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광야에서의 축복을 기억하라!

어저나 2009. 6. 12. 10:06

광야에서의 축복을 기억하라! (신 8: 1 ~ 10)               (2009. 6. 14)


이스라엘 민족은 인류역사에서 고난의 민족으로 보여집니다. 애굽에서의 400년 동안의 종살이, 바빌론 포로기, 그리스, 로마의 식민지, 그리고 주후 70년경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파괴로 역사 속으로 잊어진 민족이었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다시 건국되어서야 이들의 자신의 나라를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에는 총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어진 축복의 땅이고 이삭과 야곱에 이어져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 주어진 땅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원래 팔레스타인은 ‘비옥한 반달형 지대’로서 인류 문명에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을 이어주는 통로이었으며, 그리스-로마인들이 페르시아의 동방으로 진출하는 통로이었기에 늘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땅의 지배자는 바뀌어 왔습니다. 이런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었으나 이들이 이 땅을 다스린 것은 역사의 연속선성에서 바라보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출애굽에서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으로 사사기 시대를 맡습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그들은 온전한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다윗 왕국이 건설됨으로 그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주전 1000년경에서 북쪽 이스라엘의 멸망이 주전 772년 남쪽 유다의 주전 586년 이스라엘이 온전히 그 땅을 통치한 기간입니다. 그들이 70년 만에 그들의 땅에 돌아왔지만 이스라엘 땅은 동방 민족과의 혼혈이 이루어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남쪽 유다만이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으나 이들은 주전 200년경에 시리아에서 독립된 마카비 전쟁을 통하여 ‘하스몬 왕조’ 이루나 곧 로마의 압제 들어갔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살던 시대가 로마의 압제 속에 있던 시대입니다. 그들은 굉장히 자의식이 강한 민족이었기에 로마는 총독을 두고 자치적으로 왕국의 다스림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주후 70년경 강력한 독립 투쟁을 했으나 그들은 완전히 파괴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독립투쟁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시오니즘’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의식’을 자지고 있었으며 언제가 돌아가야 할 땅이 팔레스타인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렸습니다. 시오니즘은 19세기 후반 동유럽 및 중부유럽에서 시작되었는데, 여러 면에서 이것은 고대 예루살렘 중심부의 시온이라는 약속된 땅, 즉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과 유대 종교의 민족주의적인 염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시오니즘이 단지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소수파만을 대표하였으나, 그 이후 오스트리아 및 독일의 유대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1905년 러시아혁명이 실패하고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억압이 뒤따르자 러시아의 젊은 유대인들은 선구적인 이주자들로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14년에는 팔레스타인에 9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이 가운데 1만 3000명에 이르는 이주자들은 43개의 유대인 정착촌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뒤이어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도시 및 농촌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유대인 자치조직을 완성하였고, 그들의 문화생활과 히브리어 교육을 강화하였습니다. 1925년 3월 당시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수는 공식적으로 10만 8000명에 달하였고, 1933년에는 23만 800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1947년 10월 27일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 및 유대 국가로 각각 분할할 것과 예루살렘을 국제화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정식으로 성립하자 1948~1949년에는 아랍이스라엘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제공받은 땅보다 많은 부분을 아랍으로부터 획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은 갈등이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의 땅’이란 이름을 가진 예루살렘이 평화보다는 분쟁의 씨앗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았으나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나그네의 삶을 산 이유를 말씀을 통해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신앙적으로 이것을 설명하면 수많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역사를 살피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이기에 이것을 주저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왜 성경의 역사를 깊이 있게 바라봅니까? 그것은 그 역사적 사실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 다시 실패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명기, 신명기 법전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제적 요소로 그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만 이것을 말씀 그대로 생활에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그 시대와 지금의 시대와는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메세지(교훈)’은 동일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상황 속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말씀 그 자체가 중요하지만 현실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찾아내는 것이 말씀을 전하는 자들의 책무입니다.


신명기는 광야에서 생활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될 것을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축복’과 ‘저주’ 선언하고 있습니다. 중간자적인 에매하게 묘사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하라’와 ‘하지 말라’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신 분이십니다. 성경에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너무나 사랑한다’ 등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말씀대로 살면 축복이 있고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와 멸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이 역사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명령합니다.

모세는 이제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생사화복이 달려 있는 중요한 일이기에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합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라.” 강한 명령입니다. “그리하면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선명한 말씀입니다. 강한 긍정의 명령이기에 말씀의 권위에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부모의 마음을 이시지요. 자식이 잘되는 일이라면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분 그분들이 바로 부모님들입니다. 사람은 어른이 되면서 자녀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자신을 포기하기까지 합니다.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자신의 자녀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패륜이지요. 이스라엘이 어려움에서 세계를 다스리는 많은 지도자를 배출한 것은 바로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자녀의 교육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쉐마’라 합니다. 우리나라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빠져 있습니다. 혹 이게 부족한 ‘2%’ 아닌가요. 신앙적으로 말하면 ‘98%’이지요.


우리는 신앙생활 할 때 말씀을 명령으로 받을 때 은혜가 임합니다. 물론 말씀 중에는 권고도 있고 권유도 있고 명령도 있습니다. 만약 강한 명령의 말씀을 만날 때는 말씀의 권위에 즉시 순종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의 역사를 경함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명령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와는 처한 환경이 다르니 오늘의 시대의 말로 받아들이자고 생각하지 마시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보십시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축복을 잊지 말라 !

광야를 주신목적

모세는 지나온 광야 40년을 떠올리며 너희들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는지를 상기시키십니다. 40년 적은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비유하며 반평생입니다. 성경에는 한 세대로 말하여지고 있지만 거의 두 세대에 해당합니다. 불평과 원망의 사람들이 모두 죽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그들을 가나안으로 들이면 역시 불평과 원망의 삶들을 살아갈 거라는 것을 아시고 그들이 다 죽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한 땅으로 데리고 기시길 원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죄악의 때를 완전히 벗겨질 때까지 하나님의 역사를 미루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원래 죄악과 마귀의 종이었던 그것을 완전히 씻기어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경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정결케 되는 시간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왜 하나님 기다리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더 많은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심판의 시기를 늦추시고 계십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에게 물든 죄악의 싹들을 제거하여 정결케 되기를 준비하셔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광야를 지나게 하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고통을 당해봐라. 광야에서 목이 타고 애가 타봐라’가 아니라 순종을 배우고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을 맛보며 천국에서의 삶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광야는 참으로 필요한 곳입니다. 인생의 광야에서 헤매지 않으면 됩니다. 분명 광에서도 지름길이 있다고 전 확신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광야에서 믿음의 선진들과 동역자들을 많이 만나서 영적 성장의 지름길로 나아가는 현제 자매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큰 그림에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나 개인 하나만을 돌아보지 말고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 하나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공동체의 순수성과 공동체의 정결함을 동일하게 바라보길 원합니다. 광야에서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중요성을 광야를 통해 경험하게 하십니다. 며칠 같이 살아보면 더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부부가 왜 하나입니까. 한 이불 덥고 오래 같이 살을 비비다보니 서로 닮게 되어 오누이처럼 되는 것 아닌가요. 저 아내에게 저와 닮았다고 말하지 마시고 속으로 생각만 하십시오. 저도 생각해도 많은 닮은 것 같은데 제 아내는 강하게 반발합니다. 아마 저의 미운 모습을 많이 보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부는 분명 닮아 있습니다.


첫째 광야의 축복 - 만나를 주심

광야에서는 물과 음식이 귀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이 불평합니다. 먹을 물이 없어서 그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실 때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할 때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헐벗고 노동에 시달리던 자기 백성을 광야에 불러 놓고는 굶기시지도 헐벗게도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채워주셨습니다. 여러분도 굶고 있습니까? 입을 옷이 없습니까? 우리는 지금 복에 겨워하면서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를 고민하며 불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먹기 시작한 지 불과 20년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제일 싫어한답니다. “내가 어릴 때에는 먹을 게 없어서 ...” “아빠 그거는 아빠 세대의 이야기이고요 우리는 달라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잊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공부합니까? 출세와 성공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 삶의 교훈을 배우고 그것을 통하여 미래를 열어가지 위해서 공부합니다. 바로 알고 공부해야 합니다. 지식의 전달을 통하여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교육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그 위치에 있다면 바르게 가르치기를 애쓰십시오.


하나님은 만나를 먹는 것으로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은 섬기는 백성은 결코 굶주리지 않는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분명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 ‘칠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도 알겠지만 하나님은 긍휼과 인애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냥 굶게 두시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일하게 하셨습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마라.” 하나님의 땅을 경작하게 하셨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그 소출을 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광야는 특별한 상황입니다. 일해서 먹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이적’이며 ‘표적’입니다. 오늘날의 시대에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할 수 없다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간구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축복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살아계시고 역사하고 계심을 시대 속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육적, 영적 만나를 다 사모해야 합니다. 육적 만나를 사모하십시오. 주신 직장이 강건하여 생활에 어려움이 있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최소한의 삶이 아니라 최대한의 삶이 되어서 하나님의 공급하여 주심을 경험하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영적 만나를 사모하십시오.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지식만으로 우리의 마음이 충만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내 생활 속에서 이루어질 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나의 지, 정, 의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서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루어질 때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이미 받은 것 보다 더 충만히 주시는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영적 만나를 경험하기 시작하면 내 안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이제 내 안에서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서 말씀이 성령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의 깊이를 날면 알수록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이 나타나게 되며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광야에서 하나님은 육적, 영적 만나를 다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광야에서 순례의 길을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역사를 경험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해야 합니다.


둘째 광야에서의 축복 - 의복과 건강을 주심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한번 입은 옷이 해어지지 않았다는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양과 염소 등을 데리고 나왔기에 가죽 등을 충분히 공급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들의 필요에 따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발이 부릍지 않았다는 말씀은 발에 물집이 생기거나 부풀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것은 그들에게 신발이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광야 기간에 있어서 세심한 배려와 계획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생활에 있어서 추위와 더위가 반복되고 일교차가 큰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만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에 따라 옷을 공급하시고 신발을 공급해 주심으로 그들이 다른 민족들에게 천대 받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독수리 날개로 엎어 올리신 것’ 같이 하나님의 인도에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작은 것 하나 하나 세밀하게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셨지만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광야에서 연단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채워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광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광교회를 생각합니다. 다행히 우리는 예배 처서가 불편하다고 하나님에게 원망하지도 불평하지고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충분히 우리에게 채워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믿음을 요구하시며 더 좋은 환경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불평과 원망이 있었서는 되지 않습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당장 5층이라 덮고 교육관이 완전하게 이루어져 있지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깊은 손길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 더 크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광야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는 놀라운 일들을 더 많이 경험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기에 있습니다. 더 큰 축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크게 영광 받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