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진리와 자유

어저나 2009. 7. 29. 17:02

진리와 자유 (요 8 : 31 ~ 32)                             (2009. 8. 2)


20대 후반에 조카의 소개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말도 잘 통했고 대화의 주제도 다양했습니다. 저는 ‘역사와 문학’에 대하여 그 사람은 ‘예술’에 대하여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은 오래지 못했습니다. 저는 신대원에 입학했고 그 사람은 도자기 공방을 하려고 도예를 배우러 떠났습니다. 6개월이 지난 뒤에 만났을 때 서로의 말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겉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작품이라며 작은 도자기를 저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전에는 막힘도 없이 이루어지던 대화가 서로가 허공을 향해 말해지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왜 그리도 서로에게 어색했었는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다원주의’ 진리관을 버려야 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앙으로 살아가야 함을 고백했으며 글로 써 내었습니다.


여러분 주위를 돌아다보면 여러분을 손가락질 하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는 ‘개독’이라고 우리를 비방하고 있으며, 왜 그리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냐고 묻습니다. 때론 답답해합니다. ‘왜 그렇게 사니? 편하게 살면 된다! 지금 마음에 울리는 대로 살아라!’ 등 애정 어린 충고를 해 주기도 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상대론적이고 관용주의적 태도로 살 때 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는 사실입니다. 남들이 보면 지배받는 삶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절대자에게 한 초라한 삶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신으로부터도 자유로울 때 자신도 자유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 이 중심에는 ‘인간 해방’을 담고 있습니다. 교육의 근본 목적이 바로 ‘인간 해방’입니다. 가난, 사회적 차별, 경제적 압박, 문화적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교육을 통한 인간해방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일부분은 남을 지배하는 데에서 올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누리는 자유의 일부분은 나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시민들은 많은 특권과 자유를 누렸습니다. 바로 노예를 부림으로 자신의 시간의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런 자들은 남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들 역시도 지배자들 이었습니다. 이들은 노예를 부린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찾아서 새로운 땅과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미지의 땅으로 개척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학문이 발달하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가에 대한 방법론이 대두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입니다. ‘연역법과 귀납법’입니다. 이런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들이 오히려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지 못하고 자연법칙 속에 하나님을 가두는 꼴이 되었습니다. 우주의 자연법칙을 신으로 대치 시켜 놓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말할 수 없는 도덕적 타락이 있었습니다. 절대적 진리관이 서서히 붕괴되어져 나갔습니다. 학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다루는 종교에도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실제적 삶으로 상대주의적 가치관은 더욱 깊숙이 영역을 확대하였습니다. 20세기 말에는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라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침투로 교회들은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교회 내부에 이러한 사상의 흐름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많은 걸림돌이 대로 있습니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자신이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선하지 않을 수 있다. 지금 행하는 선이 악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지금 문화적 상대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변하고 시대에 따라 바뀐다면 우리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단순하게 말하면 성경에 나와 있다고 말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진리란 무엇인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현대에서의 진리는 철학적 과학적으로 증명된 (1) 참된 도리(true reason), (2) 논리의 법칙에 일치하는 지식(truth), (3) 철학에 있어서는 누구나 인정하여야 할 보편타당한 지식(truth) 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4) 성서에 있어서의 진리는 계시(그리스도)에 의해 보여진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말해지는 특징을 가집니다. 구약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진실이 진리(히브리어 에메스)이고, 그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의 올바름(올바른 관계)을 가리킵니다. (시 25:10). 또한 하나님의 성격으로서의 진실에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 율법 같은 하나님의 의지의 나타나심이, 진리라고 불리웁니다(시19;9,86:11). 신약에 있어서도 구약의 진리와 일치하여, 하나님의 진실성과 관련하여 진리의 내용이 언급된다(요 7:28,롬 3:7). 특히 신약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그 복음이 [진리]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음이 보여집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기초한 윤리적, 종교적 진리가 진리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신약에서는 ‘알레데이아’인데 덮은 것을 제거하고 사실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계시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밝히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것은 많은 백성들에게 감추어진 비밀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밝히 드러났으며 그리스도 자체가 진리 되심을 본인이 직접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구원의 길이 되심을 증거하고 계시며 그 구원의 진리를 가지고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통로이심을 본인이 직접 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진리는 여기도 저기도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한 길 밖에는 없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과 진리

(1) 진리이신 하나님

신명기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펑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며 정직하시도다.”

시편 32:15 “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2) 진리이신 그리스도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3) 성령은 진리의 영이심

요한복음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하나님은 진리의 근원이시고 진리를 완성하시기 위해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영광을 얻게 하셨으며 예수님이 이 땅의 진리가 되셨습니다. 또한 진리의 영이 내 속에 거함으로 의롭게 살 수 있도록 하셨으며 불의의 근원을 물리치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진리이시기에 우리 또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리와 우리의 삶

(1) 진리는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우리들이 깨끗함(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거룩하게 되었다는 지니지만 세상과의 분리된 삶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깨끗함을 받은 우리는 진리 안에서(엔 알레데이아) 깨끗게 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진리 안에서 성결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십니다. 바로 진리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매개체이며 거룩하게 하는 실행자는 ‘진리의 영’인 성령이십니다.(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한복음 17장 19절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의 죄를 씻는 일차적인 목적에 머물지 않고 또 하나의 목적을 제시합니다. 그 목적은 제자들의 복음 사역을 위해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거룩은 예수와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의 성결은 아버지의 은사에(17절)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살후 1:12) 자신의 사역을 계승하여 지상에서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거룩하게 되기를 간구하면서 그들을 위해 죽음을 맞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다워지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그리스도다워지는 것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한 차원 더 높아지는 것은 진리로 인하여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입니다.


(2) 진리는 우리를 께끗하게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성령님은 보혜사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만 전달하시며 우리에게 알려주실 터인데 순종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사랑이 우리 속에서 더욱 커져가게 될 것입니다. 정결함으로 주님 앞으로 더욱 나아가야 합니다. 깨끗해야 우리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3) 진리는 그리스도인의 무기입니다.

에베소서 6장 14절 “그런즉 서서 진리의 띠를 띠고”

우리는 영적 전쟁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방어용 무기와 공격용 무기를 주셨습니다. ‘허리띠를 띠고’는 당시의 의복으로 인해 생겨난 은유입니다. 당시 의복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옷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투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옷을 붙들어 매야 했습니다. 이렇게 의복을 잡아매는 띠는 '진리'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복음이라기보다는 '진실함과 충실함'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본 절의 은유가 사 11:5에서는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고 기술하여 메시야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진리를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고 깨끗하여 지며 영적 전쟁에서 무기로 주어진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보배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우리의 능력의 근원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욱 깊은 그리스도의 사람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