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주여 나를 보내 주소서

어저나 2009. 12. 23. 10:46

주여 나를 보내 주소서 ( 사 6 : 1 ~ 13 )                   (2009. 11. 29)


마가복음 1장 1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기사를 빼놓고 복음의 시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강절(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거리마다 교회마다 가정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교회는 ‘성탄절’과 ‘부활절’이라는 큰 절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선물을 기다리고 청소년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행사를 준비하며 추억거리를 준비할 것입니다. 청년들은 연인 만들기에 주력하지 않을까요? 가정의 부부들은 아이들의 선물을 준비하며 한 해 살림살이를 정리하겠지요? 중년이 된 저희 부부는 이제 연례행사의 일부분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오히려 손자 손녀들의 선물을 준비하며 옛 생각에 빠져 들지 않을 까요?


그르면 그리스도인들의 ‘성탄절’은 어떠해야 할까요? 어디에다 초점을 맞추어 가야 할까요? 아직 생각을 별로 안하신 분들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고요? 이제 이틀이 지나면 11월이 끝나고 12월이 시작된다는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바쁜가요? 저도 달력을 보면서 한 순간 놀랐습니다. 어제가 ‘추수감사절’이었는데 벌써 12월이 시작되는구나! 제가 아마 형제 자매님들 보다 한 몇 주 앞을 보고 살고 있지 않을까요? 12월이 되면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 역사를 바꾼 대역사적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인간이 되새서 사람 세상에 오셨다는 것 자체는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일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꼭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셔야 했는가? 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놀라기도 하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탄생 이야기’에 또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는 무모한 사람들을 볼 때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날짜에 맞추는 오로지 그 사건에만 주목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탄생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지에 대하여 깊이 있게 묵상하는 대림절 기간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소모적인 논쟁에 휘말리지 말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복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복음의 실체가 그의 세례 받음으로 확증되고 사람들의 삶속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이 복음에 기초해야 하며 복음의 삶을 통하여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왕국을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다 이기시고 난 뒤에 4장 17절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시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선포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받게 되는 것도 ‘하나님 나라’ 운동에 앞장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정치적 왕국과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 되시고 다스리시는 참된 왕국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왕국)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눈먼 자들이 보게 되고, 걷지 못한 자들이 걷게 되고, 듣지 못하는 자들이 듣게 되며, 귀신들의 억눌림 속에 있던 자들이 해방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나라였습니다. 세상의 나라에서 해결되어지지 않는 일들이 해결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 ‘복음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런 나라를 사모하며 꿈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에게 수많이 설교하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 그 나라가 멀리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가 네 안에 있다고 말씀하고 이미 임하였다고 말씀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했으며 죽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을 믿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중에 임하여 있음을 믿습니까? 말로만 아니라 믿음으로 고백하고 그 나라가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이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여러분의 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환경과 여건 때문에 방법의 차이가 있다할지라도 인정하면서 같이 살아갈 수 있습니까? 전 지금 여러분에게 심각하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병든 자들이 낮게 되며, 많은 자들이 고통에서 해방되며, 억압과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며 주께 돌아오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주위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가신 이후에는 복음이 선포되고 역사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복음이 선포되면 받아들이는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면 지금의 나라와 혼동하기도 하고 교회를 마치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전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곳에 머물러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람이 움직이듯 이동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천년 만년 지낼 것 같이 건물을 지어올리고 하나님께 봉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곳에 복음이 떠나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떠나면 그 건물도 다 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소아시아의 교회를 생각하십시오. 지금 서구의 교회를 보십시오. 하지만 중국의 교회, 동남아시아의 교회를 보십시오. 들 불과 같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제 바뀌어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인간들의 완악함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선포하고. 치유하는’ 3대 사역을 강담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가르치는’ 사역에 집중하셨습니다. 그 결과 12명의 제자 그룹이 형성되었습니다. 가르침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7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그 곳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지에 대하여서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유를 다 풀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다 흩어지고 난 뒤 그의 제자들에게만 자세히 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예수님은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왜 그르셨을까요? 그것은 ‘마음의 완악성’ 때문입니다.


노아 홍수의 원인도 사람들의 완악성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이사야 선지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사 29:13) 이 결과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도덕적 정결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그들은 율법적 의무를 철저히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가장 큰 적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막았으며 복음의 확산을 봉쇄하려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이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칸트를 생각해 보십시오. 칸트는 인간의 선에 대한 축복으로 천국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지기를 통제하며 선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이든 자신의 의로움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향하여 책망한 내용이 나옵니다. 율법적 성결을 말하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죄를 인정했다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하며 합리화를 시도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실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드러나는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욥은 고난 속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욥기 1장 21절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본래의 모습의 발견을 통하여 마음을 정결케 하여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아담 범죄 이후 세상은 별로 변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인간의 완악성, 죄에 관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물질문화는 급속도로 변화해 왔습니다. 거기에서 파생되는 관념적인 것, 의식적인 것들은 죄로 물들여져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살고 있던 유다는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진멸하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시어 그들 중의 의인을 구원하시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민족 중에 택정함을 받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이사야를 택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나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나님은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하나님은 그의 부정한 입을 정결케 하여 주셨습니다. 이사야는 주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첫째,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 주소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정함이 있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간청해야 합니다. 우리들도 죄악덩이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면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기도할 때 세상은 죄로 관영하였고 하나님을 부정하며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악할 뿐이라고 합니다.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교회에서 기도합니다. 그것이 끝이 아님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세상의 불의와 악함을 지적할 선지자의 영성을 가진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정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의 사역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이것이 죄와 맞서서 싸우는 그리스도인의 용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사망에 대하여 이기셨습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에 우리도 죄와 사망에 대하여 이긴 자기 되었습니다.


우리는 평화주의자가 맞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의 평화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불의에 대하여 항거하셨으며 죄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 땅에 화평을 주러 온 줄을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로 왔노라.”라 말씀하셨습니다. (마10:34) 불의와 맞서 싸울 때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용맹스럽게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복음의 진전을 위해서는 강하게 맞대응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용사로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는 사람들 간의 갈등도 이겨내야 합니다. 어느 사회이든지 온건주의자(비둘기파)와 과격주의자(매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그룹 중에도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대표적인 과격주의자였습니다. 우리는 ‘평화’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민족은 평화의 민족이어서 흰옷을 즐겨 입었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구려 이후에 대륙을 한 번도 침략하지 않았다. 평화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라고 교육 받았습니다. 그런데 좀 씁씁하지 않습니까? 온 국토가 침탈당하고 여자들이 유린당하고 아이들이 죽어가는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면 침탈만 받고 사는 것입니까? 이것은 분명 아니지 않습니까? 미국은 평화를 싫어하는 호전적인 민족입니까? 이슬람은 극악무도한 야만인입니까?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것 밖에 모릅니다. 천국은 세례 요한 이후로부터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썩었다고 탄식할 것이 아니라 그곳을 변화시키기 위한 사람들로 세움 받아야 합니다. “주여 나를 보내 주소서” 내가 이 땅에 빛과 소금이 되게 하여 주소서.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의 나라는 진보해야 하며 성장해야 합니다. 이 일에 뛰어 들어야 합니다. 전략과 전술은 차후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사람이 모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가 모여야 합니다. 전략과 전술만 논의하다보면 사단의 나라만 자꾸 자꾸 커져 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약화됩니다. 먼저 헌신해야 합니다. 남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야 합니다. 옆 사람을 보고 주저하지 마시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둘째, 그루터기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거룩한 씨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게 되며 그들은 멀리 옮겨 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하나님은 유다의 죄에 대하여 철저히 심판하실 것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룩한 씨’를 남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여러분 하나님은 ‘거룩한 씨’를 통하여 새롭게 태어날 나라를 바라보십니다. 교회에 핍박이 있고 어려움이 있으며 약한 이들은 떠나게 됩니다. 환란과 핍박은 사람의 신앙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시기입니다. 사람들은 타협하기를 좋아합니다. 심지어 불의와 죄와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까지도 자신의 합리화된 잣대를 가지고 인정하고 묵인하기를 기뻐합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유다 왕국의 ‘산당’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했지만 완전히 정복하지 못해 가나안인과 섞여 살게 되었으며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삶을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며 살았고 그들은 농경민족이 아닌 유목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연스럽게 추수 이후에 농경 신에게 감사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들의 문화와 혼합되게 되었습니다. ‘산당’이 바로 이방 민족이 제사지내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소가 무슨 문제가 있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산당에서 죄사를 지냈습니다. 문화가 혼합되기 시작했고 결국은 이방신을 섬기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종교개혁을 위해 산당을 부수워 버립니다.


멸망 이후에 거룩한 씨에 대하여 주목하십시오. ‘남은 자’ 이들이 또한 새 나라를 세웁니다. 포로기 이후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들이 남은 자가 있었기에 거룩한 성전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늘 영광스럽게 돌아오는 자들에게 주목합니다. 하지만 어려움 중에서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에 대하여도 주목해야 합니다. 멸망 이후의 남은 자의 고통은 컸을 것입니다. 지도자를 잃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는 그 어려운 상황을 그들은 극복해가며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지 않고 말입니다. 우리는 현대의 도시 교회의 부흥에 주목해야 하지만 동시에 도시 교회의 성장에 그루터기인 농촌 교회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 교회의 성장이 어디서 왔는지 바르게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남아 있는 거룩한 씨들이 열매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잃어버린 자들의 회복과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증거해야 합니다. 대강절(대림절) 그리스도의 탄생을 바라보면서 그의 탄생을 전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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