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어저나 2009. 6. 5. 15:15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수 14 : 6 ~ 12)                (2009. 6. 5)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입니다. 8850m(종전 8848m)라고 합니다. 산위에 금 은  보화가 있는 것도 아닌데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산의 정상을 밟기 위해 애쓰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밟지 않은 새로운 길을 택하여 산 정상 정복을 위한 길을 개척하기도 합니다. 5월 20일 오후 6시 15분(한국시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에 나선 산악인 박영석 대장과 진재창 부대장, 신동민, 강기석 대원은 가장 힘든 코스인 남서벽 등정에 나서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였습니다. 남서벽 루트는 영국과 러시아 2곳이 개척에 성공했으며 이 길을 통하여 정상 정복을 이룬 팀은 네 팀에 불과했습니다. 다들 한국인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 준 것이며 민족적 쾌거라 하여 동아일보에 대서특필한 바 있습니다.


이 성공이 있기 전 박영석씨 팀은 지난 2007년에는 8100미터까지 올랐으나 눈사태로 대원 2명이 숨졌고, 지난해에는 시속 70km가 넘는 강풍 때문에 정상 문턱에서 분루를 삼켜야 했습니다. 세 번째 도전 만에 결국 성공한 것입니다. 이번 정상정복의 의의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가기 가장 어려운 남서벽을 통하여 정복하였으며 많은 역경을 딛고 성공하였기에 우리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며 어떤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당당한 한국인의 모습을 세계에 알렸다는 점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60년대 한국시인 중에 ‘김수영’이 있습니다. 그는 잡초를 시를 통하여 짖눌리고 밟혀도 죽지 않는 생명력 강한 민중의 모습으로 노래하였습니다.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강인한 생명력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 ‘잡초’의 근성으로 현대사의 굴곡을 노래하며 살아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박영석 대장도 이런 강인한 정신력으로 가장 높은 히말라야의 14좌 완등을 이루어 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떠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 우리는 세상에 소금과 빛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꼭 있어야 할 존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부패를 방지하고 신선도를 유지하며 어둠을 밝히는 영향력이 있는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길가에 버리운 소금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그 이상으로  변화하며 발전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머지않아 하루 생활권 안에 들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2012년이 되면 시속 400km의 고속철이 운행하게 된다고 합니다. 1899년, 그러니까 정확히 110년 전에 평균속도 시속 20km로 달리기 시작했던 증기기차가 시속 400km의 시대가 곧 온다고 합니다.


초고속 튜브 트레인은 지름 5m 정도의 튜브(tube) 속 레일을 달리데  안쪽은 진공에 가까워 열차 앞쪽에 공기저항이 거의 없습니다. 이론상 시속 1000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는데 현재로서는 기존 항공기와 맞먹는 속도인 시속 700∼800km가 목표입니다. 초고속 튜브 트레인이 시속 800km로 달린다고 가정했을 때 서울에서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까지는 11시간 정도면 갈 수 있습니다. 통일이 돼서 서울을 출발해 평양과 신의주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이어지면서 철길을 따라 유럽으로 가는 미래를 상상해 봅니다. 미래 철도에는 레일도 없고 전력을 공급받는 전차선도 없다합니다. 그리 먼 미래가 아니라 3, 4년 후의 모습입니다. 무가선 하이브리드 저상트램은 친환경성과 함께 도시의 미관까지 고려한 미래 퓨전형 철도입니다. 전동차에 전력을 공급하는 전차선 없이 차량에 탑재된 배터리를 사용하므로 대기오염이 제로입니다. 안내선을 따라 일반 도로 위를 달린다. 버스 승강장처럼 30cm의 블록만 있으면 승하차가 가능해 역 건물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편리해진다고 해서 신앙마저 편리해져서는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각심을 가지고 세상의 변화와 타협하지 말고 신앙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기술과 인간정신의 진보와는 상당한 차이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문화지체’라고 합니다. 물질문명의 발달에 정신문화의 미성숙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혼란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심화되리라 여겨집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도 이러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터인 데 우리는 이러한 사회를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문화현상 만을 쫓다가 혼란을 경험하게 되리라 여겨집니다. 미래는 아직 우리에게 완전히 열려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세계이기에 우리의 애씀과 노력이 무한히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우리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우리는 ‘지상 대 명령’을 과제로 삼아 주님이 우리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해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 갈렙을 통하여 미래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믿음의 주인공 갈렙

가나안 정복의 주인공은 두말 필요도 없이 ‘여호수아’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는 지도자가 여호수아였지 이스라엘 전 민족이 사활을 건 전쟁이었습니다. 물론 이 전쟁의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가나안에 대한 심판의 전쟁이었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창 15장 16절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하나님의 심판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맡기시며 그 땅의 주인이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하나님이 전쟁에 동행하며 승리주실 것임을 확신한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가나안의 죄악에 대한 징벌을 행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출애굽 이후로부터 촉망받는 지도자였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여호수아의 칼날이 번득거렸으며 승리의 함성을 지르게 하였습니다. 출 33장 11절 말씀에 보면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그는 모세가 호렙에 있을 때에도 산 밑에서 지도자를 기다렸습니다. 여호수아는 일찍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어 이스라엘 사람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사람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나아와 함께하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갈렙의 등장은 가나안 정탐과 보고 장면에서 나옵니다. 가나안 정복에 앞서 각 지파에서 한 명씩 12명을 선발했습니다. 이들은 가나안을 세세히 살핀 후에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그 땅에는 아낙자손이 거하며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얻지 못한다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하지만 갈렙의 의견은 명확했습니다. 민수기 13장 30절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갈렙은 하나님이 믿음의 선조에게 약속하신 그 땅을 믿음으로 반드시 취할 수 있음을 피력했으나 중과부족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동역자이자 가나안 정복의 동역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동역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등장은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경에 크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광야의 40년이 지나고 불평과 원망의 사람들이 다 죽고 난 후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함께 가나안 정복전쟁을 이끌어 갑니다. 그들이 나이가 적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복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아마 80세가 된 걸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청년과 같은 건장함으로 전쟁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으로 살 때 건강한 줄 믿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정신과 육체가 늙지 않고 맑고 밝게 살아감을 믿습니다.


가나안 전쟁의 막바지 이르게 됩니다. 지파들의 땅을 분배하였습니다. 아마 이스라엘의 사람 250만 명이 거하기에는 땅이 부족했습니다. 산지가 많았기에 사람들이 좋은 땅을 다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늙었습니다. 그래서 땅의 분배를 위해 사람들에게 제비를 뽑게 합니다. 그리고 각 지파들에게 자기에게 주어진 땅은 자기의 지파들이 차지하기를 명령합니다. 이제 각 지파들이 전쟁에 나서서 자기의 기업을 찾아 나섭니다. 


갈렙의 요구

유다지파는 다른 지파보다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중심부를 찾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도를 가만히 보면 별로 좋은 땅이 아닙니다. 산악지대의 중심부입니다. 물론 예루살렘이 그곳에 속해 있기에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는 중심부라 말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다윗이 임금이 되고 왕궁과 성전이 그곳에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은 좋은 곳이라 말합니다. 좋은 땅 요단의 동편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갓과 르우벤, 므낫세 반 지파가 이미 차지했습니다. 그럼에도 갈렙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은 불평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그 상황을 믿음으로 승화시켜 긍정의 힘으로 바꾸어 놓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갈렙은 광야에서도 정복 전쟁이후에 충분히 좋은 땅을 요구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갈렙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건국이 있거나 아니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초기에 시끄럽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공적을 내세워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다투기 때문입니다. ‘논공행상’때문입니다. 우리 조선왕조를 들여다보면 이런 일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고 피의 숙청이 이루어지면 나라가 혼란스러워집니다. 개인과 가문의 영욕을 쫓다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거가 끝나면 다툼이 생기고 주류 비주류의 갈등 이 모든 것이 인간 세상의 한 단면입니다. 이런 싸움이 우리를 실망시키고 정치로부터 관심이 멀어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것을 조금만 포기하면 해결되는 것을 과대한 욕심으로 인해 슬픈 비극을 목격하게 됩니다.

 

갈렙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그의 나이 팔십 오세, 그의 지나간 인생의 여정을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 땅을 내게 주시면 반드시 취할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그의 신앙의 고백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이 일을 말씀하신 때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하며 마흔 다섯 해를 지내는 동안, 주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나를 살아남게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이제 나는 여든 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세가 나를 정탐꾼으로 보낼 때와 같이, 나는 오늘도 여전히 건강하며,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힘이 넘쳐서, 전쟁하러 나가는 데나 출입하는 데에, 아무런 불편이 없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위대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담겨있는 대목입니다.


갈렙의 신앙고백을 보면서 또한 초대교회 서머나 교회를 담임하였던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죽도록 충성한 그러한 제자였습니다. 주후155년 빌라델비아의 성도 11명과 함께 불에 타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폴리갑은 ‘가이사는 주다’라는 고백을 강요당했습니다. 폴라갑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투기장에 끌어다 놓고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서머나 총독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그를 모른다고 하라 그러면 내가 맹세코 너를 좋아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의연하게 대답하기를 “내가 86년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믿어 왔는데 그는 나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시지 않으셨다 하물며 나의 주인이시며 왕이요 구세주인신 그 분을 어떻게 배반 할 수 있는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독촉하는 총독에게 “그대는 헛수고를 고 있고 가이사의 운명을 걸고 맹세하노니 내가 누구이며, 무엇하는 자인가를 그대가 모른 척 하지 마시오 내가 지금 하는 말을 똑똑히 들어두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요” 그리고는 잠깐 침묵이 흘렀습니다. 총독은 당황과 분노를 누르고 다시 한 번 협박과 회유를 하였습니다. “그대의 운명은 내 손아귀에 있다. 그대가 그 결심을 돌이키지 않으면 준비해둔 사나운 짐승을 풀어 너를 찢게 할 줄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보았으니 이제는 화형에 처하겠다.”


그러나 폴리갑은 이에 굴하지 않고 총독을 향하여 단호하게 “그대는 한 시간 정도면 타다가 꺼져버릴 불로써 나를 위협하고 있으나 악인을 위하여 예비 된 장차올 심판과 형벌의 영원한 불은 모르고 있소 뭘 주저하시오 원하는 대로 곧 시행하시오”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사람들이 장작더미를 쌓았는데 으래 그래왔던 것처럼 유대인들도 이를 도왔습니다. 이에 폴리갑은 화형을 당했습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갈렙이 원한 산지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었고 자신의 가족과 후손들이 살아갈 터전이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개척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자손들까지 염두에 두고 땅을 개척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현재에 매물 되어서 미래를 보지 못한다면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진들은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계속하여 믿음의 영웅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현재의 환경에 메일 것이 아니라 장차 다가올 영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며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나에게 투자하면서 미래의 자녀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현재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미래인 우리들의 자녀들과 믿음의 후배들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허락한 산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멀리보이고 힘들게 보일지언정 낙담하지 말고 믿음의 눈을 크게 뜨고 크게 호흡을 고르고 난 뒤 다시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지금의 것에 만족할 수 있지만 더 많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바라보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두 팔을 벌려 우리를 향하여 오시는 모습을 바라보시길 원합니다. 지금에 갇혀서 다가올 미래를 부정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삶 중간 중간에 소중한 사람들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약해지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한다는 사실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손해 보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손해 보는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천국을 소유하고 있기에 손해보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그 다음의 것이기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취해야 할 산지는 무엇입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취해야 할 산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남들이 애써 가지 않는 길을 가서 그 곳을 하나님께 드리시기를 원합니다. 남들이 버리는 영역을 아름답게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드시는 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덴마크에 ‘그룬트비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쓸모없는 황무지를 가꾸어 덴마크를 세계 최대의 낙농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꼭 산지를 성취하십시오.


둘째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하려면 포기해야 할 것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포기를 자신의 안일과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입니다. 세상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차별이 존재하지 않고, 약한 자가 무시당하지 않고, 힘없는 자가 천대 받지 않는 세상,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 만들기 위해 애쓰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그곳에 임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 달려 나가야 합니다.


믿음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애쓰는 공동체 위에 하나님의 은혜 함께 하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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