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느후스단과 십자가

어저나 2009. 11. 14. 18:20

느후스단과 십자가 ( 왕하 18 : 3 ~ 4 )                       (2009. 11. 8)


강대상에 대한 이야기

요즘은 대부분의 예배당에 교파와 관계없이 십자가를 걸기도 하고 걸지 않기도 하고 있고 예배당의 강대상이 있는 곳을 누구나 올라가서 여러 모양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보수적인 장로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에서는 강대상에는 목사님 외에는 아무나 함부로 올라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전도사가 되어 설교를 할 때 세 번 정도 올라갔습니다. 대부분 집사님과 장로님들은 앞에 있는 성찬상에서만 기도나 사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교회가 예배당을 건물로 가지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교회의 성직자들이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타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는 건물 중심적이 아니었기에 어디에서나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고 사도나 설교자들은 자유롭게 설교를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갈뱅’은 강대상의 높이를 일반 성도들이 앉는 자리보다 무릎 높이 정도 높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연유는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의미에 연유합니다. 오늘날에도 장로교회는 말씀의 권위를 존중하여 강대상에 누구나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듯합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한 자매는 교회 관리집사님에게 부탁하여 매 주일마다 강대상 청소를 자기가 하겠다고 말하고 강대상을 열심히 닦았습니다. 물론 자매는 강대상을 섬긴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사모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사모로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 근원을 잘못 받아들여 강대상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희는 어렸을 때에 목사님을 ‘주의 종’이라 말해 혼이 났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사자’를 ‘종’으로 격하시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손상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강대상(강단)을 통하여 흘러나오는 말씀이 귀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대상’을 신봉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물론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사람이 평신도 중에서도 많이 배출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럴 때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강대상을 점령한다면 교회는 혼란이 빠지게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

예전에는 예수교 장로교에서 합동과 통합의 교단 구별은 예배당에 십자가를 걸고 있는지 아닌지를 통하여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합동측 교회는 강대상이 있는 곳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저도 정확한 연유를 알 수 없으나 제 생각에 십자가가 숭배의 대상, 경배의 대상이 되지 않을 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통합측 교회는 예배당에 십자가를 걸어 두었을 뿐만 아니라 강대상과 사회자 강단이 양 옆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아마 예배당에 십자가를 거는 문제 때문에 많은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교회 내에 십자가에 대해 검색하던 중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의 교회)의 사람들이 개신교를 향하여 십자가를 숭배하는 것은 이단적 행위라고 논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자체를 분명히 숭배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의미와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속해 주셨다는 것에 대한 은혜에 대하여 깊은 의미를 되새길 뿐입니다. 많은 외국의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밤에 붉은 네온사인의 십자가를 보고 놀란다고 합니다. 너무 많아서이겠지요. 얼마 전에 칠곡 홈플러스에서 옥상 주차장에서 아내가 흰 네온사인 십자를 보고서 예쁘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보았습니다. 우리들은 너무 익숙해서 십자가가 걸려 있지 않는 교회가 이상하지 교회에는 십자가가 있어야 하며 교회는 십자가 종탑을 달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교회가 기독교에 십자가에 대한 것을 우상숭배로 몰아가는 것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아무도 십자가가 자체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 설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의 주장에 대해 혼란이 없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십자가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된 것은 예배당 안에는 431년 경 부터이고 교회 꼭대기에 세우기 시작한 것은 586년 경 부터라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초대교회에서도 십자가를 사용했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문헌적으로도 2세기에 십자가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

성경은 한결 같이 십자가를 그리스도의 사역을 한 마디로 표현 할 수 있는 상징이요 은유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립보서3: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1:18)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갈라디아서5:11)


바울은 ‘그리스도의 원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는 좀 더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에게서 중심적인 메시지요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사용된 십자가의 표상을 초대교회가 넘겨받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정입니다. 더욱이,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이 죄인의 형틀을 자신들의 구원의 상징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비난과 정죄를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왜 십자가를 상징으로 사용합니까?

그것은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사역과 생애를 한 마디로 응축하여 표현하는 최고의 상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수치스런 죄인의 형틀에 달려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담당하시고, 이로써 우리의 대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저주와 수치와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그의 보혈로서 구원을 희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오늘도 부끄럽고 수치스런 죄인의 형틀입니다. 바로 거기에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시려 달리시고, 죄와 죽음의 권세에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교회의 십자가는 이 구원의 사건을 온 세상에 널리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소식은 오늘도 여전히 세상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느후스단

느후스단을 뒤에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들도 십자가를 경배의 대당으로 능력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힘이 들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심판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모세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백성들을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고 나음을 입게 됩니다.


문제는 이 놋뱀이 이스라엘 광야에서부터 700년이 지난 히스기야 왕 시대에 까지 보존되었으며 보존된 것뿐만 아니라 이 놋뱀에게서 무슨 신령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분향했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을 이방인들이 하는 것처럼 숭배를 했다는 말입니다. 히스기야는 유댜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개혁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여러 산당들과 주상들을 깨트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 때부터 백성들이 섬기고 분향하던 놋뱀을 부수어 버립니다. 그리고 ‘느후스단’이라 말합니다. ‘놋 조각’이라 말합니다. 경배와 숭배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적과 지적에 대하여 관심이 많이 있습니다. 능력자가 나타나면 쫒아가고 따르며 그 능력을 체험하길 원합니다. 광야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죽음에 놓이게 되었을 때 놋뱀을 보고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 능력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놋뱀이 아니라 그의 말씀에 있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방종교에 혼합되어 그들의 신을 섬기며 그들과 함께 즐기다가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하나님의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살아 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단히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며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고 소유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무속신앙이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어서 성경과 십자가를 무슨 신령한 부적처럼 사용하고 이것이 악귀를 쫒아내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양을 미개의 나라 생각했던 서구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일찍이 문명이 발달한 로마는 그들 영역 밖의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영국, 독일 등 ‘게르만족’을 야만인이라 규정했습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한 로마는 이방민족인 게르만족을 선교하기에 애를 썼습니다. 그들에게 말씀만으로 선교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십자가’ ‘예수의 형상’ ‘마리아 상’ 등 많은 성상들을 만들어 그들을 개종시켜 나갑니다. 동서 교회의 분열도 ‘성상’에 대한 논쟁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로마를 정복한 게르만족은 교회를 세우고 교회들 속에 많은 성상들을 만들고 숭배하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와 확연히 다른 교회를 만들어 갔습니다. 지금 유럽의 가톨릭교회들의 예술적 가치는 거의 이러한 연유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의미보다는 십자가 자체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들을 숭배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성배’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덮었던 ‘수의’ 예수님을 찔렀던 ‘창’ 이것들이 마치 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예수님이 달렸던 ‘십자가’를 발굴하여 지금도 교회에 모셔두고 숭배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고고학적으로도 완전히 인정되지 않은 것이며 실제의 것이 아니라고 많은 과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가톨릭교회의 ‘느후스단’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그 속에 능력이 있는 것으로 현혹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으며 자신들의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과감히 깨고 나와야 합니다. 그 물건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으며 그의 이름이 불리어질 때 능력이 임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교의 누후스단

오늘날 개신교회에서도 알게 모르게 많은 느후스단이 생겨났습니다. 말씀을 기초로 하면서 많이 없어진 듯 보이나 아직 일부에서는 잔재들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외부로 들어나는 것보다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와 영적 가치들 속에 존재하는 느후스단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보이는 외형에만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믿음은 관념적인 단어이지만 행동을 동반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믿음을 보이라’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열심’과 ‘자신의 외형적 형태’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있는 사람이 믿음이 좋다’라는 사고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자신의 신념에서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위로 의를 드러내는 것은 율법주의자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외형은 없지만 드러나지 않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 형태만으로 교회를 비판합니다. 비판을 시작할 때는 ‘그런 행위가 나타나게 된 연유’를 분명히 파악하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칭찬에 인색하고 비판에 익숙합니다. 이것 또한 내 자신의 관념의 한계 속에 빠져 있지 않나? 라는 깊은 통찰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내 자신의 깊은 통찰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좀 더 많이 생각해보고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둘째는 자신의 힘과 인간적인 방편을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예례미아 2장 27절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비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 등을 내게로 행하고 그 얼굴은 내게로 향치 아니하다가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 이 말씀은 예레미야 시대에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속에서도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습관과 행동을 쫓아 주의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들의 하소연은 ‘하나님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일의 출발점과 행위가 자신으로부터 출발하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핵심을 바르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항상 의인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계십니다. 올바른 방법의 추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먼저 발견해야 합니다. 조급하지 않고 그의 뜻하심을 발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바심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조바심은 결국 자신이 일을 시작하게 되고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이루어가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셋째는 교회 속에서도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혼합주의자들을 말합니다.

에스겔 8장 16절 17절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게 경배하더라. 또 네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그들이 강포로 이 땅에 채우고 또 다시 내 노를 격동하고 심지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


태양 숭배 사상은 고대 애굽에서 '라'('태양'이라는 뜻)라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의식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후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에 전해져서 숭배되었습니다.‘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다’이러한 종교 의식은 고대 근동의 페르시아 지방에서 행해졌던 우상 숭배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 중 태양을 섬기는 자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태양에 기도할 때 종려나무나 석류나무 가지를 코 앞에 대고 기도했습니다. 혹자는 그들이 기도할 때 태양의 광선이 인간의 더러운 숲으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십 오인은 24반열에 둔 제사장과 대제사장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임에 불구하고 이방신들에 속한 제사의식을 행함으로 성전을 오염시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도 자신의 신앙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교사들도 자신의 신앙을 잘 살펴보아 재 자신의 신앙이 혼합주의적 사고에 젖어있지 않나 바르게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행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행위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내속에 이러한 ‘느후스단’ 자라잡고 있지 않는 지를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내안에 내가 발견치 못한 우상이 있다면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이것들을 제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주여 우리를 온전케 하신 그리스도를 쫓아” 살아갈 수 있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수많은 악한 영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감히 우리에게 다가서지 못하도록 우리의 신앙을 키워나가야 하며 말씀을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정신에 입각하지 않는 사람은 몇 번의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충분히 알아낼 수 있습니다. 틀렸다고 생각하면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즉시 교제를 멈추는 것이 맞습니다. 빨리 방향을 수정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명이 위태로워집니다. 기도하십시오. 올바른 지도자와 동역자와 신앙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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