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결혼은 (꼭) 해야 합니다.

어저나 2009. 8. 29. 17:30

결혼은 (꼭) 하여야 한다. (막 10 : 1 ~ 12)                 (2009. 8. 30)


결혼은 꼭 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마 자매들은 회의적 입장을 가진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어디 까지나 가정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다시 태어나면 같이 살겠습니까?” 질문하면 백에 백 남자들은 ‘다시 살겠다’ 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다른 사람과 살고 싶다’라 말합니다. 이런 말들을 때 남자들은 웃습니다. 이 말이 진정일까요?


요즘 ‘알파 걸’ ‘싱글 맘’ 이야기들이 항간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리고 잡지에 ‘싱글 맘’ 이야기가 공공연히 글로 실리고 있습니다. ‘알파 걸’은 시대적 대세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자녀를 한 명 혹은 두 명을 둔 가정은 여자에 대한 교육열도 높습니다. 어머니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여자 아이에 대한 투자를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요즘 사법고시에서도 여자들의 합격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미 교육계는 여자들이 다 장악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여자들은 사회의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자가 다스리는 세상에는 남자들도 화장을 해야 한다’란 책이 있습니다.


요즘 인기 드라마인 ‘선덕여왕’에 보면 왕이 되려하는 ‘덕만공주’와 왕후가 되어 신라를 다스려는 ‘미실’과의 한판 승부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덕만 공주와 미실의 주위에 서성이는 남자들의 초라한 모습(?)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덕만과 미실 주위에 순진 남(초식 남)인 김유신과 설원랑의 모습을 보면서 이게 신라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능력이 있으면 그 사람이 중심이 되어 다스리는 그른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남자인 제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사회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또 아들만 두 명 두고 있습니다. 이들의 삶이 평탄하게만 보이지 않습니다. 아내의 농담 중의 하나가 ‘너희들 공부 못하면 베트남 여자랑 결혼해야 되는데?’ 애들 기겁을 하죠. 결혼 안하겠다고 누가 믿겠습니까?


알파 걸은 시대적 대세입니다. 사실 조선 중기까지 대부분의 양반가들의 자제는 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결혼해서 남자들은 처음에는 처가살이를 합니다. 그러다 경제적 능력이 생기면 분가해서 살아갔습니다. 지금과 같이 여자들이 하대 받던 시기는 불과 300~400년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고려시대에도 여성이 호주가 될 수 있었고 재산도 균등 상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장자 중심의 사회로 전환되었습니다. 알파 걸의 도래를 싫어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자들의 합리적인 삶의 형태로 사회가 진보하기 때문입니다. 이전 ‘정 때문에’란 말은 사라질 것입니다. 성경을 그 시대의 문화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성경적인 가정관이라는 게 현실 사회와 동 떨어져 있습니다. 여자가 주인 되는 세상은 머지않아 올 것 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알파 걸은 시대적인 소산물이라 치더라고 ‘싱글 맘’에 대해서는 우리가 바르게 접근해야 합니다.


방송인 허수경씨가 ‘싱글 맘’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직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것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래도 사회 일각에서는 ‘소수자’의 삶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행복권, 삶의 자유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목사인 저로서는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이들을 무작정 비성경적인 사람들이기에 용서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기에는 ‘근본주의자’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해 버릴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녀가 십일조를 했습니다. 받아야 합니까? 돌려주어야 합니까?”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싱글 맘이 교회에 왔다. 받아들여야 합니까? 돌려보내야 합니까? 답이 분명한 질문 아닙니까?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지요. 그들의 구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는 엄중한 경고를 하시며 돌려보냈습니다. 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들이지만 그것이 죄라는 것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수가성의 여인에게도 다섯 명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근본적인 정체성의 문제를 남자에게서 찾아 해결해 나갈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면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해결함을 받습니다.


이제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합니다. “사람이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들의 의도가 선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 주에 엄격파인 샴마이파는“수치 되는 일”을 간음으로 보고 간음한 이유 외에는 이혼을 못한다고 하였고, 자유적인 힐레파는 무슨 조건이든(가령아내가 밥을 태웠을 때) 이혼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바리새인의 시험한 목적은 몇 가지로 추리할 수 있습니다. (1)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주의자보다 차원 높은 도덕을 가르쳤으므로(마5:27-32)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알고 싶어서 (2)이와 같은 논쟁에 예수를 끌어내어 어느 편에 가담시키려고 (3)당시 헤롯이 이혼하였고 세례요한이 이를 반대하다가 죽었으므로 예수를 같은 운명에 빠뜨리기 위해서 등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한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말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대적해 나갑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은 앞서 인용하신 신24:1-2를 들어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줌으로 이혼을 허락하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회답은 곧 저들 자신의 이혼관 이었습니다. 저들은 모세의 말을 문자적으로 취하여 이혼증서를 써주면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은 정상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완악한 것을 전재로 주신 차선의 길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본 절과 다음절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과 모세의 계명을 대립시키거나 성경을 시정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21:1의 참뜻을 밝히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을 들어 낸 것과 인간의 실제적인 죄성과 그로 말미암아 어떤 제한이 불가피한 사실과의 구별을 명백히 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은 마음대로 이혼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완악한 마음을 아시고 인간의 자율적 의지를 존중한 것입니다. 결혼의 파국에 대하여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결혼이란?

(1)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법)입니다.

하나님은 남자를 만시고 그가 외로워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필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아담이 자고 있을 때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하와’(생명)를 만들셨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바라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고 함께 있고 싶어 하고 함께 살아가고 싶어 합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은 ‘생물학적 자아’라 말합니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가 일생동안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몇 명이든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결혼 한 사람들에게도 남자 친구, 여자 친구 두는 것은 당연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이 충만하게 되면 내 자신의 내면에서 온전히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는 순결한 영이 내주하게 됩니다. 성령님이 내 자신의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원래 완전한 창조물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외형적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요즘 저는 간혹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참 기뻐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어떤 생명체보다 더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 저는 남자이기에 여성의 미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보면 볼수록 신비롭니다. 신체의 모습이자, 생각하는 방법, 말투, 마음가짐, 표현 방법이 저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때론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들기도 하지만 조금씩 알고 가는 기쁨이 저에게 있습니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습니다. 혼자 살면 범죄하기 훨씬 쉽습니다. 저는 다 바울같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왕이면 이삭과 리브가처럼 사는 것을 권장합니다. 일부일처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찌 할 수 없지만 특별한 부름심이 없다면 빨리 결혼을 했으면 합니다. 노후를 생각해서도 20대 후반에는 결혼을 해서 30대에 안정된 가정을 바탕으로 자신의 맡은 일들을 잘 이루어 같으면 합니다. 지금은 한 말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제 생각입니다. 결혼을 하되 빨리하라는 것은 제 생각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2) 결혼의 원칙

 1)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성인이 되어 독립하라는 말씀입니다. 결혼에서 실패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독립된 자아로 서지 못해서입니다. 결혼을 하려면 다른 그 무엇보다 자신이 결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살펴보고 자신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부모가 책임지는 것은 한도가 있습니다. 결혼 하면 부부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가정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결혼 제도의 장점이자 문제점 중의 하나가 결혼이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니라 두 집안 간의 결합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이혼을 막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특히 아내에게는 큰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집안의 예법과 풍속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집안의 예법과 풍속을 중시하여 완전히 새롭게 다른 집안의 예법과 풍속을 배워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중간에 서서 부부는 서로 집안의 예법과 풍속을 자세히 설명해 주어 갈등을 방지해야 합니다.


결혼해서 양 집안에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는 것 보다는 부부가 합심해서 해결해 보고 정말 어찌할 수 없을 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경제적 도움을 준 쪽에서 언젠가는 그 도움에 대한 답례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로 인하여 갈등을 겪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아 왔습니다. 부부는 완전한 인격체로 거듭나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의지력이 생겼을 때 결혼을 해야 합니다. 나이 때문에 부모의 권유에 의해서 친구들과 비교되어서 사랑의 상처 때문에 ... 극복이 되었을 때 배우자를 만나십시오. 하나님은 분명 ‘그 부모를 떠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일심동체입니다. 여기서 부부가 육체적으로 연합함과 동시에 인격 대 인격이 하나로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성관계만으로 부부의 생활이 지속된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성욕을 제어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여성들처럼 생리학적인 주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한 순간 불일듯이 성욕이 일어납니다. 자칫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내 몸을 사랑하여 결혼했나라고 생각할 수 도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남자들도 자신의 성욕을 충분히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최소한 서로의 몸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 사람의 인격을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성에 있어서는 서로의 의사표현이 충분히 전달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은밀한 충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해결되어야 가정이 더욱 돈독해져 나갑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최대한 아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성은 연약한 그릇에 비유합니다. 남자는 울타리여야 합니다. 저는 가끔 수사자의 일생을 보면서 저의 인생을 그려갑니다. 암사자가 사냥해서 만들어 놓은 음식을 먹지만 더 강자가 등장했을 때 모든 것은 둔 채로 미련 없이 떠나야 하는 삶 말입니다. 


한 몸의 비밀은 결혼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이것은 매우 신비로운 비밀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이것에 자유한 자만이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내 육체가 썩어 없어지는 것이기에 마음껏 사용해도 된다는 생각은 모두 쾌락주의에서 나오는 생각들입니다. 우리는 금욕주의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결혼이라는 관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랑의 통로를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또한 자녀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인격 장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특히 결혼을 통하여 자신의 인격 장애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만을 계속 이야기하다가 지친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내 아내는(남편은) 나에게 관심도 없고 내 말을 듣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가만히 상대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역시도 답답해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일방통행의 전달식의 방법으로 사는 것도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말하고 그리고 난 다음 비난의 화살을 돌리십시오. 일이 다 끝나고 난 다음 시비를 걸지 말아야 합니다. ‘난 무엇을 원한다’라고 분명하게 전해 주십시오. 그래야 원하는 것을 해 줄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해 주겠지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남자들은 무엇이 여자를 기쁘게 해주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성급한 결론은 싸움을 격화시킵니다. 상대방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 자기편을 만들어야 합니다. 당연히 결혼 했으니 내편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자기의 의사전달이 안 이루어지면 둘 다가 힘듭니다. 자녀들도 그럴 때 힘들어 한다고 합니다.

 

3)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입니다.

자신에게 준 배필이 내 의지에 의하여 내 힘에 의하여 혹은 가족들의 권유에 의하여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나의 결혼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거룩한 삼각형’ 하나님을 앞에 두고 부부는 평등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사람이 허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만든 것은 사람이 허물 수 없습니다.


결혼 할 때 분명 상대방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중한 존재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서로를 파멸시키려고 만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우연을 좋아합니다. 그 우연을 몇 번 겪고 나면 그것을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는 우연이 아니라 우리를 만나게 해 주신 데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혼의 중심에 하나님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4)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이 만나게 해 주심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헤어지기를 바라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간혹 비극적 종말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마치 운명의 주인공인양 헤어짐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 드라마 때문입니다. 미화시키고 과장시키고 마치 자신이 그 속의 주인공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드라마는 영화는 현실이 아닙니다. 비극적 종말 뒤의 슬픔이나 아픔은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정해체 다음에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을 보아 왔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자녀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압박감입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가정의 소중함을 체득해 나갑니다. 아이들은 어느 한 쪽을 상실했을 때의 그 상실감을 느끼면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장 큰 피해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말하려 들지 않습니다. 슬픔입니다.


사람들의 손에 내 가정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가정을 의탁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가정의 행복만을 추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남의 행복을 위해서 내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 이혼 문제입니다. 성경은 이혼에 대하여 부정적이지만 어느 부분 허락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불신자와의 삶에 대해서는 이혼을 허락하고 있습니다.(고전 7:15)  


결론 

이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설명해 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남편이든 아내든 버리지 말라는 말씁입니다. 이것은 간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결혼 인간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통로입니다. 나를 통하여 상대방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중요한 제도입니다. 그리고 자녀를 보내주시고 그를 통하여 작은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게 통로입니다. 소중함으로 만들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