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의식적인 율법에 관한 논쟁

어저나 2009. 4. 19. 21:36

의식적인 율법에 관한 논쟁 (막 7:1 ~ 23) (2009. 3. 1)

 

마가복음 7장 1절에서 23절 까지는 하나의 연속된 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부분은 ‘부정’, ‘전통(유전)’그리고 실제 생활에 관련된 부분이어서 그 당시의 사회를 이해하고 왜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라 칭하는 이유를 알게 해준다. 깊이 있게 살펴보면 예수님의 사람들을 향하신 진정성을 이해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의식적인 부분에서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말씀의 본질’을 발견하는데 있다. 오늘날 우리는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목회자인 본인 역시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시대정신을 쫒아 가야 할지 귀로에 놓여있다. 그러기에 더 많이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변혁의 시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를 연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을 세 부분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1절에서 8절까지로 ‘유전에 따른 부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의 음식 먹기 전에 손 씻지 않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나와 있다. 두 번째 부분은 ‘계명과 율법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데 서기관의 유전이 율법과 상충하고 있다고 말하는 예수님의 역 비평이 실려 있다. 세 번째 부분은 ‘참으로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의 명확한 해석이 실려 있다. 물론 이 모든 부분은 7장 20절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이 말씀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하지만 더 깊이 연구해야 하는 것은 왜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자명한 진리에 대해서만 말할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선 이해가 필요하다. 어떻게 접근하고 문제를 바라 볼 것인가. 우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답은 예수님의 답으로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바리새인적인 그런 시각이 우리에게 있지 않나 살펴보아야 하고 한국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교회들을 바래새주의로 몰아가고 있지 않는 가 살펴보아야 한다.

 

시사적인 이야기를 잠시 할 까 한다. 개신교회 지도자들 175명이 경제위기 속에서 차상위 계층을 돕기 위해 자신의 월급의 5%을 기부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기사가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다. 교계의 지도자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헌신된 삶을 살기 위해 자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님의 아름다운 나눔과 섬김의 삶을 실천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다. 제가 젊은 시절 보았던 교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서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지만 마음만은 넓어지는 것 같아 요즘 행복한 마음을 품고 있으며 주변에 그러한 동역자들이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고무되는 것이 사실이다.

 

유전에 따른 부정의 문제(1 ~ 8)

이 문제를 다룸에 앞서 장로들의 유전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았으면 한다.

장로 : 문자적으로는 연세가 많은 어른들을 일컫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율법에 능통한 자나 랍비 등의 종교 지도자를 가르칠 때 흔히 사용되었다. 이들은 율법 해석의 권위를 공적으로 인정받았으며 이들의 해석의 해석이 구전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러한 해석이 기록된 율법보다 더 존중되었다.

 

유전(Tradition, 헬 파라도시스)

여기서 '유전'(*, 파라도시스)이란 '넘겨주다', '전해주다'는 뜻의 원어 '파라디도미'(*)에서 유래한 말로서 조상적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일종의 행위법(行爲法)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법은 '장로들의 유전'이란 말 외에 '사람의 유전'(막 7:8; 골 2:8), '너희의 유전'(15:3)', '조상들의 유전'(갈 1:14)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편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오경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로 주신 구전 율법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유대교에서는 성경 율법은 원리만을 가르치기 때문에 세세하고 복잡한 현실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상세한 규범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부터 유명한 유대교 랍비들이 고대의 전승 자료들을 중심으로 하여 세세한 생활규칙들을 정비, 집성(集成)하기 시작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장로들의 유전이었다(Rabbi Judah the Prince C. A. D. 135-200). B. C. 300-A. D. 800년 사이에 이런 구전 율법을 집대성하여 문서화한 것이 바로 탈무드(Talmud)이다.

 

탈무드는 내용상 (1) 율법의 세부 규정을 담은 '미쉬나'(반복이라는 뜻)와 (2) 율법 규정의 교훈적 풀이 곧 미쉬나의 주석서격인 '게마라'(보완이라는 뜻) 등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고

그 문체 면에서는 (1) 법 규정을 다루는 '할라카'(규범이라는 뜻)와 (2) 각종 이야기를 통한 지혜와 훈계를 주는 '학가다'(이야기) 등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또 본래 탈무드라는 것이 구전, 곧 입으로 전해져 오던 율법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 편집자에 따라 약간씩 내용상 차이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 현재 유명한 탈무드로는 '바벨론 탈무드'와 '예루살렘 탈무드'가 있다.

 

특히 매우 미미(微微)한 점에 이르기 까지 상세히 사람의 행위를 규제한 '할라카'는 율법 주위에 둘러쳐진 '울타리'라는 뜻으로서 일부는 모세로부터 개개인에 의해 전래되었고, 일부는 모세의 기록에 기초한 규칙으로서 전부 613개에 달하였다고 한다. 장로들의 유전은 외형상 별 문제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한 수준으로 생각하였다는 점과, 율법의 목적과 그 정신을 저버리고 외형적인 세부 규칙들을 번거로울 정도로 상세히 규정해 놓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과 사랑을 버리고 인간의 위선과 교만으로 나아갔다고 하는 점에서 장로들의 유전은 치명적 오류를 범했다. 따라서 비록 탈무드가 여호와 신앙이라는 대전제 하에 쓰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유대교적 한계를 갖고 있으므로 이를 명확히 파악하고 대해야 할 것이다.

 

장로들의 유전(전통) (1 ~ 4)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장 1절에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본 절로 시간과 장소의 배경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중앙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중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옴으로써 본 사건이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추측하건데 장소는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그런데 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중앙에서 지방까지 예수를 찾아왔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 이유는 갈릴리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수의 활동에 대한 파문이 그들의 전통과 종교적 질서까지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그 대책으로서 중앙의 권위 있는 학자를 파견하여 조사하고 예수와의 직접적인 논쟁을 통해 파문을 진정시키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에 대한 피상적인 조사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권위와 인기를 일구에 무너뜨릴 수 있는 모함의 구실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활동을 관찰하다가 문제가 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포착하게 된다. 그 문제의 초점은 “ 부정한 손, 곧 씻지 않는 손으로 떡을 먹는 행위”였다. ‘부정하다’라는 말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의식적인 부정을 말하는 것이고 ‘씻지 않는 손’은 그 부정한 이유를 말하는 것으로 그들 조상이 정한 결례 의식을 거치지 않아 성결에 이르지 못한 ‘부정한’일반 세상의 손을 가르킨다. 본문에 언급된 떡을 먹을 때 손을 씻는 관습은 모세의 율법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데 이는 아마도 제사장의 제의적 의식에서 유례된 것으로 보인다.‘미쉬나’한 부분 전체가 이 ‘정결’의 문제를 논하고 있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결례를 행하지 않고 식사한 것에 대해 부정한 자로 단죄한 것은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괄호 안에 있는 3, 4절은 전통과 관례에 전혀 생소한 독자의 이해를 돕게 위해 마가가 친절히 설명해 놓은 해설구이다.(마가복음은 헬라인 이방인들을 위해 쓰여졌다.) 아까 살펴보았듯이 출애굽 때 모세가 하나님에게 받은 성문 율법만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구전 율법도 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 구전 율법이 모세, 아론 그리고 자손들에게 전해졌다고 믿는 유대인들은 그것을 행위법이나 관례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이 일차적으로 완성된 것이 A.D 200년경에 일차적으로 집대성 되었으며 이러한 작업은 A.D 800 년 까지 긴 기간이 소요되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는 대개 구전 형식으로 존속되어 지고 있었다. 성문법은 특수한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유전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까지 지침을 내려 주고 있었다. 한 세 대에서 다음세대로 전해지면서 어떤 때는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게 되었으며 성경의 권위를 능가하기도 했다.

 

3절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결례로 행하는 손 씻음은 양손을 주먹으로 꽉 쥐었다 폈다 하면서 팔꿈치까지를 물로 씻어 내거나 양손을 부지런히 잽싼 행동으로 부비 대며 씻는다. 먹을 때마다 꼬박꼬박 했다는 것은 그들의 의지와 노력이 얼마나 열심히 있었는지를 볼 수 있다. 4절 “시장에 돌아와서는” 그들은 시장을 부정한 곳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시장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이기에 대중 접촉 주에 부정한 사람과 접촉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돌아와서는 “물을 뿌렸다는”기록이 나온다.‘물을 뿌린다’는 것은 목욕을 하거나 물에 몸을 잠그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인격적인 거듭남이나 내면적 자기성찰 보다는 겉으로 들어난 의식적 정결에 더 큰 종교적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 “잔과 주발을 씻음이러라”잔과 주발 놋그릇을 씻었다는 것은 이러한 도구들을 주로 이방인에게서 구입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결례가 요구된다고 하였다.

 

1. 유전(전통)이란 나쁜 것인가?

유전은 나쁘나 전통은 나쁘다고 생각한다. 신기하다. 한 마다로 전통이 나쁜 것은 아니다. 누가 ‘전통’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인간의 해위를 제한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우리가 부정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를 보더러도 ‘칠거지악’이라든가 여성의 사회참여를 부인 한다던가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에 있어서는 바뀌어져야 한다. 전통을 자신의 잣대가 되어서 자신들의 통치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많은 시대를 돌아보더라도 ‘이데올로기’가 중심이 되어 사람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홍길동전’을 생각해 보자. 서자로 아버지는 아버지라 부르지 못함을 억울하게 생각한 길동은 ‘율도국’ 이상세계를 세우기 위해 길은 떠난다. 그것은 분명 잘못된 전통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동일한 모습 속에 빠져있다. 구전에 의하여 내려 온 그 전승을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누를 범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것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왜 개신교는 까달스럽게 믿으며 살아가느냐고 말한다. 두리두리 서로 인정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데 왜 그렇게 따지냐고 말한다. 이는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이다. 바르게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삶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자기 계급의 이익을 위해 ‘유전’을 강조하는 행위는 하지 않아야 한다. 그 당시 일반 민중들을 보라. 어디 손, 발 씻을 만한 물이 충분히 있었을까? 목욕할 물이 충분했을까? 팔레스타인의 기후로 보건데 물이 풍부하지 못하였고 부족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이 지키기란 너무 힘든 일이다. 우리도 또한 그렇게 남을 판단하거나 강요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보아야 한다. 내 것만이 진리다. 나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자는 이단이다. 강요하는 그것이 최선일까? 많은 의문이 든다. 율법의 참 정신으로 바라본다면 문제 되지 않을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교회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자기의 잣대로 신앙을 이야기한다. 그러다 만 맞으며 일평생 적이 된다. 자신의 신앙만을 고집한다. 그 결과 한국교회가 수많은 분열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는 교회가 필요하다.

 

2.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믿음을 무시하지 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늘 비판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하나 바리새인은 복수형으로서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기원을 살펴보면 마카비서에 기록되어 있는 ‘경건당’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경건당은 전2세기, 당시 성했던 그리스화의 흐름에 반항하여, 유대의 학자계급 사이에서 생겨나, 학자에 의해 해설된 율법의 엄격한 실천에 열중했던 일단으로서, 그들에 대하여 그 반대자가 붙인 호명이 바로 ‘바리새’라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는 ‘형제들’, 즉 ‘하베-림’이라 자칭하고, 자신들을 ‘참된 이스라엘의 성원동지’로 생각하면서, 일반시민 계급을 ‘땅의 백성’, 즉 ‘암 하-아-레츠’로서 구별하여,‘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들’(요 7:49)로 멸시했다. 그들의 주요한 특질은, 사두개인이 ‘모세5경’을 지고의 권위 있는 율법으로서 신봉한데 대해, 바리새인은 기록된 성문화된 ‘율법’, ‘선지서’, ‘제서’뿐 아니라, 이것과 함께 기록되지 않은 유전도 권위 있는‘부조의 전승’으로서 그것들과 동시에 받아들였다. 따라서 바리새인의 신앙과 생활의 규범은 이들 두 가지 율법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주 열심 있는 자들이었다. 외식적 측면으로 신앙이 흘렀으나 자신의 신앙을 자랑할 만큼 하나님에 대해 열성적이었다. 그들의 열심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이분법적 성향이 너무 강해 모두를 선과 악,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것도 바리새적 관점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한다. 나 자신을 주의하면서 말씀 가운데 서 있는지 점검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마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정에 대한 예수님이 반박 예증  (0) 2009.04.19
부정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0) 2009.04.19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  (0) 2009.04.19
오병이어 이적  (0) 2009.04.19
세례요한의 죽음  (0) 2009.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