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어저나 2009. 4. 19. 21:41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막 7: 24 ~ 30) (2009. 3. 29)

 

예수님이 갈릴리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하시고 북쪽 두로 지경으로 이동하셨는데 왜 그리로 가셨는지는 성경에서 밝히고 있지 않다. 추측하건대 유대 지도자들의 반대에 직면했고, 또한 예수님의 여러 사역으로 쉴 여유가 없어서 쉼과 새로운 선교 활동의 준비를 위해서 두로 지방으로 이동하신 것으로 보인다. 8절에 근거해서 추론한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지역에서도 이미 예수님의 이적(기적)을 행하신다는 사실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사실이다.

 

누가복음 6장 17절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 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와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에서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 뿐 아니라 유대와 두로와 시돈에 알려진 국제적 인물이었다. 한 마디로 팔레스타인 지방의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그 당시에 국제적 인물이 되신 것은 단순히 병만 고쳐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누가복음 6장은 ‘평지 설교’라 알려져 있는데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과 비슷하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영혼의 안식을 가져다주는 ‘복음’인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기다렸다는 사실이다. 또한 영생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고 영과 육이 동시에 고침 받는 완전한 구원을 소망하여 몰려들었다.

 

예수님은 어느 한 집에 머물렀는데 한 여인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녀는 오자마자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렸다. 이것은 여인의 겸손과 절대 신뢰의 모습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그 여인의 따리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마 15:22에는 ‘흉악한 귀신’이 들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병은 육체적 압박과 두려움을 동반한 심한 정신적 질환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여인은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에게 찾아와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간절하게 간구한다. 이 여인은 ‘수로보니게’ 출신인데 ‘수로’ 지방의 ‘보니게’ 지방의 사람이었다. 지금의 ‘시리아의 뵈니게’ 지방을 말한다. 그녀는 헬라화된 이방 지역 사람으로 추정된다. 이 여인은 자기 딸의 치유를 위하여 소망하며 거듭 거듭 호소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 딸의 구원을 위해 민족적 반감이나 개인적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께 매어 달리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냉담하게 느껴진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도다.” 예수님은 유다 사람을 ‘자녀’로 말하며 ‘그들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는데 그 의미는 먼저 유대 사람들을 먼저 치유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좀 더 확장해서 말하면 복음,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유대인에게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배타적인 선민의식이라고 볼 수 없다.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이 전 인류에게 구원을 전하기 위해 먼저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유대의 선민적 지위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선교 지침에서도 말씀하고 계신다. 마태복음 10장 5절 6절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사도 바울도 그러한 생각이 있었다. 로마서 3장 1절 2절 “ 그런즉 유대인이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경멸할 때 또는 자신을 비하시킬 때나 악한 존재로 상징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의 개는 야생의 들개가 아니리 가정 기르는 애완용 개 또 늘 귀여운 강아지의 의미를 담고 있어 그 의미가 좀 더 부드럽게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개’라는 사실은 그 자체 상 비천하고 속되게 느끼게 한다.

 

‘자녀’와 ‘개’의 대비는 신적 특권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극명한 차이가 있음을 말해 준다. 그렇지만 이것은 영구하거나 숙명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말해주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마틴이라는 주석가는 ‘먼저’(프로톤)이라는 말에 주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가 삽입된 것은 이스라엘의 배타적 특권이 한 때 뿐임을 가리킨다. 예루살렘 교회가 생긴 직후의 기간까지는 자녀(이스라엘이) ‘먼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나 이 특권은 영원히 유대인에만 속하는 배타적인 특권은 아니다. ‘후에는’ 이방인 개들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후에는’ 이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미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의 간구에 응답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인의 대답은 참으로 지혜로웠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녀는 ‘주여’라 말하며 주님의 절대 권능을 인정하는 참 신앙을 가졌음을 나타낸다. 그녀는 유대인의 우선권과 특수한 권리를 인정함과 동시에 비천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녀의 불굴의 믿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마치 상아래서 꼬리를 흔들며 주인의 호의를 기다리는 강아지를 연상시키면서 자신과 자신의 딸을 돌아다 봐 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그녀가 간청한 것은 유대인에게 허락된 은혜와 축복의 ‘부스러기’에 불과 했다.

 

예수님의 그녀의 간청에 만족하시면서 응답하셨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마태복음 15장 28절에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치병의 중심에는 믿음이 존재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라’(you may go) 라고 말씀하신 것은 치병 기적을 행하신 후 일상적으로 하신 말씀으로서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졌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 회복 뿐 만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 돌아가 일할 수 있는 완전한 구원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원거리에서도 말씀으로 치유하는 예수님의 권능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상에서 부스러기를 선사하였으나 그것이 그 집안의 완전한 치유의 기적으로 나타났다.

 

1. ‘먼저’는 유대인 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모든 민족에게 이루어진다,

 

2. ‘부스러기’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놀라운 것이었다.

'마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바다의 능력  (0) 2009.04.19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평가  (0) 2009.04.19
참으로 부정하게 하는 것  (0) 2009.04.19
부정에 대한 예수님이 반박 예증  (0) 2009.04.19
부정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0) 2009.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