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와 개신교 유적탐방기

자천교회(경북 영천시 화북면 소재)

어저나 2009. 5. 22. 17:29

자천교회 이야기

 

 

30도를 웃도는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영천시 화북면으로 향하였다. 사전에 교회를 찾는 길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기에 별 어려움 없이 찾아가리라고 기대했지만 ‘북영천 IC’를 나오자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머뭇거리다 ‘영천댐’쪽으로 좌회전하였다. 불안한 마음에 이웃 주민들에게 ‘화북면’으로 가는 것이 맞느냐고 묻자 다시 오던 길로 가라는 것이었다. IC에서 빠져나와 바로 U턴하면 되었다는 것이었다. 쭉 그 길을 달리면 화북면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다시 국도 길로 들어서니 길마다 ‘보현산 천문대’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이 길로 가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계속 달렸다.

 

한 15분 정도 자나니 화남면을 지나 화북면으로 들어서게 되었고 길가에 수 백 년쯤 되어 보이는 나무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오리장림(천연기념물 제 404호)’이었다. 이곳이 오랜 전통의 마을임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전통의 마을이었다면 유교적 색채가 짙은 곳이었을 것인데 이곳에 유서 깊은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오리장림을 지나 화북면 면사무소가 위치한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알려진 교회이니까 커다란 안내 표지판이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크지 않게 쓴 ‘자천교회 입구’라는 안내판을 만나게 되었고 좁은 동네 길로 접어들었다. 전통이 강한 마을인지라 흙 돌담 위에 기와를 얹은 골목길을 돌자 바로 자천교회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보통 ‘성지’라 하며는 사람들도 붐비고 신비에 가득 찬 조형물이 있으며 참배할려는 사람들의 모습과 기념물을 팔려는 가게도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할 것이다. 도착한 그곳은 어느 누구하나 반겨주는 이 없었다. 그냥 한적한 시골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그저 평범한 곳이었다. 만약 내 이이들에게 설명할 때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교회를 둘러보고 또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고 ‘신성학당’을 돌아보면서 이 크지 않는 교회를 두고 설명하고 가르쳐야 할 것을 떠올리게 되었으며 이곳을 왜 방문해야 하는 지와 삶의 현장 속에서 알아가야 할 것들을 정리해보았다.

 

노귀재에서의 만남

    

          교회 앞 마당에 설립자 권중헌 장로의 묘소가 있다.

 

먼저 교회를 설립의 역사를 살피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는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는 데 그것에는 사연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역사적 사건이 자천교회 홈페이지(www.jacheon.net)에 기록되어 있는 ‘노귀재에서의 만남’이다. 이 사건은 암울한 대한제국 말기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 설립자인 안의와(아담스)목사와 자천교회 설립자인 권혁중 장로와의 만남이다. 이곳에서 복음이 전해졌고 그 복음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게 되었다. 이 역사적 사실은 유서 깊은 자천에 기독교 역사를 쓰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대구에서 영천을 지나 청송에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길을 가던 아담스목사와 경주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권혁중이 경주에서 청송군 현서면 수락에서 살다가 새 보금자리를 위해 대구로 향하던 중에 낮선 이방인인 아담스의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되고 복음의 능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유교 문화에 젖어있던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역사하는 순간이다.                                                                                                                                                   

  

 

장로 권혁중

 

그는 복음 받아들인 뒤 대구로의 이주를 포기하고 보현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신촌면 자천리에 작은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머물며 안의와 선교사와 왕래하면서 성경 말씀을 배웠으며 작은 초가집의 사랑방이 자천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낮에는 아이들에게 한학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성경공부를 하였다. 그는 상당히 개방적인 사람이었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난 뒤 지신 노비들의 문서를 태워버리고 계급의 신분의 벽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나갔다

 

권혁중 장로는 1920년에 경북노회 장로 청원이 허락됨에 따라 공부하여 1922년 2월 26일에 목조 예배당에서 위철지 목사의 집례로 장로 장립식을 하였다. 이후 자천교회는 당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25년 음력 12월 28일 소천 하심으로 그의 사역은 너무나 짧았다. 표면적인 사역의 기간으로 볼 때 너무 짧다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복음을 모르는 신촌면(지금의 화북면)에 복음의 요람인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감에 있어서 기초를 놓은 것을 생각할 때 전혀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는 안의와 선교사의 도움으로 운영하던 서당을 폐하고 교회 중심으로 2년제의 신성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아마 신성소학교의 설립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경북교회사’를 참고하면 1913년 또는 1914년으로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노회나 총회에 보고된 연도이기 때문에 건물을 고려해 보건데 자천교회 목조건물을 헌당하던 때라 추측하고 있다. 권혁중 장로는 교육에 있어서는 남녀의 구분이 없다는 생각하에 그의 딸 권기수를 1925년에 입학시켜 여학생 1호가 되었다. 권기수는 신명여고에 입학하여 제 2회 졸업생이 되었으며 그녀는 신명여고에 교사가 되었다.

 

그의 설교는 직접 자필로 원고를 썼으며 로마서 5장 12-21절의 말씀을 가지고 ‘아담과 예수’라는 제목을 가지고 설교한 것이 기독신보에 실렸다. 그는 죄와 의, 심판과 구원, 생명과 영생이라는 가장 원론적인 주제를 가지고 교우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그는 장로 되기 전에 영수로서 교회를 섬기면서 자천교회에서 말씀을 전했다.

 

자천교회의 변천사         

자천교회는 1920년대 이후 줄 곧 성장해 왔으나 일제의 강점기 상황에서도 주일학교 중심으로 계속 성장했으며 종탑이 세워져 시간을 알지 못하던 이들에게 종소리를 통하여 시간을 알려주며 그리스도의 구원의 종소리를 널리 울려 퍼지게 했으나 일제에 의해 종을 빼앗기는 아픔을 경험했다. 그리고 1946년 10.1 사건과 1950년에 겪은 6.25는 초기 자천교회의 역사를 허공 속에 묻어버렸다. 특히 6.25당시 인민군이 자천교회 건물을 사용하므로 초기 교회에 대한 자료는 거의 소실되어버렸다.

 

6.25를 기점으로 멀리 있던 사람들 중심으로 교회가 분립되기에 이르렀다. 1950년에 상송교회, 1979년에는 입석교회가 분립되어 나갔다. 또한 신앙적 갈등으로 1974년 화북교회가 분리되는 아픔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천교회는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며 그 지역의 중심교회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으며 지금도 외진 농촌지역에서 지역 복음화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예배당 이야기

                                                                                                                                                                                            

        

 

소담스러운 예배당에는 여러 가지 문화재 명칭이 붙어 있다. ‘국내 유일의 一(한일)자형 예배당’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제452호(2003년 12월 15일 지정)’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교회로 선정(2007년 7월 8일)’로 ‘총회사적지 제2호 지정(2008년 6월 14일)’ 이렇게 다양한 명칭이 붙기 까지 믿음의 선진들이 이 교회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것을 가꾸기 위해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이 크지 않는 작은 교회가 주목 받는 것은 한국교회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 전통이 강한 자천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먼저 관공서를 지어준다든지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예배당을 점령하여 사용하고 있을 때 미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교회 청년들이 교회의 지붕에 ‘CHURCH’를 써 놓았으며 이 교회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손산문 목사님’의 애정이 스며있다.

 

         

 

 

 

 

        

 

자천교회 예배당 내부의 특징이 중앙에 서 있는 네 개의 기둥이라면, 외부의 특징은 ‘우진각’ 형태를 이루고 있는 지붕에서 그 아름다움과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우진각 지붕은 건물 사면에 지붕면이 있다. 그리고 귀마루(내림마루)가 용마루에서 만나게 되는 형태이다. 이는 일자형 평면의 지붕 형태로 초가지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추녀가 네 귀에 구성된 처마에 의하여 구조되며, 지붕 좌우에 합각이 없는 형태이다. 이 지붕의 구성을 위해서는 앞뒤에 장·단연(長短椽) 설치와 함께 측면에서 종도리까지 높이로 서까래를 치받아 설치한다. 거기에 쓰이는 특별한 서까래의 긴 몸을 지붕 각도에 따라 휘어 깎아 쓰는 데에서 ‘우진각’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작은 예배당을 넓게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우리의 옷을 입을 입은 교회는 한국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아쉬운 점은 전통의 색을 배제한다는 데 있다. 우리의 모습으로 조각되고 형상화된 교회들이 많이 생기길 바랄 뿐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왜 이곳이 성지가 되어야 되는 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믿음의 씨앗이 어떻게 뿌려지고 뿌리를 내렸는지 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형태의 예배당을 계속적인 보호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변화되고 사멸되어지리 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최대한 보존하고 그 정신은 절대 변치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서히 교회사에 있어서도 개신교 초기 선교의 역사는 선교사 중심이었으나 이제는 그 지역의 실질적인 활동을 한 활동가 중심의 서술이 되고 있으며 그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이 계속되리라는 확신이 든다. 교회는 자신의 교회의 역사를 재 발굴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하며 교회를 지키는 많은 분들의 헌신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도시교회는 교회성장의 원동력이 농촌의 교회에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성이 있다. 70년대 산업화의 주역은 대다수가 농촌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중심이었다. 그들의 신앙의 뿌리는 농촌교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수도권으로 밀집되고 있으며 지방의 농촌과 중소도시 하물며 대도시까지도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없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 교회는 깊이 생각하며 자신의 성장의 모태인 농촌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며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글은 자천교회 홈페이지의 글을 많이 인용하였다 (http://www.jacheon.net)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가는 길과 연혁 등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