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

어저나 2009. 4. 19. 21:32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 (막 6 :45 ~ 56) (2009. 2. 22)

 

이 본문은 세 가지 기사로 이루어져 있다. 첫 부분은 45 ~ 47절로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보내고 무리를 떠나 산 속으로 홀로 기도하러 가셨다. 두 번째는 48 ~ 52절 말씀으로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친히 물위를 걸어오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장면이다. 세 번째는 53 ~ 56절 말씀으로 게네사렛에서 수 많은 병자를 고치신 기적이 기록되어져 있다.

 

1. 예수님의 기도(45 ~ 47)

예수님은 갈길 없이 방황하던 무리들에게 ‘오병이어’ 이적으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그리곤 예수님을 제자들을 재촉하여 그곳을 떠나게 하셨다. 왜 그리 급히 떠나게 하셨는가 하면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해 사람들이 그를 ‘그 선지자’ 곧 메시야로 모시면서 그를 자신들의 왕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이 조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리들은 그를 인류의 영혼구원을 오신 분으로 이해하지 않고 정치적인 구원의 메시야로 생각함으로 흥분한 무리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들과의 교제를 잠시 중단하시기로 하셨다.

 

그리곤 예수님은 무리들을 다 해산시키고 제자들을 떠나보내신 후에 혼자 산으로 기도하기 위해 들어가셨다. 예수님은 곳곳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큰일을 앞두고 홀로 기도하셨음을 복음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이 호로 기도하러 가신 이유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사명을 위해 기도하러 가셨다. 즉 고통과 배척당함과 죽임당해야 할 인류 구원의 사명 완수를 방해하려는 움직임의 유혹을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뿐만 아니라 헤롯왕의 박해가 임박했음을 예감하시어 혼자 조용히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위해 기도하러 가셨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은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는 것이었다. 이 절대 절명에 사명 앞에 무리들의 간구를 급히 뿌리치시고 홀로 기도하셨다는 것이다. 우리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사명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장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명에 감당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형성되어질 수 있다. 우리를 이것을 뿌리쳐야 한다. 아무리 좋은 것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 유혹을 뿌리치고 더 깊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세상의 유혹과 욕심을 이겨내는 방법과 ‘기도의 골방’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들을 이루어 낼 수 있다.

 

2.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그리스도(47 ~ 52)

갈릴리 바다는 지중해보다 200m 아래에 위치하여 주변의 협곡을 통해 회오리 같은 바람이 불어와 파도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 바람은 제자들이 가는 방향에서 마주 불어오는 역풍이었다. 이 바람이 제자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제자들 중에 어부 출신이 많았지만 그들을 ‘괴로이’ 할 정도 였다. 이는 그들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었고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묘사해 준다. ‘보시고’ 배가 멀리 떨어져 있고 멀리서 그들의 상황이 어려운 것을 보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적인 직관 능력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유월절이 다가오는 시기였기에 보름달이 비쳐주어서 멀리서 어렴풋이 볼 수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도 있다.

제자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을 무렵 삼 사경에 (새벽 3시에 6시 사이를 말함) 예수님은 그들에게 찾아가셨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시려 하시매” 에수님은 그냥 지나치려 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을 깊이 있게 묵상해보면 예수님이 그들의 고난을 간과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에 자신들이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초청해 주신 것을 기다리고 계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간절한 호소를 바라고 계셨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는 순간 놀라서 “유령인가 하여 소리를 지르니”라고 묘사하고 있다. 제자들은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놀라며 두려워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이 분명 산에 들어가 기도하고 계실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상황에 예수님의 실체를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영적 진리는 사람들의 눈(안목)이란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바로 얼마 전에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다. 또 관중 중에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었을 때에 바람이 순종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또한 삶 속에서 예수님의 살아서 역사하시고 계신 장면들을 묵도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요지는 우리는 잘 잊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때 베푼 은혜에 때에는 감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은혜의 순간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예수님은 이런 약한 믿음 없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는 말은 ‘용기를 내라’ ‘담대하라’ ‘두려워 말라’ 명령형으로 용기와 위로의 명령이다. 예수님은 더 이상 바람과 유령의 악몽에 짓눌리지 말고 예수를 바라보고 담대히 떨쳐 일어나라는 말씀이다. 이 단어의 사용 의미는 바람으로 인한 항해의 곤란한 상황과 유령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또 ‘내니’에서 마치 출애굽 당시 하나님이 모세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실 때에 표현인 ‘여호와’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제자들에게 힘을 주었다. ’두려워 말라‘는 지금 당장 그 무서워하는 상태를 중단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우리 곁을 떠나시지 않는다.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 또한 역사하셨다. 우리는 주님이 멀리 계신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래서 자신을 너무 신뢰하거나 아님 자존감을 잃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다. 주님 지금 우리가 풍랑 속에 있을 때 명령하신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주님 말씀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자. 주님은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기를 소망하시고 또한 친히 역사하고 계신다.

 

여기서 마가복음 4장 30절 “예수께서 개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이때에는 바람을 꾸짖으셨지만 이번에는 무언의 명령으로 바람의 기운을 막으셨다. 이 기적의 주제는 자연을 다스리는 신적 권위가 예수님에게 있으며 그러한 권능의 모든 귀결점이 바로 자신의 나라(하나님 자라)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본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보여 주심으로 자신이 하나님 아들 되심을 확인시키셨다. 분명 주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확인 시키신다. 우리들 또한 이러한 놀라운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나아가자.

3. 게네사렛에서의 치유 사역(53 ~ 56)

이 부분은 ‘치료자’ 되신 예수님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앞부분과 연결되는 부분으로서 제자들이 벳새다를 향해 출발하였으나 바람 때문에 거기로부터 수 km 떨어진 곳에 도착하였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 곳이 바로 게네사렛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각종 병자들 또한 같이 나아왔다.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이는 예수님의 열정적 활동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수님의 활동 영역이 어느 특정한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조그마한 ‘마을’이나 잘 발달된 ‘도시’나 한적한 들판 위에 세워진 ‘촌’이나 불문하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나아가셨다. 예수님은 선교의 발길을 어느 곳이든 가리지 않았다. 특히 본문에서 보호자들이 환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아마 예수님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을 복음 전파의 대상지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시장(아고라) 사람들이 교제를 나누던 장소였다. 선교의 중심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옷자락이라도 손을 대게” 예수님의 옷자락에도 손을 대면 병을 낫는다는 생각보단 옷자락이라도 만질려는 믿음의 행위에서 치유의 기적이 나타났음을 부이할 수 없다. 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시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치유의 통로는 간절한 믿음이다.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은 그에 믿음에 대한 보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주인공 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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