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우리들에게 필요한 세례

어저나 2009. 12. 23. 10:38

우리에게 필요한 세례 ( 막 1 : 1 ~ 13 )                     (2009. 11. 22)


세례는 예수님이전에 동방에서 정결케 하는 예식으로,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예식으로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사해문서가 발견되면서 기원 전후에 등장했던 엣세네파에서도 구성원의 성원의식으로 행해졌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기에 그를 엣세네파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나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보아도 세례요한과 엣세네파와는 관련이 없는 걸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가장 큰 근거는 세례요한은 알려진바 헤롯의 죄를 탓하고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민중들의 추앙을 받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공동체를 떠나 비밀스러운 공동체 생활을 했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없습니다. 그는 분명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자로 성경이 밝히고 있습니다.(막 1:2~3)


성경에 세례가 등장하는 것은 세례요한 때부터입니다.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세례에 동참하는 것은 그 시대에 세례는 익히 알려진 예식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정결케 하는 예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세례를 베풉니다. 그의 세례는 죄사함을 촉구하는 회개의 세레를 선포함니다. “세례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계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그는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정을 깨닫고 죄를 자복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분명히 자기의 정체성을 밝히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자신은 오실 메시야를 준비하는 자임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

그에게 그가 기다리던 일이 일어납니다. ‘메시야’, ‘하나님의 어린 양’이 그에게 세례를 받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그가 바라고 기대하던 메시야, 구속주였습니다. 그는 거절하였으나 예수님은 그에게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는 순간 새로운 시대가 열려집니다.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더라.” 회개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의 임재하심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바로 성령세례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세례는 죄를 자복하고 용서받는 통로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가 열리어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임재입니다.


오순절 이후

에수님도 지상 사역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 역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였습니다. 그의 약속대로 오순절 날 놀라운 성령의 임재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단순한 회개의 세례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 있는 권능의 세례를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한 임재가 있고난 후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설교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 베드로와 그의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이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 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세례에 죄사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축복이 있을 것임을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권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루질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 오늘 우리에게도 있을 것임을 확실히 믿습니다.


베드로의 죄사함의 설교와 세례가 있은 후 사람들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 말을 믿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죄를 자복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해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두려움 없이 주님만을 온전히 섬길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강력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다 있어야 사람들이 거듭남을 통하여 새로운 능력의 세계를 경험하며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널리 증거할 수 있게 되어집니다. 세례가 외형적 표식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생활에도 동일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많은 부흥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이들이 세례를 통하여 거듭남을 경험했으며 신앙의 축복을 경험했으며 믿음의 놀라운 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는 오늘날에도 많은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오늘 우리에게도 항상 나타나기를 기원합니다.


첫째, 세례는 형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믿음 생활이 외적인 형태로 흘러가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이 회심의 시간을 잠시 가지며 회개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신앙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인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신앙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교회의 원리나 조직을 배우는 시간일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강건해져 가며 세워지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 받은 사람을 이제 막 자란 성인으로 생각하고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을 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어야 합니다. 그가 진정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에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하여 올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고넬료 가정에 있었던 놀라운 일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방인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그들에게는 성령의 세례가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아 가정 모두에게 세례가 베풀어졌습니다.


빌립보에서 일어난 일도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란 말씀에 간수는 변화되어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마 그 중에 어린이들과 유아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둘째, 세례는 기독교 공동체의 기초입니다.

에베소서 4장 5절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다.” 우리 공동체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것에 세례가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명령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는 한번이면 족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가톨릭의 영세를 인정합니다. 그들은 입교의식으로 교회의 교인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교회의 성원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면 기독교 공동체는 무너집니다.


셋째, 세례를 통하여 성령님의 실재성을 늘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신비주의자가 되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제 삶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시대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서 강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고 고백하는” 순간 황홀한 고백의 순간 나를 적시는 감동의 물결을 경험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살아계심을 내안에 내주하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공통으로 고백하는 것은 ‘회심’입니다. 그 회심과 함께 성령의 강력한 힘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죄 때문에 고통스러운 순간을 보내고 난 뒤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하여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늘 찾고 갈고 하던 영생수는 바로 생수의 강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도 갈하지 않는 영생수를 찾아서 교회에 와 있습니다.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함께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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