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2제자의 파송

어저나 2009. 4. 19. 21:27

12제자의 파송 (막 6:6 하반절 ~ 13) (2009. 2. 1)

 

예수님의 12제자 파송은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12제자 파송에 앞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교육하시며 양육하셨다. 1장 16절에서 20절까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부르셨다. 2장 14절에는 세리인 레위(마태)를 선택하셨다. 그런 후에 12제자로 선택을 확장하셨다. 3장 13절에서 19절 까지 에서 12제자의 이름이 등장하며 그들에게 양육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설교를 하도록 파송할 것이며,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 낼 권세를 부여하셨다.

 

12제자들은 선택 받은 이후 줄곧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며 4장 11절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 주었으니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34절 말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제자들에게 특별 교육을 행하셨음을 알 수 있다,(소수 과외 교육) 또 풍랑을 제어하심과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며,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시는 것을 제자들에게 친히 보여 주시며 예수님의 권능을 알게 하시었다. 이 모든 것들이 제자를 양육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제자들을 사용하시기 위한 준비였다.

 

이제 예수님은 12제자 파송을 통하여 새로운 형태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선교 활동의 조직화, 기반 확충을 통한 저변화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제 선교 활동 영역이 확대되고 장기화됨을 보여 준다. 이제 예수님의 선교 활동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됨을 알 수 있다.

 

제자 파송 원리(7 ~ 13) - 선교 지침

 

첫째, 둘씩 둘씩 보내셨다. 동행의 원리이다.

누가복음 10장 1절에도 70명을 불러 파송하실 때도 둘씩 둘씩 파송했는데 이는 유대인의 풍습 때문이었다. 신명기 17장 6절에 나온 바와 같이 증인을 두 사람이나 세 사람으로 세우라는 관습과 일치한다. 이것은 천국 복음 전파 활동에도 증인으로 두 사람을 세우신 것이다. 전도 활동은 혼자서 하기에 힘든 일임을 우리도 현실 속에서 경험한다. C C C 전도의 경우에도 이 파송원리를 지침으로 하고 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지침을 가지고 소그룹 전도 모임을 개설해야 한다. 이는 사람들 마다 은사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을 복음 쉽게 전파하고, 어떤 이들은 섬기는 일로, 또 어떤 이는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잘 가져 불러 모으는 은사가 있는 사람도 있다. 은사가 다른 사람이 모여 힘을 모으면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둘째, ‘지정된 대리자’의 원리이다.

유대 풍습에 “파송된 자는 그를 파송한 자와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원리가 있다. 여기에 쓰인 용어는 ‘보내시며(아포스텔레인)’의 의미와 일치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권위를 부여하신 후 파송하셨음을 암시한다.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다. 이 권세를 주신 목적은 복음 전파와 병의 치유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권세를 주신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자신의 명예나 영광, 의로움을 드러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하나님이 나라 확장에만 사용하여야 한다.

 

셋째, 하나님 전적 신뢰의 원리이다. - 여행 지침

8절에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벌 옷도 입지 말라.” 이 명령은 우리들로 시험에 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통하여 마태복음 6장 34절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고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말씀을 체험하게 하실려는 것이다. 사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에 적용된다.

이 명령은 먼저 자신들이 전파하는 복음에 관심을 두고 자기 신변에 대하여 일체 염려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메일 자기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또 복음 전도자는 청빈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것은 출애굽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 하나님 나라 도래의 임박성을 이야기 한다. 복음 전파의 사명이 매우 긴박함 말해준다.

 

넷째, 합당한 관계성의 원리이다.

10절“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마태복음 10장 11절에는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그곳에 유하라”라고 되어 있다. 즉 신세를 질만한 집을 찾으라는 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전도 활동을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의 집을 택하라는 말씀이다. 집을 자주 옮겨 다니게 되면 다른 이들에게 피해도 줄 수 있고 나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으며 간혹 불화를 조성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이미지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안락에 연연하자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태도로 일관해야 한다. 선을 베푸는 자에게는 그 선함에 대하여 그 집에 대하여 평안을 빌어야 한다.

 

그러나 11절 말씀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여기에서는 복음 증거자로서 배척당하게 될 상황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행위는 유대인의 풍습 중에 유대인들이 이방 땅을 밟거나 여행하고 돌아올 때는 발과 옷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이 관례였다. 즉 복음 받지 않는 곳의 사람은 이방인처럼 취급하라는 말씀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은 복음을 배척한 지역은 마치 이방의 지역과 같이 멸망의 자리에 놓이게 됨을 알리고 또 거절한 자들이 그들 스스로에 대하여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한 의도에서 말씀하셨다. 복음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잘 못되었는가를 말씀해 주신다. 우리도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배척을 당한다. 아니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가 나서서 흥분하거나 대적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온당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것 때문에 실망할 이유도 없다. 구원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이기에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다만 복음만을 전해야 한다. 개인의 축복을 그 집의 축복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반드시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 받지 않는 자가 받을 화에 대하여 가르쳐야 한다.

다섯째, 회개와 믿음만을 선포하는 원리이다.

12절 “회개하라 전파하고”제자들의 선교 주제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선교 주제와 일치한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세례 요한은 와서 회개만을 선포했다. 나주에 오시는 이에 대하여 증거했다. 예수님은 회개만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하여 믿음의 길로 들어서라는 분명한 말씀을 선포한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데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복음 증거에 있어 회개와 믿음을 둘 다 말해야 한다.

 

여섯째. 구원은 전인적인 치유라는 원리이다.

13절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제자들의 복음전파 병행되는 정신적(영적), 육체적 치유 사역이 동시에 제시되고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인데 동일하게 나타난다. 첫째는 복음 선포로서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둘째는 치병활동을 통하여 육체적, 정신적 병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예수님의 구원은 전인적인 완전한 회복이다. 우리의 복음 선포에 있어서 전인적인 치유가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특이한 사실은 예수님의 치유 방법과 제자들의 치유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기름을 발랐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누가복음 10장 34절에도 나온다. 이런 치유 방법은 당시 유대교와 헬레니즘 세계에서 널리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당시 교회 공동체 역시 이 같은 치유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야고보서 5장 14절에도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희는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당시 기름과 포도주는 상처의 치료제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대개 기름은 상처의 통증을 식히고 포도주는 살균 역할을 한다(Robertson) 당시 기름을 바라는 행위는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치료행위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술적인 형태로 기름 바름이 치료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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