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영문의 밖의 길 - 예수께 나아가자

어저나 2009. 5. 22. 15:02

영문 밖의 길 - 예수께 나아가자! (히 13 : 12 ~ 17) (2009. 5. 24)

 

중학교 3학년 때 마산 무학산 기도원에 수련회를 갔습니다. 수련회 기간 중에 무학산 정상으로 다 같이 올라갔습니다. 그 산 정상에는 ‘배 바위’가 있었는데 알려지기로는 ‘주기철 목사님’이 기도하시던 곳이었습니다. 목사님은 1936년 평양 산정현 교회로 가시기 전에 마산 ‘문창교회’에 시무하셨습니다. 아마 이 때 기도하신 처소였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자세히 이런 역사적인 사실은 모른 채 그곳에 가면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실 때 바위가 십자가 모양으로 갈라져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저는 좀 무서움이 많아서 그 바위에서 기도하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아무튼 그 기도원에서 성령 충만을 받은 저와 친구들은 지금도 믿음의 친구들로 같이 지내오고 있습니다.

 

중 3때 많이 불렀던 찬송이 ‘영문 밖의 길’입니다. 새찬송가 158장에 실려 있습니다.

 

(1절)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언덕 위(영문 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신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 쓴 가시관과 몸에 걸친 붉은 옷에

       피 흘리며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부르면 절로 눈에 눈물이 거렁 거렁 해졌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는 일본 제국주의 침탈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사참배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을 때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위하서 강요한 거짓 종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계가 강력하게 신사참배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계에서도 신사참배를 용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분들이 신사참배의 강요에 이기지 못해 변절하던 그 시대에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임을 아시고 조선을 강탈하여 식민지화 시킨 것에 대한 일제를 용서치 않으시고 신사참배에 반대하면서 다섯 차례나 검거되시어 옥고를 치르신 분이 바로 주기철 목사님이십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차 검거에서 석방되어 나왔을 때 그는 산정현 교회 신자들에게 ‘다섯 종목의 나의기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둘째, 지루한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이 설교를 들은 산정현교회의 2000여 신자들은 모두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1938년부터 1944년 마지막 순교를 할 때까지 모두 5차례 총 5년 4개월간의 투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1940년 6월 다섯 번째로 투옥되어 1944년 4월21일에 순교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그는 유서를 써서 집에 보냈습니다.

“여드레 후에는 아무래도 죽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몸이 부어올랐습니다.

생명보험을 든 200원을 영진이 장가 비용으로 사용하고

남은 돈으로는 막내 광조를 공부시키시오.

 어머니 봉양 잘 하십시오.

어머니께는 죄송합니다.”

 

이 유서를 받아든 오정모 사모님은 “목사님이 아직까지 가정에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런 것을 보낸 것이냐?”고 말했다 합니다. 이런 믿음의 아내가 있기 때문에 순교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믿음이 그로 하여금 순교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 신앙이 잘 나타나 있는 찬송이 바로 ‘영문 밖의 길’입니다. 이 찬송3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눈물 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영문 밖에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문 밖의 길

‘영문 밖의 길’ ‘영문’은 Camp, Garrison 병영의 문을 가리키는 말인데, 특별히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천막생활의 전체, 예루살렘에 있어서는 성문 밖 오물을 불사르던 골고다의 언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을 말합니다. 그래서 새찬송가에서는 영문이라는 말 대신에 ‘언덕 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가야할 길이지만 그 고통의 길에 들어서길 주저하는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8장 43절에서 35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이 희생되실 것과 또한 제자들 역시도 그 길로 가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두렴 없이 가야 할 길 그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기자라 말함은 성경은 저술하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베드로’ ‘바나바’ ‘바울 사도’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뒤를 따라갔던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히브리서는 유독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면서 희생 제물로 돌아가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끝장인 13장에 마지막 권고의 말씀 속에서도 ‘영문 밖의 길’을 말씀하며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가 가는 이 길이 결코 아무나 가고 누구나 가는 넓은 길이 아님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십자가의 신앙 때문에 순교의 길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북한의 실상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도 북한에선 지하교회들이 핍박받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 풀러신학대에 제출된 박사논문이 북한 지하교회에 관한 주제와 구체적 통계를 다루고 있어 주목된다. 논문 ‘북한 지하교회에 대한 선교학적 이해’는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북한 내 교회와 목회자들의 실상을 다루고 있다. 이반석 목사(모퉁이돌선교회)가 금년 5월 이 대학에서 수여할 박사학위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에 수록된 여러 가지 사건 중에 ‘평양 하수구 지하교인 사건’ 카타콤 사례는 1967년에 드러났다. 그해 9월경 평양 일대에 큰 홍수가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수년간 평양의 지하 하수구에서 살아온 기독교인 집단이 발각되는 일이 발생했다. 평양 시내가 홍수로 침수되자 종교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던 기독교인들이 지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의 행색을 이상히 여긴 북한 경비정에 의해 모두 체포됐다. 당시 평양에 살던 탈북민 이민복 씨(자유북한인연합 대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10살 때인데 대동강이 범람해 둑이 터지면서 아파트 아래층에 잉어가 들어와 잡힐 정도로 온통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때 6·25전쟁 때부터 20년 가까이 하수도 속에 숨어 있던 ‘악질 반동들’이 나타났는데 햇볕을 못 봐 얼굴은 창백하고 머리도 치렁치렁 길게 늘어진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지하에 살던 기독교인들로 밝혀졌고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저주하며 살려 달라고 당 앞에 빌 줄 알았는데 하늘을 우러러 하나같이 초연하게 죽음을 맞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위 내용은 ‘미래한국’ 김창범 편집위원·북한구원운동 사무처장이 ‘다음 창골산 봉서방 카페’에 올린 글 중 일부입니다.

 

북한 선교 밀사들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서 ‘한 손엔 성경과 한 손엔 식량’을 갖고 북한을 융단폭격 하고 있다. 성경을 요청하는 북한 인민군장교나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도 생겼다고 한다. 지하 교인 수는 최하 1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1995년 이후 3,720명이 처형될 정도로 지하교회가 급속히 확장되는 중이라고 한다.”(크리스챤 투데이 2008. 11. 22)

 

북한에서 많은 이들은 십자가의 신앙과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의 말씀과 같이 영원한 도성을 소망하며 순교의 잔을 마실 때 웃음으로 기쁨으로 받았음을 많은 이들의 증언을 통하여 밝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신앙으로 살기를 소망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말씀을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로 말미암아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15절)

이 찬미의 제사는 ‘예수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받으신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온전하게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늘 우리의 생활 가운데 항상 드려지는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제사는 구약의 율법을 쫓아 짐승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우리의 생명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성취된 구원에 대한 ‘입술의 열매’이여야 합니다. 입술의 열매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 시 사용하는 '말'에 대한 셈어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참된 제사를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의 찬양이 잘하고 못하고 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 대한 고백이냐가 관건입니다. 간혹 예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재능이 되며는 절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늘 천군 천사의 호위를 받으시며 그 천사들의 찬송으로 영광중에 거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중 예수 그리스도도 찬송 받으시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5장 11절 14절 말씀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의 고백을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입술의 고백이 믿음 안에서 증거 하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둘째,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16절)

누구나 선을 행해야 된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민족에게든지 ‘선’을 행하야 된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오늘날에 강조되고 있는 것은 ‘공동선’입니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그 개인의 이익은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공동선의 추구로 인해 사회가 발전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공동선의 추구는 사회 구성원 모두를 존중한다는 의미이기에 이미 초기 기독교에 나타나고 있던 현상들 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선을 행함’의 원어의 뜻은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든 친절한 행위를 가리키며, ‘서로 나눠 주기’에 해당하는 원어의 뜻은 돈이나 물건은 물론 타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누는 관용을 가리킵니다. 초대 기독교는 분명 배타적인 집단이 아니라 관용으로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아름다운 공동체였습니다.

 

이 공동체의 본질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은 박해가 끝나고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 되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저질러졌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교회 안에서 자족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사회를 향해 열린 눈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북한의 지하교회에 대해 증언을 들었습니다. 북한이 가장 힘든 ‘고난의 행군’ 시절에 약 2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 당시에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1994년경에는 북한이 먼저 남한의 수해 입은 사람을 위해 도와왔습니다. 철저히 위장했던 시절입니다. 서서히 탈북자들이 늘어나면서 세상에 그 실상이 들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에 의하면 북한에 많은 사람이 굶어죽는 순간에 지하교회 사람들은 굶어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힘든 중에는 그들은 십일조를 했으며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은 물건으로 십일조를 드렸고 그것으로 지하교인 중에 힘든 사람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였으며 남을 위한 선행을 하였으며 나눠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살아남았습니다.

 

나눔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왜 공동선을 강조합니까? 혼자 살려고 하면 오히려 죽습니다. 인간이 왜 힘들어집니까? 자신 혼자 살아남으려고 하니 힘들어진 것 아닙니까? 자연이 우리에게 경고장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은 공생의 관계속이 있습니다. 우리는 넓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통하여 사회와 자연을 동시에 바라보는 안목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철저한 제자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키워나가며 그것을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이루기 위해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그 제사를 기뻐하신다고 말씀에서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셋째, 지도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말씀 속에 담긴 의미를 깊게 살펴보면 그 인도하는 사람들이 먼저 바르게 서야 합니다. 순종과 복종만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 만큼 존경받을 수 있는 권위를 갖추어야 합니다. 17절의 ‘경성하기를’ 이 말에 주목해 봅니다. ‘경성하기를’의 헬라어 ‘아그뤼프누신’은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목자상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주로 종말론적인 ‘깨어 있음’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영적 생활과 복리를 위해서날마다 깨어 있어 돌보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존경과 순종을 받을 만한 권위가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존경을 받고 복종함을 받는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부여하신 목회적 권위와 책임감입니다.

기독교 TV에서 대통령 경호원이었던 김재원 장로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는 간증집인 ‘나는 하나님의 경호원입니다.’에서 자신은 목사님과 하나님을 사명감 속에서 죽기까지 하면서 보호하려고 했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는 대통령을 그 사람으로 경호한 것이 아니고 그 ‘권위’를 인정하면서 권위를 세우기위해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총알받이’라도 되겠다는 충성심을 강조하였습니다. 그의 기도 제목 중 첫 번째는 자신이 섬기는 목사님에게 임종 예배를 부탁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충성하며 섬겼던 목사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일 년 52주 ‘주일 성수’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이제 나이가 많으신 분이라 52주 ‘주일 성수’ 한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지도자가 마땅히 존경받기 위해서는 자신 역시 노력해야 합니다. 한국교회 성장 요인 중의 하나는 목사님들이 자기 양떼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목자’처럼 이리와 삯군에게 빼기지 않으려고 정말 기도하시면서 노력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설교 준비하면서 저에게 준 메시지였습니다. 정말 사랑으로 섬기며 기도하며 애써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지도자는 그냥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참 목자상’ 가지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 신앙’은 우리에게 주어진 최대의 고난이자 최대의 축복입니다. 저와 형제 자매님들은 십자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회복되어지며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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