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율법과 정의

어저나 2009. 7. 18. 13:11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율법과 사랑 (갈 5:1, 13~15)        (2009. 7. 19)

                  

수련회를 마치고 한 주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넋 놓고 보냈습니다. 아마 교회 이전과 여러 가지 부대시설을 설치하고 수련회를 준비하면서 자신을 돌아 볼 여유가 없어서였나 봅니다. 월요일부터 피로가 밀려온 것이 아니라 나태함이 고개를 들었나 봅니다. 아무튼 한 주를 보내면서 별 생각 없이 보냈다고 말하지만 ‘고민’은 ‘성장’이었습니다. ‘부흥’이었습니다. ‘부흥’과 ‘성장’은 연관 관계를 설명하기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성장’보다는 ‘부흥’을 갈망합니다. ‘부흥’의 가장 큰 특징은 죄에 대한 각성과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부흥’은 우리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이 일어났다고 해서 부흥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부흥을 통하여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며 교회가 건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야 바람직합니다. 70년대 80년대에는 부흥과 성장을 혼동하여 사용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90년대 들면서 교회는 ‘제자훈련’등 성경공부를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성장’의 후유증을 경험하고 난 뒤였습니다. 전 간혹 이런 생각을 합니다. 부흥이 일어나기를 갈망하면서는 부흥 후의 교회의 모습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도 합니다. 경험하지 않고 걱정부터 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부흥 후의 현상 중에 하나가 분열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분립’과 ‘분열’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초대교회가 성장하자 예루살렘의 교회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각 지역마다 가정교회들이 일어났으며 이것들이 지역 교회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교회는 지역의 상황에 따라 분립되어져야 합니다. 대구의 경우 제일교회(남성정교회)에서 교인 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남산교회와 서문교회(신정교회)로 나뉘어졌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수용 한계를 알고는 자연스럽게 교회가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분립’된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분열’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교단간의 분열, 교파간의 분열 주로 보스 중심주의에 의한 갈등이 주원인입니다. 물론 분열을 통하여 성장이 이루어진 면은 많습니다. 하지만 자기 중심주의적 사고가 만연하여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볼 때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얼마 전 한국교회에서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온 분립의 모습을 보여준 교회가 있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입니다. 네 교회로 나뉘어졌습니다. 김동호목사님은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높은 뜻 광성교회’‘높은 뜻 정의교회’ ‘높은 뜻 하늘교회’‘높은 뜻 푸른교회’네 교회로 분립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교인의 수가 늘면 주차장 시설과 교회 건물을 크게 지을려고 하는데 반하여 신선함으로 다가옵니다.


부흥의 결과로 우리는 교회들이 나누어지되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면 합니다. 자연스럽게 각자의 형편에 따라 교회들이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너무 큰 교회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장 영광교회에 필요한 이야기는 ‘부흥과 성장’이 동시에 일어나기를 소망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죠이엘과 함께 찬양집회를 하고 난 뒤 성인 50명만 있다면 교회의 분위기가 확 달리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목회자의 변신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난 뒤 가장 힘든 것이 ‘찬양’이라는 것이라고 개척 시절을 떠올리며 목사님들이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찬양’의 은사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할 사람들도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입니다. 예배당을 가득 채울 사람들입니다. 수련회 이틀째에 경험한 것은 우리에게는 성숙한 신앙인보다는 작고 여련 학생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습니다. “하나님 언제 우리에게 이 자리를 다 채워주시겠습니까?” 담임을 맡고 있는 한 목회자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로 이곳을 채워주셨겠지만 이곳이 구원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목사의 마음이 잘못된 것일까요?


우리는 끊임없이 부흥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르면서 성장하는 방법 또한 익혀나가야 합니다. 사해바다의 문제는 물이 들어오지만 물이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그에 비하여 갈릴리 호수는 헤르몬 산에서 물이 공급되고 다시 요단강을 통하여 물이 흘러내려 나갑니다. 소통이 이루어지기에 호수는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광교회도 계속 정체되어 있게 된다면 우리가 꿈꾸는 것들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영혼에 대한 갈망함으로 빈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이곳에서 세상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자유와 사랑을 경험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갈라디아서 5장 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자신이 친히 희생하셨습니다. 고후 3장 17절 “주의 영이 게신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 이 말씀을 받는 순간 제 마음이 너무나 평안해졌습니다. 많은 짐과 어두움의 세력들이 저에게서 떠나가는 듯한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회과학도의 생각으로 자유를 정의해 보았습니다. 'freedom' 'liberty'의 개념을 정의했습니다. 'freedom' 소극적인 자유입니다. 신체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중세 시대에 농노의 신분에서 근대에 이르러서 자기가 자유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에 비하여 'liberty'는 적극적인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회의 주체로 시민들이 자신의 권익을 이루기 적극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의미에서 자유를 말합니다. 이 자유를 얻기 위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산다’란 말이 있습니다.


그르면 우리의 자유는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함을 얻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 자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에게서 해방되는 자유입니다.

사람에게는 무한한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들을 자신의 힘으로 다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동물적 욕구(생리학적 욕구), 정신적 욕구간의 괴리를 느낄 때가 많이 있고 이것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우리는 거기에다가 신앙적 욕구가 있습니다. 남들 보다 배나 더 힘든 삶을 살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일 성수에 대한 갈등, 성경의 말씀과 현재의 생활과의 배치 등으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죽 했으면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도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저도 내 자신의 수많은 싸움을 치릅니다. 이 싸움에서 지는 순간 자신의 노예가 되어서 죄와 사망의 권세에 무릎 꿇게 되는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 자신의 문제를 그리스도께 맡기면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해방될 수 있습니다.


둘째, 단지 자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어서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값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의 사랑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집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지금의 고통에서 벋어나게 됩니다. 사람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이 ‘죄의식’입니다. 이것이 ‘피해의식’ ‘강박관념’ 등 정신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죄의식에서 해방을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창조된 귀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그 성품을 닮게 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한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알고 지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형벌이 있는 지를 말씀하는 대목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자신의 울타리를 만들고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에게로 나가라는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각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하시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게 할 수 있도록 하신 자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사람이 살아갈 길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표준 새번역) 육체의 욕망을 위하여 자유를 이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육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삵스인데, 여기서는 인간의 부패성과 죄악성을 의미합니다. 부패와 죄악성을 만족시키는 자신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둘째,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복음을 믿어 영적 자유를 얻은 자가 율법의 멍에 아래 있지는 않으나, 그와 율법과의 관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성령에 의하여 기쁜 마음으로 율법을 행합니다. 이렇게 행함이 곧, 사랑입니다. 우리가 자유케 되었다고 그리스도의 법조차도 지키지 않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적 행위를 바리새적이다 외식적이다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계명을 두 계명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간혹 율법을 간과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물론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났지만 율법의 정신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하시거나 무너트리지 않았습니다.


‘종노릇하라’는 말씀은 "섬기라"(serve)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즉 다른 사람의 불의한 행위에도 용서하고 따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의 잘못에 대하여 지적하고 바르게 행함이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이웃 사랑을 통하여 완성되어집니다. 그냥 명령만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주의자의 문제는 율법에서 사랑을 간과하고 법만 바라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계적으로 행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닥닥해진다는 말은 사랑이 없어진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자유는 그리스도를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계명입니다.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 앞에 겸허히 무릎 꿇고 나가야 합니다. 자유와 율법과 사랑은 떼어 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만 치중하다 보면 문제가 발생하여 우리를 그리스도부터 멀어지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와 칼뱅과 재세례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가톨릭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종교개혁의 삶으로 살아갔지만 서로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추구하는 칼뱅은 신정정치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반대자들을 제거해 나갔습니다. 루터 ‘이신칭의’의 복음의 진리로 종교개혁을 시도하면서 칼뱅과 함께 수많은 재세례파들을 제거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신앙에 있어서 자유해야 함을 말하면서는 적대자인 가톨릭보다는 자신들과 다른 신앙의 노선을 걷고 있는 이들과 싸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을 강조하는 재세례파는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으며 급진적인 자들은 농민들과 합세하여 농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일부는 흩어져서 경건주의의 삶을 살기도 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바라보았을 때 사랑의 최고의 완성이지만 하나의 가치를 추구함으로 나와 이웃을 죽이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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