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나를 죽일까? 살릴까?

어저나 2009. 11. 14. 18:24

나를 죽일까? 살릴까? (선택권) ( 행 16 : 30 ~ 31 )         (2009. 11. 5)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기도와 찬송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어, 성령의 능력 안에 있을 때 여러분 또 다른 자신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변화, 발견, 발전, 강화 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며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말씀에 바울과 신라가 기도하고 찬미하매 홀연히 큰 지진이 일어나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6절) 빌립보 감옥에서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이 사건은 감옥을 지키는 간수에게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간수는  당장 죄수들이 다 도망치고 자기들은 그 책임에 따라 처벌 받게 되리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간수는 검을 빼어 자결하려 했습니다. 아마 그 당시의 법에 간수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며 그 책임을 자기가 담당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소설로 이 말씀을 보면 반전에 반전의 클라이막스(정점)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환상으로 시작된 유럽선교의 시작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아시아에서 성령이 말씀전함을 허락하지 않고 시작된 유럽 선교의 시작은 루디아를 만나게 해 주시고 선교는 쉽게 진행되는 것 같아 보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되자 귀신들이 괴로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물러나는 능력이 행하여졌습니다. 이로 인해 이 여인을 통하여 장사를 하고 있던 사람의 고발로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련의 사건 속에 개입하였고 간수의 구원 계획을 준비하셨을 뿐만 아니라 간수 한 사람의 구원이 아니라 그 가족 전부와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공동체 모두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미 고넬료 가정에서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넬료 뿐만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성령으로 세례 받았으며 성령 세례 받은 그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어주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간수의 가정에서도 세례가 행해졌습니다. 당시 세례는 구원의 징표입니다. 


이 사건의 정점은 간수의 선택에 있습니다. 그가 죽었다면 그와 그의 가족과 그의 집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살았기에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요즘 항간에 ‘롤러코스터’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남녀의 생활 탐구를 통하여 남녀 간의 삶이나 행동의 차이를 탐구하는 시리즈를 통하여 너무 잘 묘사하고 있어 많은 부분에 동의를 합니다. 그리고 인생극장에서는 두 사람의 한 순간의 선택이 인생에 있어 10년 후에 어떻게 변해 있는 지를 극화시켜 놓고 있습니다. 다분히 흥미를 유발시키려는 의도는 강하지만 한 순간의 선택이 인생의 큰 변환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전에도 ‘그래 결심했어’M방송국에서 15년 전에 했던 것을 패러디 했다는 인상을 주고 있지만 흥미차원에서 볼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들이기에 다들 자신의 앞날을 보고 싶어 합니다.

간수의 선택

우리는 성경을 보면 결과를 알고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몇 번 읽고 나면 흥미를 잃어버리기 싶습니다. 특히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식상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신앙인은 성경의 이야기를 단순한 ‘이야기(story)'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와 행과 행 사이에 숨어 있는 ‘메세지’를 발견하고 신앙을 성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간수는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선택은 믿음의 사람들로 인하여 실패했지만 그에게는 무한한 은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성공과 실패 속에서 ‘일희일비(一喜一悲)’ 합니다. 오늘 신문에도 ‘두산’가의 오너였던 분이 ‘자살’했다는 보도를 신문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삶의 어려움이 없을 것 같고 사회적 지위도 있을 수 있는 분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에 대해 삶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궁지에 몰리면 누구나 극단적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중에도 비극적인 최후를 미화시켜 보려고 ‘자살’을 생각해 본 사람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아주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궁지에 몰아 넣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에 여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자신의 선택이 영원히 죽을 수도 있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많이 바뀌어졌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사회가 전개되기 전에는 ‘자살’을 분명히 악한 것이라고 많은 신학자들이 동의 했습니다. 그리고 다원화 사회가 급진전 되면서 ‘자살’‘사회적 타살’이라는 틀 속에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에 대학가에서는 사회 민주화를 지지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분신’을 했으며 그들은 ‘열사’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불의에 대한 항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선택이 옹호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분명히 반대했습니다. 십 수년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사회적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인한 ‘자살’을 접하게 됩니다. ‘우울증’ 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자살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OECD국가 중에서 한국 자살률에 있어 1위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는 유교적 가치관에도 상반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사회적 타살’이라는 명목으로 자살을 어느 정도 인정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병’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많은 부분 동의를 할 수 있으나 원론적으로 먼저 이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재로 시작해야 합니다. 예외적인 것들이라 해도 인정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자신을 자신이 그 형상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이 지은 존재이며 우리의 속에 성령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임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자기의결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셋째,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이 같이 소중한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신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이 경솔하게 행동했다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지만 최소한 그리스도인이라며 그 영혼에 대한 아픔은 인정하고 남아 있는 자들에 대한 슬픔을 인정하여 공개적으로 인신공격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에 대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 우리가 논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말 합니다. 원론적으로 자신을 해하는 어떠한 행동도 정당화 될 수 없으며 받아드려져서도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간수에 대한 바울의 선택

바울과 신라는 기도하고 찬미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발에 쇠고랑이 풀어졌으며 감옥 문이 열려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충분히 혼란한 상황에서 탈옥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고통 속에서 구원해 주는구나!’라고 생각하며 기쁨으로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바울은 상황을 본 것이 아니라 ‘간수의 생명’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풀어져서 해방되었다는 기쁨보다는 자신을 지키는 간수가 칼을 빼어 자결하려는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울은 탈옥이 우선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죽음으로 모든 인류가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삶에 있어서 생명을 존중하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도 한 쪽 편 강도의 생명을 귀히 여기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시면서 그의 영혼을 긍휼이 여기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람을 구원했는데 그의 육체적 구원과 영혼의 구원을 동시에 이루셨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선택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요즘 읽는 책 중에 ‘전혜린’에 대한 평전을 읽고 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망설였던 책 중에 하나였습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독일의 뮌헨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가 다녔던 서울대학교 독일어 교수로 이화여대 성균관대 교수로 당대에 천재라 불리우던 그녀는 서른하나에 생을 마감합니다. 불안과 고독이 그녀의 삶을 감싸고 있었으며 하루에 커피 스물다섯 잔과 세코날이라는 수면제에 의존하고 알코올에 의존하던 생을 자살로 마감합니다. 1960년대 세인들에게는 큰 관심거리일 것이고 흥미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슬프게 고독한 삶을 살아간 여인, 자신의 본능과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 그리고 사랑에 대한 무한한 욕구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오늘날 사회에는 ‘전혜린’과 같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에 빠져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그들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시대의 흐름으로 사회의 변화 때문에 어찌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불안과 고독이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속에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바울과 신라처럼 방관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자가 되어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시급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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