18:4) 이 양털은 내 것이다.”하고는 양털을 다 가지고 갔습니다. 기가 막한 과부는 “그러느니 차라리 내가 이 양을 잡아먹는 게 낫겠다!” 하니까 제사장이 “그런 경우에는 율법에 제사장들이 백성에게서 받은 응식이 이러하니 곧 드리는 제물의 우양은 물론하고 그 앞 넓적다리와 두 볼과 위라 이것은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신 18:5) 라고 했으니 그렇게 하시오”라 했습니다. 이에 과부는 “양을 죽인다고 해도 당신들을 피할 수 있다면 양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오늘날에도 권력을 가진 자들은 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채워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중들은 “법보다 주먹이 앞선다.”라고 말하는 가 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에 보면 축복과 저주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축복이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부자 중 관심을 끄는 사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욥입니다.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암나귀가 오백이요 종도 많이 있었으니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말합니다. 그는 사단에 의해 시험을 받습니다. 모든 소유를 일시에 잃어버렸으며 10명의 자식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사온즉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시험 후에 두 배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내 것이라고 소유에 집착하면 절대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둘째, 아브라함입니다. 그 역시도 처음에는 부자가 아닌 듯합니다. 그 아버지가 우상을 제작하며 살아 갔는 것을 볼 때에 하지만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 했을 때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축복을 받습니다. 조카 롯과 함께 지낼 초지가 부족함을 알고 둘은 제 길로 가게 됩니다. 그에게 삼백 십팔 인의 사람을 거느릴 정도였다면 엄청난 부자였을 것입니다. 그는 그래도 교만하지 않고 부로 인하여 시험당하지 않았습니다. 늦게 낳은 믿음의 아들인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 할 정도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셋째, 야곱입니다. 그는 교활하고 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형으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팥죽으로 샀었고 아버지를 속여 형이 차지 할 모든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는 야밤 도주 중에 벧엘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고 서원을 했습니다. 그는 평탄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우르에서 큰 부를 일구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얍복강 혈투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칭호를 받게 되며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이 됩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축복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이외에도 부하게 산 사람을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들은 부에 대한 탐함, 숭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섬김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부자 청년이 버리지 못한 것은 재물입니다. 자신의 소유에 대한 강한 애착이 그의 구원에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내려놓음’이라는 말을 청년들이 하고 있으며 일부의 비판에 의해 ‘더 내려놓음’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면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통하여 자신의 자유를 이루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은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벗어 버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천국을 소유하면 영생을 소유하면 부의 문제가 해결되어집니다. 소유가 아니라 나눔을 통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이 제시하신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알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앞섭니다. 우리도 예외 일 수는 없습니다.

소유냐 존재인가? 헨리 나우엔은 아마 실존적 존재에 대한 것으로 문제 해결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소유’에 집착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축복권을 물질 재물에 대한 축복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에 대한 축복보다는 영생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답변을 하고 계십니다.

  

자신이 존재에 대한 해방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고 재물의 관리자가 되면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말하는 경제적 문제는 부자의 고민의 아주 미세한 부분입니다. 여러분의 소유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 정도를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이르지 못합니다. 작은 것을 소유한 자들은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삶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존재의 물음에서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율법으로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히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다 팔아 가나한 자에게 주라“ 명하셨습니다. 그는 자신과의 존재론적인 싸움에서 실패하였으며 현실 문제에 자신을 가두어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비판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냉철히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는가? 라고 늘 되물어 가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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