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와 개신교 유적탐방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하는 곳(대구칠곡교회)

어저나 2009. 5. 18. 18:39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곳 - 대구 칠곡 교회

 

‘상전벽해(桑田碧海)’ 아파트의 숲으로 이루어진 곳,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아담한 곳,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인구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20만 이상이라 한다. 온통 얕은 산과 논으로 이루어져 있던 이곳이 개발되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었다. ‘신도시’ ‘자족도시’ 대구에 있는 부도심이다. 이제 옛 ‘칠곡 읍’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다들 ‘칠곡’이라 부른다. 지금도 군데 군데 고층의 아파트가 층을 올리고 있으며 사람들의 입주를 기다린다.

 

경상북도 북부지방(군위, 의성, 안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야 하는 중심지임에 틀림없다. 그랬으니 칠곡읍이 위치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무척이나 먼 곳이었다. 내가 대구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이곳이 시골로만 알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80년 말 90년 초)에 예비군 훈련 받으러 올 때 물어 물어 찾아온 곳이었다. 그러다 직장 때문에 이곳에 이주한 때는 2001년 이었다. 그때에는 3지구가 개발 중이어서 2지구가 중심이었다. 이제는 3지구의 개발이 다 되어서 모든 중심이 3지구로 이전되었다. 영화관, 활인마트, 음식점 등 많은 시설이 이주하여 대구 시내보다 더 활력이 넘치는 곳이다. 특히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이곳에도 기독교의 선교를 말해주는 중심교회가 있다. 바로 ‘대구칠곡교회’이다. 교회의 역사는 100년을 더 거슬려 올라간다. 대구지역의 선교의 중심에는 대구 제일교회가 있다. 물론 이곳을 선교한 사람들도 ‘남성정교회(제일교회)’의 선교사들이었다. 남성정교회의 설립이후 교회의 성장이 나날이 확장되어가자 안의와(아담수) 선교사와 서자명 조사는 경산, 영천, 청도군을 담당하여 순회 전도하며 교회를 세웠고, 부해리(브루엔) 선교사는 김기원, 김영채, 이희봉 조사와 함께 선산, 군위, 김천, 칠곡군을 담당하였으며 맹의와(맥팔랜드) 선교사는 김호준, 서성오 조사와 함께 고령, 영일, 경주, 청송 지역을 담당하였고 어드만 선교사는 김성삼 조사와 함께 군위, 의성, 선산지방을 순회 전도하며 교회를 세웠다.

 

 

부해리 선교사의 전도하는 모습

 

칠곡지역 선교는 부해리 선교사가 당나귀를 타고 조야동 뒷산 고개(요즘은 팔달교, 매천대교, 국우터널 등이 있다)을 넘어 팔거들을 지나다가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부인에게 “야소(예수)를 믿으십시요”라고 전했을 때 한 부인이 “야소를 믿으면 병이 났습니까?” “예 그렇습니다.”“야소를 믿으면 내 병도 고칠 수 있습니까?” “예 야소를 믿으면 무슨 병이든지 고칠 수 있지요” 이 부인이 바로 ‘조분이’ 성도이다. 이 부인은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중이었다. 이 때가 1903년 3월이었다. 이후 조분이 성도는 김태하 성도와 함께 ‘남성정 교회’ 로 출석하게 되었다. 30리 길을 밥을 싸다니면서 신앙을 키워나갔다. 그 때 금호강에는 ‘외나무 다리(현 조야교)’ 밖에 없어서 비가 많이 오면 교회에 가지 못하고 다리앞에서 통곡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런 어려움을 겪던 중 조분이, 김태하 성도는 1904년 3월 17일 교회를 세우기도 뜻을 모으고 기도회를 가졌으며 신자가 증가함에 따라 1905년에는 김태하 성도의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05년 김태하 성도의 소유 밭 500평에 초가 4간 두 줄로 예배당을 지어 중간에 간을 두어 남녀 좌석을 구별하여 예배를 드렸다. 공식기록에는 1905년 어도만 선교사가 설립자로 김성삼 조사와. 김태하 성도가 영수(요즘 장로), 이종태집사로 시무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10년에 신자의 수가 50명으로 증가하자 동천동 이종태 성도의 소유의 땅에 10간의 교회를 신축하여 성장하여 나갔다. 1911년에는 총회가 조직되어 지자 경상노회에 소속되어졌다. 1913, 2월에는 읍내동에 초간 4간을 매입하여 에배당을 이전하였고 1916년 기와집 6간으로 확장 개축하였으며, 1916년 12월 27일에는 경남북 노회가 분리됨에 따라 경북노회에 소속하였으며 1920년에 이종태 집사를 장로로 장립하였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로 신앙의 어려움을 겪었으며 교회 종을 헌납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교회는 1935년이 주일학교를 조직하였으며 주일학교는 계속해서 성장해 나갔다.

 

칠곡교회에도 한국교회의 분열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장로회’와 ‘예수교 장로교’의 분열이다. 칠곡교회는 이 시기에 두 교회가 존립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칠곡 교회 100년사는 ‘앞교회(기장측)’ ‘뒷교회(예장측)’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어려움을 1962년 5월 1일 명봉산 산상 합동 야외예배를 드리면서 해결할려는 노력을 기울여서 교회는 소속을 두지 않고 중립상황을 유지하면서 교역자도 ‘기장’ ‘예장’ 목회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섬기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72년 9월 ‘최치규 목사’가 부임하면서 12월에 ‘신용협동조합’과 ‘유치원’을 설립하였으며 교회창립 70주년을 기념행사를 준비하였으며 1974년에 ‘경북노회(통합)’에 가입하게 되었다.

 

 

1955년에 신축한 예장교회 모습(구 교육관)

 

1975년 8월 7일에 성전기공예배를 드리고 1976년 5월 22일에 성전 봉헌 감사예배를 드렸다. 1983년에는 교육관을 신축 하였으며 2004년 2월 29일에 새 예배당 기공예배를 드렸으며 2004년에는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서 캄보디아 씨엘립-툴렙삽 대구 칠곡 선상 교회를 세웠다. 2004년 12월 25일 새 예배당에서 성탄절 첫 예배를 드렸으며 2005년 2월 27일 입당하였다.. 현재 새 교회와 구 교회당 옆에 크고 웅장한 교육관을 세우고 있으며 2009년 8월 완공 예정에 있다.

 

크지 않는 작은 칠곡지역에 복음이 뿌리내리고 결실을 맺고 있다. 한 사람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현재의 칠곡교회를 있게 했으며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애썼기에 지역의 큰 자랑거리가 된 것이다. 칠곡교회의 역사는 우리교회의 역사이며 우리 신앙의 표적이다. 교회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세워나가야 한다.

 

대구칠곡교회 100년사 참고하였으며 책의 내용을 실었음을 밝힌다.

 

대구칠곡교회 현재의 모습 

 

칠곡교회 구건물(현재 유치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구교회 현교회의 조화로운 모습

 

새교회의 종탑안에있는 종은 구교회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신축중인 교육관 8월중에 완공된다.

 

 

 교회 주변에는 아직도 70년대의 고목길이 정다이 있으며 구멍가게도 있다,

 

아직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고 있는 곳이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 땅이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루어져 가는 공간이다. 우리의 몸이 있으며 우리의 영이 있으며 우리의 생이 있는 곳이다. 우리가 벗어버릴려고 하여도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이 공간에서 살아야 한다. 살을 비비며 살아가야 한다. 또 100년 아니 10년이 지나도 변하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사람들의 신앙(믿음)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들의 노래는 계속되어질 것이다. 스쳐지나가는 곳이지만 내 속에 이 훈훈한 하나님의 마음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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