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힘들 때 자연을 보라

어저나 2009. 5. 8. 13:55

힘이 들 때 자연을 보라 ! (마 6 : 25 ~ 34) (2009. 5. 10)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고 여섯 째 날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신의 뜻대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좋아하던 창조세계는 아담의 타락으로 빛을 잃게 되었으며 그 이후 인간의 회복과 자연의 회복을 동시에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은 자연의 파괴를 가져왔으며 만물은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은 인간에 의해 다스림을 받게 되었으며 최종 소비자로서의 인간은 자연을 부분별하게 다루고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정복하여라’ 의미의 해석에 따라 자연을 인간 통치의 대상으로 보는지 아니면 ‘청지기(조정자)’로서의 인간의 역할에 주목하게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자연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선물이고 자연을 함부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유기적 관계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연을 인간과의 공존의 대상이며 공생하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지난 주 30도를 웃도는 낮 기온으로 이어졌습니다. 밀양이 기상 관측 이래 5월 기온으로 32.3도로 최고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금세기 말에는 제주도 남해안 울릉도가 겨울이 없는 열대지역으로 변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지구가 온난화가 다른 지역보다 우리나라가 더 심각하다는 말입니다. 주범은 급속한 도시화라고 합니다. 아무튼 자연이 몸살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로 볼 때 인간이 자연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자연을 다스린다면 이런 ‘온난화’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성장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통치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위임받은 자연을 지기고 가꾸는 청지기의 모습이 분명합니다.

 

오늘은 자연 속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있으며 자연도 하나님의 통치 대상으로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 사랑을 가질 수 있음을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 싶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날’이 지났습니다. ‘어버이날’도 지났습니다. 그래도 ‘스승의날’ ‘성인 주일’ ‘청소년 주일’ 등 가족과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는 기쁜 달입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힘들지 않나요?’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헉헉대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요? 산에 아키시아 향은 맡고 계시는지요? 산에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아키시아는 생명력이 강해서 우리나라 남쪽에는 지천으로 깔려있어요. 이러한 변화의 모습과 향기들이 변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느끼고 간직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자연은 말없이 묵묵히 우리들을 감싸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와는 상관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간다면 좀 억울하지 않은가요?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말 큰 축복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모두 축복입니다. 그것을 잊고 있다면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향기로 느끼기도 하고 마음으로 간직할 수 있는 축복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언제 어렵지 않은 적이 있었나요?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뉴스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힘들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추석과 설날이 되면 경기가 힘들어서 사람들이 명절에 드는 비용을 줄여서 시장에 사람들이 적다고 상인들이 아우성치고 장을 보러 온 사람들 모두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래도 다 차사고 집 넓히고 가전제품 바꾸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10년 동안 살림은 계속 늘려 왔는 걸로 보입니다. 그래도 힘들다는 말이 입에 배겨서 사람들 만나면 ‘진짜 힘들다’ ‘힘들어 못 살겠다’ 그르면서 스스로 위안을 주면서 살아왔던 걸로 기억됩니다.

 

근데 저는 ‘IMF’때는 전혀 몰랐습니다. 경제가 어렵다는 걸 느끼지 못했습니다. 워낙 가난했으니 그냥 남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한 일 년 지나고 나니까 사람들 모두 툴툴 털고 일어서 언제 그랬느냐 식으로 다 힘차게 사는 모습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리고 10년 지난 뒤에 온 경제위기 앞의 위기와는 성격이 다른 위기인 것 같습니다. ‘IMF’는 동남아시아와 우리나라의 위기의 이였기 때문에 슬기롭게 우리의 허리를 졸라매는 것으로 해결이 된 것 같습니다. 이번의 위기는 세계 최대의 강국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발생한 것이라 그 파장이 세계 전역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경제적 위기는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극복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88만원 세대’란 말이 사용되기 시작됐고 현실화되었습니다. ‘청년실업’의 단적인 예를 발해주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문제도 그렇구요. 수요일 라디오에 어떤 택배회사의 직원이 노동현장을 고발하고 자살한 사건에 대해 들었습니다. 우리사회의 노동자에 대한 배려에 있어서 어려움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힘든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서울에 가면 가장 오염된 터널이 있는데 ‘남산터널’이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지금 가장 힘든 시기에 직면해 있고 지금 통과하는 중에 있습니다. 힘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학원에 있기에 늘 불황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근무하는 10여년 중에 가장 어렵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지만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놓고 기도하는 중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 부분에 있어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제가 경험하고 있듯이 여러분 주위에도 정말 고통을 경험하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말씀과 기도 외에는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근면, 성실한 자세도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가정의 달이 기뻐야 하는데 별로 기쁘지 않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위기가 동시에 왔기 때문입니다. 급속한 사회변동으로 인한 가족해체가 이런 현실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안은 성경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길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나가길 소망하는 마음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어떤 염려를 하고 있느냐?

‘기우’(杞憂)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기나라 사람 ‘우’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어떻게 하느냐를 염려하는데서 유래된 한자성어입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근심을 ‘기우’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 보니까 우리가 아니 제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의식주’의 문제입니다. 그중에서도 ‘식’ 먹는 것의 문제가 제일로 심각합니다. 여기에서 이런 것이 해결되지 않았을 때를 절대빈곤의 상태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경험하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예수님은 근본적인 문제를 언급하시면서 “자연을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느냐? 왜 염려하느냐? 너희 들은 자연의 그 무엇보다 존귀한 존재인데 너희를 굶기겠느냐? 옷을 헤지게 하시겠느냐? 이것 걱정은 하지를 말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실상 어느 누구도 염려함으로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목숨의 연장 여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경험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또 예수님은 “자연을 보라!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말씀하십니다. 생각하여 보라! 에서 공중의 새를 '보라'란 말의 원어는 단순히 눈을 뜨고 살펴본다는 의미인데 비해 이 말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성장을 면밀히 관찰해 보라는 의미입니다.‘수고도 아니하고’그 생명까지 짧아 곧 없어질 풀에게까지 꽃으로 입히실 만큼 풍부하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길쌈도 아니하고’ 그 들풀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의인법적 표현입니다.‘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솔로몬조차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꽃 하나 하나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범칙이 숨 쉬고 있으며 신적인 기운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솔로몬도 이와 같이 아름다운 것으로 자신을 장식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말입니다.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데 너희에게 내가 더 큰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보고 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조용히 꾸짖듯 말씀하신 것으로서 모든 근심은 바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不信)에서 비롯됨을 역설한 것입니다. 특히 우리 신자는 물질적인 궁핍과 가난으로 낙심하여 믿음이 적은 자란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염려와 근심은 모두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오직 모든 필요를 홀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신앙으로 오늘의 불만족스럽고 불공평한 이 현실을 진실 되게 그리고 의롭게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불평과 불만, 불만족 등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책망을 받습니다. 한 평생 동안 성공과 출세만을 추구하다보니 참된 자연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 사랑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마냥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는 책망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일생을 하나님을 향해 뻗어 올리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조차 힘들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미물들 속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어린이날’저는 욕심을 좀 부렸습니다. 아이들에게 유교의 전통문화를 보여주기 위해 하회마을로 가지고 제안했습니다. 참 멋있고 좋았습니다. 한국의 미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준서와 준하는 아직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시간은 걸리겠지만 조금 지나고 나면 아님 제 나이가 되어서 완전히 이해할 날이 오겠죠. 아무튼 하회마을의 전부를 돌아보는 데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유교 전통의 마을에 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너무 소담스럽게 종탑과 기와로 아우러진 멋진 조화였습니다.

 

하회마을과 함께 간 곳의 저의 고향입니다. 그날 오후에 소나기가 세차게 왔습니다. 불과 10km인데 고속도로에서 비오면 못가는 게 아닌 가 걱정했습니다. 남안동 IC에 접어들자 비는 멈추었습니다. 길치인건 다들 아시겠지만 고향 길이라 걱정은 안되었습니다. 저희 찾은 곳은 ‘몽실 언니’와 ‘강아지 똥’의 저자인 ‘권정생 선생님 생가’였습니다. 팻말이 없어 당황했습니다. 주민들에게 물어보았는데 거기에 작게 ‘권정생 선생님 생가 입구’팻말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한 번 더 물어보았습니다. 그길로 들어가면 마당이 바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들어갔는데 제방공사하고 있었는데 저는 더 가야할 것 같아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있는 이곳이 아내는 TV에서 봤던 집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얼마 후 정말인걸 알았습니다. 방문 앞에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정도로 쓰인 ‘문패’라고 해야 하나요. ‘권정생’이름 석자가 보였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문운 잠겨 있었고 8평 정도의 집, 개집, 뒷간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아동문학의 큰 어른이신 그 분이 사시던 곳은 하나도 꾸밈없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의 유언대로 기념관도 짓지 말고 자연 속에 그냥 두라는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집에서 바로 그가 종지기로 있었던 일직교회가 보였습니다. 일직교회에 들러보니 종탑이 있었습니다. 전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데 아내가 종탑 옆에 선생님의 글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새벽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도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 이 글 하나만으로도 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출생하여 한국으로 와서의 빈곤한 삶, 결핵으로 고통,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방황하다 다시 작은 방을 얻어 종지기로 20년 이상을 사신 삶을 돌이켜 보며 자연의 작은 생명체 하나 하나에 대한 사랑과 무생물인 돌까지 생각하시고 이 땅에서 외롭고 힘든 분들을 위하여 그들을 사랑하며 위로하기 위해 종을 울리셨는 것 같습니다. 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는 매일 새벽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소리를 작은 마을에 울려 퍼지게 했던 것입니다. 소망을 담고 말입니다. 뒷부분에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에는 다른 이들과 같이 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걸로 저는 해석했습니다. 차디찬 새벽에 돌도 추울테고 벌레들도 차가움을 이기고 있고 힘들 사람들은 생활의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같이 하겠다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그랬기에 그의 인세를 가난한 아이들과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에게 기증했습니다.

 

그의 삶의 마지막을 통해 예수님의 ‘자연을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는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제가 아니 우리 모두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발버둥치는 것 아닌가? 새삼 말씀 묵상하면서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이 무릎 꿇어야 할지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할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유하고 건강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흔하디 흔한 세상을 미물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이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문의 밖의 길 - 예수께 나아가자  (0) 2009.05.22
세례의 의미  (0) 2009.05.15
만민 평등의 복음  (0) 2009.04.30
마르다와 마리야의 헌신  (0) 2009.04.25
천국을 소유하려면  (0) 2009.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