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부정에 대한 예수님이 반박 예증

어저나 2009. 4. 19. 21:38

부정에 대한 예수님의 반박 예증 (막 7 : 9 ~ 13) (2009. 3. 15)

 

원래 유전이 만들어진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지 않도록 율법을 에워싸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변질되어 오히려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하나님의 계명(율법)을 지킴보다는 ‘사람들의 유전(장로들의 유전)’을 지키기에 더 급급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율법이 왜곡되고, 경화되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겟끔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예수님은 지적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의 계시가 중심이 아니라 내려오는 구전의 유전의 말씀을 더 지키려고 애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고 계신다.

 

‘신화’‘설화’는 대부분 후대에 와서 각색되어지거나 첨가, 삭제를 거치면서 훌륭한 작품이 되어진다.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닌 걸로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실처럼 받아들인다. ‘그리스 로마’ 신화 ‘단군 신화’이런 것들을 보면 그 민족의 문화적 전통이나 민족적 자긍심과 연결되어 결속력을 지니고 있기에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신성화 되어진다. 아마 ‘장로들의 유전’ 역시 이스라엘의 선민의식과 그들의 민족적 우월성과 자긍심에 크게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들은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 계속된 식민지 지배를 거치면서 그들의 구겨진 민족적 자존감을 구전 율법에서 찾은듯하다. 그래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결례 의식’에서 더욱 드러내며 살아 왔는 것 같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사랑하셨다. 그는 궁극적으로 온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오셨지만 유대인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의도가 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른다. 하나님을 알아야지 그리스도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을 바르게 이해시키며 제자들을 양육해 나가시고 계신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하나님의 계명의 본질적인 부분을 해부하시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잘못된 사상과 관념에 물든 많은 것들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신화적 실체가 아님을 우리는 믿고 있다. 그 분은 분명 역사 속에 존재하셨으며 그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며 그 시대의 정신을 회복시키시려 하시고 있다. 우리에게도 강력하게 새로운 패러다임과 사상과 관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가? 멀찍이 구경하고 살 수 만은 없다. 결국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행위로 들어내야 한다. 예수님은 지식인들에게는 배척 받으셨지만 민중들에게는 인기가 높았으며 폭 넓은 지지층을 확보하고 계셨다.

 

‘잘 저버리는도다’는 ‘잘 예언하였도다'와 대응되는 표현으로서 그릇된 종교라서 집착해 있는 유대 지도자들의 잘못을 비웃는 독설적 발언이다. 즉 이 말은 그들이 너무 쉽게, 간단히 하나님의 계명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사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이 서로 충돌될 때에는 거침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따랐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을 피해가는 수단으로서 사람의 전통이 동원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 앞에 경건해지려는 위선자들의 특징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언행을 구체적 예증을 통해서 반박하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믿고 있는 모세의 계명을 예로 들고 있다. 이 구절은 출 20:12과 신 5:16에 나오는 십계명의 제 5계명으로서 예수는 70인역(LXX)과 히브리 성경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아비와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 이 구절은 제 5계명(출 20:12)을 보충 설명한 규례로서 출 21:17에 나오는 '효'를 주제로 한 저주문이다. 비록 부모를 '훼방'(욕하고 저주하는 것)하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극도로 싫어하시며 심지어 사형까지 시키도록 명하셨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범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점을 강조하여 간접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유전을 통한 불효를(11-13절) 죄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부모 공경을 통해 보이지 않는 당신을 섬기는 법을 가르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장로들의 유전은 자식이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의무를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더 이상 부모에게 할 의무가 없어진다고 가르쳤다. 때문에 그들은 부모 공경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위한 구실로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이용했다. 또 '고르반'은 일종의 맹세문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 가진 물건을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부모를 위시한 모든 타인으로부터 제한시킬 수가 있었다. 이 '고르반' 맹세는 비록 모세의 또 다른 계명(부모 공경 등)을 파기하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 같은 '맹세'는 실제로 성전에 물건을 바쳐야 한다는 '강제 규정'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맹세자는 '고르반'된 물건을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아예 헌납치 않는 수도 있음)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해도 무방했던 것이다. 결국 장로들의 유전은 많은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불효자들의 기만적인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는 구실을 한 것이다. 한편 후대 랍비들은 이러한 규정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여 '미쉬나'(Mishnah)에 고르반을 빌미로 부모 공양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그러나 예수 당시에는 아직 그 조항이 제정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극단적인 유대주의자는 부모 공경보다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더 중하게 여겨 고르반의 폐단을 계속 고집하였다고 한다.

 

예수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파기시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 말은 그들의 언행에 대한 결정적 모순을 지적하는 말인데, 즉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충성을 위해 만들어내고 지킨 율법적 관습이 결과적으로는 10-12절에서 논증된 바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하여 파기시킨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이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깨닫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 대한 사랑에 있음을 망각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구실로 사람을 희생시키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분명해지는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사랑. 봉사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위선되고 거짓된 종교 형태가 단지 부모 공경에 관한 제 5계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고 밝히신다.

 

1.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부모 공경을 통해 보이지 않는 당신을 섬기는 법을 가르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부모 공경에 대한 것은 예증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잘못 된 예를 설명하시고 계신 부분이다. 저들의 내면을 읽어 내면서 그들의 위선을 파헤치신다. 십계명에도 하나님에 관한 부분이 앞에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인간관계의 법을 하급으로 취급하지시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명을 크게 둘로 나누시고 하나님과 사람에 관한 것으로 설명하시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분명하게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부모도 마땅히 공경한다. 이 두 부분을 예수님은 함부러 분리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한다.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에 빠져서는 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물질의 사용에 있어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의지에 합리화하여 사용하고 있다. ‘십일조’가 마땅하다. 아니면 30분의 1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든 십의 이조든 그것은 관계없다. 자신의 처한 형편에서 최대한 해야 한다. 최소한이 아니라 최대한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물질로 우리를 시험하시지는 않는다. 바르게 드리라는 말이다. 자신의 정성이 담겨야 하며 불쌍하고 가난한 이웃을 지나치지 말고 돕기를 계속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지적하시며 정면으로 돌파하신다. 말라기 선지자처럼 선지자, 예연자의 사역을 하고 게신 것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사랑. 봉사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사람을 사랑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내면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돌아보게 되며 선행을 하게 된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애쓰며 그들의 생활을 살펴 주게 된다.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 속에 살아 숨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중적 삶을 벗어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속에서 구현하게 되어진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여자연예인헤어스타일 이 효 리 ★★★영화제목좀알려주세효 남자들은이런여자좋아하나효?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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