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오병이어 이적

어저나 2009. 4. 19. 21:31

오병이어 이적 (막 6 : 34 ~ 44) (2009. 2. 18)

오병이어의 이적은 사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져 있다. 이는 인간되신 하나님이 사람을 향한 긍휼하심을 보여 주는 최상의 저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인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잔치만 벌이신 것이 아니라. 고난 받고, 힘없는 약하다 약한 자들을 위해 저녁을 베푸심으로 그들의 양식의 문제(저녁 문제) 또한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인 굶주림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굶주림까지 보시고 인간의 영, 육의 전인적인 구원을 이루심을 볼 수 있다.

 

시간 : 때는 저녁 무렵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앞부분의 말씀을 보면 제자들의 파송 보고가 있다. 제자들이 자신의 복음전파에 대한 보고였다. 제자들은 피곤하고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고 말씀하신다. 이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확인하고는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 곳을 미리 알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을 그들을 그냥 지나치실 수 없었다. 빈들, 저녁이 되어갔지만 예수님을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셨다.

 

1. 육체적 곤고함이란 핑계로 그 자리를 피하지 말자.

34절 말씀에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예수님은 휴식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향한 감동과 연민의 정에 의하여 불평도 없으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그 연민의 마음, 긍휼의 마음이 인간 구원을 향한 생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그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하신다. 그 당시 유대 백성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하나는 로마의 지배에서 그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수탈을 당했고, 또 하나는 동족에 의한 종교적 고통이었다. 민중들은 그들 영혼의 갈급함이 있었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위선의 탈을 쓰고 그들에게 참된 가르침을 주지 못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영적으로도 많은 곤고함이 있었다. 그 갈급함에 율법의 정신을 ‘사랑’으로 가르치고 그들의 질고를 만져 주는 예수님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이것은 새로운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참된 정신을 설명했기에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모여들었던 것이다. 시간, 장소에 구애됨 없이 사랑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의 갈급함과 육체의 갈급함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모여든다. 이곳저곳 유리하는 양떼와 같이 방황하는 무리들이 있다. 우리들 또한 ‘목자 없는 양’같은 이들을 뿌리치고 자신의 길로 가서는 되지 않는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함께 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우리가 가는 길이 참이라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몰려들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피하지 않고 절박한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2. 영적, 육적의 구원의 균형을 유지하라.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미리 준비하신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말씀을 전하시니 시간이 흘러 저녁 먹을 때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먹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무리 또한 말씀에 목말라 했지만 굶주림을 이기기 약한 상태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예수님은 육적인 굶주림을 절대 간과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즉시로 문제 해결을 하셨다. 우리는 사람 구원을 위해 순차를 너무 생각해서는 되지 않는다. 영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이에게 영적 문제를 해결 해 주다 보면 육적인 고민도 알게 되어 그 분제의 해결을 위해서 기도하게 된다. 또한 육적인 어려움을 겪는 이의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너무 영과 육을 구분해서 접근해서는 되지 않는다. 우선순위의 문제보다는 그 사람의 전인적인 문제를 통째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그 필요를 다 아시고 동시에 해결하시는 분이셨다.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 균형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장소가 “푸른 잔디”위임을 밝히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50명씩 앉게 하라고 명하나(눅 9:14) 푸른 잔디라는 말은 없다. 마태와 함께 “푸른 잔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마가는 이 단어를 통해 의도하는 바가 있다. 먼저 35절에서 언급한 “빈들”이 황량한 광야가 아니라 신선하고 생동감 있는 들판임을 암시해 줌으로써 식사를 위한 준비와 함께 한층 더 희망적인 분위기를 창출한다. 또 “푸른 잔디”에 앉게 하는 예수의 지시는 시 23편을 연상케 한다. 즉 목자가 양떼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듯한 모습을 이 구절에서 보게 된다. 결국 예수는 설교도 하시고 푸른 초장 위에서 음식까지 먹임으로써 민중의 손색없는 목자가 된다. 이는 34절에 나오는 예수의 탄식과 잘 어울린다.

 

1. 푸른 잔디가 주는 의미

“푸른 잔디”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편히 “쉼”과 평화로운 풍경이다. 참으로 예수 앞에서 쉼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장면을 마가는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50명 또는 100명 단위로 무리를 지어 앉는 것은 식사와 교제를 위한 공동체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출애굽 당시의 야영(野營)생활을 연상케 한다(출 18:21).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와 더불어 제 2의 출애굽을 경험하면서 예수와 함께 하는 새 공동체를 경험하게 한다. 이와 같은 이해는 급식 기적의 최고점이라고 할 수 있는 41-44절로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이끌어 들인다. 한편 40절에 언급된 바 있는 “떼로”(프라시아이 프라시아이)에서 “프라시아이”란 “작은 정원”, “꽃밭”이나 “정원”같은 인상을 주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아마 이러한 인상은 무리들이 매우 질서 있게 앉아 있었고, 또 그들이 입은 옷들의 색깔이 매우 다양했음을 은연중에 나타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적 교회를 표방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갈려 노력하고 있다. 우리 인생의 종착역은 안식이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안식이 예비 되어 있음을 말씀한다. 우리의 꿈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누리는 참된 평안 ‘쉼’을 늘 갈구한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누릴 수 없는 것이지만 공동체 삶을 통하여 평화의 삶을 경험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도간의 교제로 인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쉼’을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만져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기를 늘 소망하며 기도하며 나아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 예수님은 참된 우리의 목자이시다.

시편 23편의 말씀은 우리에게 늘 평안함을 준다. 같이 한번 찾아볼까요. 주일학교에서 자주 부르는 찬송인 453장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입니다.

1절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 양

푸른 풀밭 맑은 시냇 물가로 나를 늘 인도하여 주신다.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 양

철을 따라 꼴을 먹여 주시니 내게 부족함 전혀 없어라.

2절 예쁜 새들 노래하는 아침과 노을 비끼는 고은 황혼에

사랑하는 나의 목자 음성이 나를 언제나 불러 주신다.

3절 못된 짐승 나를 해치 못하고 비바람 상치 못하리

나의 주님 강한 손을 펼치사 나를 주야로 지켜 주신다.

 

주님의 기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대로 푸른 잔디 위에 공동체적인 식사 하는 모형으로 50명씩 100명씩 앉았다.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대로 일사 분란하게 움직였다. 생각하건데 예수님의 정확한 의도를 깨닫지는 못했을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와 메추리기의 축복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 그리고는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물고기 두 마리도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는 유대의 전통적인 공동 식사 관습에 따라 자신이 가장의 위치에서 그리고 그 모인 무리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고 먼저 하늘을 향해 감사와 찬양을 했다. 특히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상징한다(요 11:41 ; 17:1). 그리고 이때 드리는 기도의 형식은 “찬송하리로다! 땅에서 양식을 내신 만유의 왕이신 주 우리 하나님이시여 !”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한 다음, 직접 떡을 떼어 제자들로 하여금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고 또 물고기도 그렇게 하셨다. 이것 역시 유대 공동 식사의 관습 곧 가장 또는 그 식탁의 주빈이 음식을 떼어 나누어주는 전통적 관례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떼어”(카테크라센)란 직설법 부정 과거 시상으로서 그 행위의 사실성의 장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 언급된 “주어”(에디두)는 능동태 미완료 시상으로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나눠주어 분배케 하셨음을 암시한다. 실로 그 떡은 떼시는 예수의 손 안에서 계속 커져서 예수께서 무리들을 모두 먹이실 때까지 불어났을 것이다. 마가는 예수의 이적 사역을 이처럼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적이다. 원래 ‘이적이란?’이미 알려져 있는 바의 자연 법칙에 어긋나 있는 듯한 방법으로 생겨나는 사건이다.

 

1. 5000명이 배불리 먹은 것에 대한 다른 생각

오병이어의 이적을 기적이 아니고 감동적인 사건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합리적으로 보면 너무나 타당한 설명이다. 이 설명은 다음과 같다.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서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의 군중을 배불리 먹였다는 이적 일화다. 정 추기경은 그 사건을 ‘기적’으로 풀지 않았다. 대신 ‘예수의 마음’과 ‘예수의 사랑’으로 풀었다. “성경을 보세요. 어린이와 여자를 빼고도 5000명이 모였죠. 그럼 적어도 7000∼8000명은 됐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50명씩, 혹은 100명씩 무리 지어 앉게 하셨어요. 서로 낯선 이들이었죠.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죠. 물론 그중 일부는 같은 마을 사람도 있었겠죠.” 당시 예수는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모인 이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러고도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성경에는 기록돼 있다. 정 추기경은 사람들 사이에는 ‘친밀도’가 있다고 했다. “가장 친밀한 이들이 가족이죠. 그 다음에 학벌로 뭉친 이들, 이권을 위해 모인 사람들 등이죠. 그럼 가장 친밀도가 낮은 이들은 누굴까요. 시장 바닥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언제 볼지 모르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마음을 안 여는 사이죠.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 모인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죠.” 정 추기경은 예수가 올린 ‘감사의 기도’에 주목했다. “그게 어떤 기도였을까요. 그건 ‘마음을 열어라. 하느님께 감사하라’는 내용이었을 겁니다. 그런 예수님의 기도를 듣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이 열린 겁니다. 그래서 저마다 품 안에 숨겨 두었던 도시락을 꺼냈던 거죠. 그리고 낯선 사람들과 나누기 시작한 겁니다. 자신이 굶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말이죠. 그렇게 나누고 남은 게 열두 광주리를 채웠다는 겁니다. 거기에 ‘오병이어’ 일화의 진정한 뜻이 있습니다.” 그건 나누면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는 강렬한 메시지였다.”

 

아무튼 이 메시지를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사랑이고 이 사랑이 매개체로 하여 풍성한 나눔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에도 오병이어의 기적은 계속 되어지고 있다. 사랑을 통하여 이웃을 향해 내 마음을 열면 작은 일이지만 하나님이 크게 이루어지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어야 한다. 오병이어의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요 사람 사랑의 최고점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경험해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 높이 드러낸다. 보지 않아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자.

 

2. 우리의 믿음

우리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어려움 중에 있다.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는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과 이에 응답하는 인간의 의지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계의 동물과 다른 점은 본능에 의해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별한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런데 그 자유 의지를 자신을 위해 사용했을 때는 범죄 했음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통한 나눔의 삶을 원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으며 그것을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나타내셨다. 지금은 작지만 지금의 나눔으로 인하여 더 커질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어야 한다. 영광교회의 나눔은 계속될 것이다. 또 우리 공동체 역시 나눔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의 벽을 허물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바라보아야 한다. ‘나’‘너’가 아닌‘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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