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만민 평등의 복음

어저나 2009. 4. 30. 23:09

만민 평등의 복음 (갈 3 : 28) (2009. 5. 3)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라.”

 

동학사상 중에 ‘시천주(侍天主)’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한울님(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다’라는 교리입니다. 즉 만민은 평등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양반과 상민, 노비가 존재하던 시대에 이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들이 ‘반외세 자주화’의 기치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갑오농민운동’ 또는 ‘동학농민운동’ ‘동학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조선은 근대화의 길로 나아서는 ‘갑오개혁’을 이룹니다. 사회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고 조혼이 금지되며 과부의 재가가 허용되는 근대적 개혁을 이룹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있으리요. 평생 노예로 살다가 그 자식들마저 대를 물려 노예로 살게 하며 짐승처럼 사느니 이놈의 세상 한번 멋지게 뒤엎어보자.” 고려시대에 만적이 난을 일으킬 때 했던 말입니다. 노비로 사는 것이 억울하여 참지 못하여 울부짖으면서 했던 말입니다. 실패했지만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던 말입니다. 조선시대 삼대 의적이 있습니다. ‘임꺽정’ ‘장길산’ ‘홍길동’ 모두 신분제 속에서 모순과 갈등 속에서 만들어진 인물들입니다. ‘장길산’은 존재가 의문스러우나 ‘임꺽정’ ‘홍길동’은 실존 인물들입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도 노예는 존재했습니다. 시민의 수보다 노예의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노예는 ‘생사여탈권’을 박탈당한 자들 이였습니다. 성경에도 고대 이집트에도 노예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도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고대 어느 사회이든 노예가 없이는 사회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도 노예해방이 이루어진 것은 1863년에 링컨이 400만 정도 되는 흑인 노예의 해방을 선포했으나 실제로 현실화 된 것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A DREAM’의 연설이 지나고 한참이 지난 뒤에 이루어졌고 ‘오바마’의 당선으로 현실화 되어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근대 유럽은 혁명을 거치면서 시미들의 정치적 참여가 이루어졌으며 영국의 경우도 보통선거제(만 20세 이상 남녀 모두 선거권을 갖는 것)의 확립은 1920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습니다. ‘만민평등사상’은 그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면 매우 오래되었으나 현실화된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성취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회로 가보겠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으나 하나님으로 선택받은 민족으로 다른 민족과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사회 내부를 보더라도 사회의 지도적 계층에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 등 존경받으며 사회의 핵심 계층이 있었습니다. 그의 다수 백성들은 성경에서 ‘무리’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오클래스(민중)’이라고 말하는 계층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집중적으로 치유하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과히 그 당시에 볼 때에는 혁명적인 일들이었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마 5:32) 예수님의 주변에는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죄인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세리, 창녀,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 등 등 사회적 약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혁명가로 불리워졌기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기를 소망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의 왕국과는 다른 나라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바울 역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사울은 다른 사도와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와 동일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 서두에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며”(롬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및 형제 소스데네는”(고전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 1:1) 바울은 남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님을 예수님이 친히 자신에게 말씀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기독교 교리의 주춧돌을 놓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과 바울을 이간질 시키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동일한 복음의 말씀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예수님으로부터 독립시키려는 것은 본명 잘못된 일이며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복음의 핵심적인 부분인 말씀드리려 합니다. 읽은 말씀 그대로 그 시대가 감히 받아들일 수 없는 놀라운 말씀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 역시 예수님과 동 시대의 사람입니다. 사회적 조건이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 역시 그 잘못된 사회적인 부분을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로 복음 속에 사회변혁의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둘째로 종이나 자주자나, 셋째로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 선포하십니다. 바로 ‘만인평등사상’이 복음 속에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그 시대에 어느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말씀의 뿌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첫째,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동등하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계속 말씀 드립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분명 하나님의 택함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많은 민족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었지 차별화 시키거나 분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 백성들을 위해 요나를 택하셨습니다. 나훔도 그 백성을 위한 구원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에돔 족속을 위해서 오바댜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유월절에 이방 백성들을 멸시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으며 ‘할례’를 통하여 많은 이방 백성을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 중에 흑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겠지요. 하나님은 모든 백성을 차별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특권의식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꺼렸으며 그들에게 복음전하기를 주저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려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막으시며 바울을 택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소아시아와 그리스에 복음을 전하고 로마와 스페인까지 복음 전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하여 복음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이가 없음을 선언하면서 세 가지에 대해서는 제한적 조치를 취합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행 15:29) 그래도 그들은 그들의 우월한 지위를 말하려고 그리스도인 된 헬라인에게 할례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할 것을 강요하지만 바울은 그것이 본질이 아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참 자유인 되었습니다. 복음은 민족과 나라를 떠난 온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말씀드립니다.

 

시간이 되면 우리 몽골 자매들에게 하나님이 몽골인을 이미 ‘칭기즈칸’이전에 사랑하셔서 몽골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역사적 사실들을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칭기즈칸’의 아내 혹은 며느리가 네스토리우스교(경교) 사람이었으며 당나라 이후에 사라진 경교를 다시 중국에 들이는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학계에 널리 퍼져있습니다. 실지로 역사가들에 의해 몽골에 십자사가 세워지고 ‘칭기즈칸’의 양아버지인 케리이트 토그릴과 그 부족이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이었으며 심지어 ‘칭기즈칸’의 아버지인 ‘예수카이’도 그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원대에는 네스토리우스교가 융성하였으며 상당히 관용적으로 받아들어져 널리 퍼졌다는 게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독교에서는 이단으로 배척당했지만 페르시아, 중앙아시아와 몽골과 중국에 널리 퍼졌던 네리토리우스 기독교(경교)에 대한 자세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현재 자료를 수집하고 있으며 그것이 한국에 전래되었는다는 유물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지금 궁금하신 분은 숭실대학교 기독교 역사박물관으로 인터넷 접속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시아도 유럽과 동일하게 사랑하셨습니다. 복음은 유럽이나 아시아나 아프리카나 어느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둘째, 종이나 자주자에게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종은 자신의 모든 것이 주인에게 예속되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신명기 법전에도 종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엄청난 사회적 차별이 있는 그것을 예수님과 바울은 복음으로 해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종의 형체가 되셔서 인간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로마 감옥 만난 ‘오네시모’를 복음으로 새롭게 같은 형제로 재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가 원래 주인인 ‘빌레몬’에게 도망쳐 온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것을 편지로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이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간청을 하려고 합니다. 나 바울은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이요, 이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로 또한 갇힌 몸입니다.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두고 그대에게 간청합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빌레몬서 1:9~11)

 

그러나 이제부터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교우로서 그대와 같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는 내가 특별히 사랑하는 교우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적으로 보든지 주님을 믿는 신앙의 견지에서 보든지 그대에게야 그가 얼마나 더 귀중하게 생각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생각하면 나를 맞이하는 것과 같이, 그를 맞아 주십시오.”(빌레몬서 1:16~17 표준새번역) 바울사도는 복음 안에서 사회적 신분의 경계를 허무셨습니다. 복음은 사회적 차별과 경계를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이 존귀함을 받을 수 있는 새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게 2000여 년 전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종들이 실질적으로 해방된 것은 불과 50년에서 60년 전 일입니다. 이런 혁명적인 놀라운 일들은 복음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은 그 나라의 사회와 문화를 변혁시키는 놀라운 일들을 행함을 믿습니다. 복음은 ‘차별’을 없애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차이’는 인정합니다.

 

셋째는 남자나 여자의 성적 구분을 무너트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저희 교단의 총회장 되시는 분이 대학원에서 설교하면서 “기저귀를 차는 분들이 어떻게 강단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란 발언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여성 단체, 교회 여성 사역자, 신학생들에게 큰 곤혹스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사회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가히 별로 혁명적이지 않습니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크게 증가하여 대부분 공직에서 선두 그룹을 형성하는 시대가 되어졌습니다. 감히 누가 여자를 ‘그대는 연약한 여자라 부르리요?’ 이제 여성이 중심이 되는 시대를 주닙해야 할 것 같습니다. ‘피메일리즘’의 시대로 이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이미 예수님 시대에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 3절에 보면 “또한 악귀를 쫒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이 여자들이 예수님을 섬기며 제자그룹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시대에도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3절 4절에서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그렇게 하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아내가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호존중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진 존재가 아니라 서로 동등함을 위하며 함께 세상을 만들어져 가는 존재로서의 인식이 엿보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함께 동역을 했다는 것을 성경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 시대에 여자들도 동등하게 설교도 하고 여러 가지 교회 일들을 나누어 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 여자의 권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로마 시대에 귀부인들은 반지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것은 그 여자가 몇 번 결혼 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에는 여자들이 호주가 될 수 있었고 재산 상속에 있어서도 남녀가 동등했습니다. 지금 시대의 관점으로 과거를 되돌아보면 그 시대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 시대를 바르게 이해한 후 관찰한다면 바른 이해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은 성적인 구분을 극복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의 유교 사상으로 남녀의 구분이 엄격했고 남자들이 부모의 제사를 봉양하므로 경제권의 상속이 남자에게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여성의 권위를 매우 낮게 만들었습니다. 현재의 상황은 유교의 문화의 상속과 서구적인 사상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갔으면 합니다. 저도 사역자로서 아내의 역할은 제 역할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전 사모로서의 역할이 점차 사역 중심적 역할 모델로 바뀌고 있는 중입니다. 말씀도 전하고 교육과 상담을 하는 형태로 변화하는 시대입니다. 교회에서 여성도들의 역할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섬세한 여성들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 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이제 말씀의 중심점에 도달합니다. 복음은 분명 하나이고 이를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의 확실성을 깨닫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터전 위에서 사역을 감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많은 신앙의 선배의 터전위에 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터 닦아 놓았습니다. 우리는 그 위에 신앙을 세워나가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두 마음을 가져서는 되지 않습니다. 한 마음 한 생각으로 주님께 내달려가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절부터 7절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한 희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침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분명 한 사람에 의해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더욱 하나 되기 위해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복음의 민족, 신분, 성별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를 위해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서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는 영광교회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놓여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삼결줄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교회를 함부로 할 수 없는 강력한 능력을 소유한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저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저를 만나는 학교의 사람들이 목사님 어떻게 사십니까? 라는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미약하게 보였으면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교회의 권위를 세우는 것은 목사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고 여러분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라하게 만드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희망차고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영광교회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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