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참으로 부정하게 하는 것

어저나 2009. 4. 19. 21:39

참으로 부정하게 하는 것 (막 7:14~23) (2009. 3. 22)

 

이제까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시던 예수님은 청중을 불러 모으시며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라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 율법의 예증을 들어가며 참 정신을 들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어리석음으로부터 깨어나 올바른 신앙의 실천을 촉구하는 예언자적인 메시지가 전해진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내적 성결이라는 대주제를 말씀하시려 하신다.

 

사람을 참으로 더럽게 하는 것 (15 16절)

여기서 1~23절의 핵심주제라 할 수 있는 참으로 부정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표현 기법은 물질적 부정과 도덕적 부정을 날카롭게 대조시키는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다. 사람 밖에 있는 어떤 것(물질)도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는 것과 사람 안에서 아오는 것(심성을대변하는 말, 생각, 의지, 영적 반응 등)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이 날카롭게 대비되면서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참으로 부정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 말씀속에는 부정한 음식, 부정한 물건, 부정한 짐승에 의해 사람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지키는 정결의식이 소용없게 된다. 이로서 예수님은 레위기 법전(레 11-15)이 명하는 바 정, 부정의 규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신다. 영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신다. 진정 예수님이 말하는 참으로 부정한 것은 물로도 씻을 수 없는 부정의 근본 원인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따라서 참으로 부정한 것은 자기 안에 있으며 부정한 것이 밖에 있으며 예법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하며 부정을 은폐시키려하는 모든 위선적인 정결 예법을 부정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여기서 철저한 자기 변혁, 자기 회개를 촉구하고 계신다. 그 이유는 정결이라는 것은 가시적인 의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 곧 그 사람의 인격이 양심과 영혼의 철저한 개혁을 통해 되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부정에 대해 다시 설명하심(17~23)

17절 무리가 떠나가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다.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고 계신다. 에수님은 제자들도 자기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실망스러워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비유로 함이 아니었는데도 청중들과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엇던 것은 당시의 모든 배경을 생각해 볼 때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그들의 고정관념 때문이었으리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아무튼 에수님은 인간을 더럽게 하는 본질적 원인이 ‘밖에서 들어가는 것’ 곧 ‘식물’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먹어서 몸속에 들어가는 것은 위와 창자를 통하여 배설되기 때문에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먹는 것은 배설되므로 마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은 인간 활동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지, 정, 의’의좌소이며 비물질적인 내면의 인간을 가르킨다.

 

예수님의 종합적 결론은 “모든 식물은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함축되어 있다. 초대교회는 음식에 관한 많은 논쟁들이 있었다. 복음이 전파되면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관습의 차로 상호 충돌이 일어났다. (롬 14장, 고전 8,10장, 갈 2:11, 골 2:16) 특히 이방인 선교를 한 바울은 이같은 문제에 부딪치어 어려움을 경험한다. 이러한 논쟁에 결정적 쇄기를 박는 사간이 베드로의 욥바 체험이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내가 속되다 하지 말라”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리고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함으로써 음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이방인의 삶과 구원에 대해 긍정적 판단을 하게 된다. 마가 역시 이와 같은 초대교회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정결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결론적 핵심어로 ‘식물은 깨끗하다.’는 선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초대교회의 입장은 정결에 관한한 유대 전통을 거부한 것이 분명하다. 이는 허식에 짓눌려 있던 유대인들과 이제 막 복음에 문에 들어선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자유의 현장이다. 복음이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 설명(20~23절)

정충들과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이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신다. 여기서 ‘사람’ 또는 ‘사람 속’은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마음은 사람의 감정이나 사상 또는 생각 등의 근저이며 그러한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인격의 중심부로 이해된다. 여기서 ‘악한 생각’은 인간의 모든 부정과 악한 사상과 음모가 곁들여진 의지적인 생각으로서 행동화된 죄악의 근간이다. 이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악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12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와 비슷한 언급이 롬 1:29~31, 갈 5:19~21에 나온다. 평행 본문인 마 5:19에서는 6가지만 언급되어 있는데 십계명 6, 7, 8, 9계명의 순으로 나열되어 있는 데 반해 마가는 계명의 순서와 무관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를 재구성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음란’, ‘간음’, ‘음탕’ 은 십계명 중 제 7계명에 상당하는 죄악이다. ‘음란’은 일반적으로 부정한 성관계를 뜻하는 말로서 윤리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간음’은 기혼자와 관계되는 성범죄이며, ‘음탕’은 모든 사람들이 갖는 성적 본능을 자제 없이 노출시키는 공개적이고도 부끄럼을 모르는 성범죄를 말한다.

 

살인, 악독,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 이러한 것은 사람을 향한 파괴적 언어와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서 제 6계명이 상관되는 ‘살인’이라는 말로 압축시킬 수 있다. 여기서 ‘악독’ 이란 말은 노동, 아픔, 고통이라는 뜻의 ‘포노스’에서 나온 말이다. 즉 고되고 아프게 하는 요인이 될 행위를 말한다. ‘흘기는 눈’은 악의적인 비웃음과 빈정거림으로 응시하거나 부러워하면서 시기한다는 셈어적 표현이다. ‘훼방’은 신성모독적인 욕설과 험담을 말하는 것이다. ‘광패’는 도덕적 판단력이 결여된 사람의 어리석음을 뜻한다. ‘도독질’은 제 8계명에 ‘속임(올가미, 덧 이라는 뜻)’은 제 9계명에 ‘탐욕’은 좀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으로 제 10계명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서 사람과 관련된 계명 중에서 제 5계명을 빼고 모두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 기술된 것은 모든 부정의 원천은 사람의 마음임을 강조하기 위해 대표적으로 예시되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참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형식적인 정결 의식을 통하여 부정이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는 못한다. 참으로 정결하게 하는 것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근본적 변혁인 회개뿐이다. “너희는 옷을 찟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리니.”(욜 2:13) 참된 회개를 통하여 마음의 정결을 주님은 요구하신다.

 

첫째, 회개를 통하여 인격 자체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회심‘한다는 것은 죄로부터 완전히 돌이키는 것을 말하는 데 ’인격의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 많은 신앙인들은 죄의 각성에만 머물러 있지 자기의 본성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 그래서 거룩한 하나님의 품성을 제대로 닮아가지 못한다. 오늘날 시대에는 성령 하나님을 강조한다. 또 회개를 강조한다. 하지만 2% 부족하다. 인격의 변화 품성의 변화의 문제이다. 어떻게 말하면 행위에 따른 믿음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이다. ’기름 부으심‘을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성령님이 나를 들어 쓰셨다는 것에 주목하여 자신의 심령의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품성의 변화 ’성화‘의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 능을력 말하기 보다는 자신의 성찰에 귀 기울여야 할 때이다.

 

둘째, 예수님의 삶이 파격적이었는가?

대답은 ‘아니다’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율법’과 ‘계명’을 제대로 접할 수 없었다. 그것은 상위층인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첨가 할 수도 있었고 뺄 수도 있었다. 사람의 계시를 하나님의 계시보다 우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강하였다. 말씀을 듣기만 했으니 그 중심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중세에도 그러했다.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이 널리 보급되면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가속화 되었다.

 

위험한 생각은 예수님이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삶이 파격적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 용납되리란 생각이다. 이것은 권위의 부정으로 이어져 하나의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서 ‘기준’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분명 말씀을 기준으로 하셨으며 본인 자신이 말씀이셨기에 새로운 계명을 주셨다. 그것은 그 시대의 체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하시는 것이었다. 율법의 본질의 회복을 주장하셨음을 성경을 통하여 분명히 말씀하신다.

 

셋째, 마음속의 정결은 자기 변혁인 회개에 있다.

회개는 근본적인 것이다. 구원에 관계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사죄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원죄에 대한 부분은 완전히 믿음으로 해결되었지만 자범죄에 대한 부분은 늘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정결은 부단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할 부분이다. 그래야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낼 수 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참된 정결에 대한 부분은 말하기를 꺼려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옆을 돌아다 보 면 다 죄악 투성이다. 인내하면서 이겨내기 위해서 더욱 기도해야 한다. 이길 수 있도록 더 강렬히 간구하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말씀에 귀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