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사슴이 시냇물 찾기에 갈급함 같이

어저나 2009. 7. 10. 13:26

사슴이 시냇물 찾기에 갈급함 같이 (시편 42)    (2009. 7. 10 개회예배)


“사슴이 시냇물 찾기에 갈급함 같이...”설교를 준비하던 중 네이버 지식 검색을 했습니다. 지식 검색하면 ‘kin .....'라고 나옵니다. 아마 지식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시원함을 주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연히‘팔레스티나’의 성가곡을 알게 되었습니다. 음악의 아버지가 누구일까요? 음악의 어머니는 누구인가요? (바하, 헨델) 팔레스티나는 이들보다 앞선 시기의 사람입니다. 르네상스 이루 아마 근대음악의 출발점이라고 할까요? 저도 ‘팔레스티나’가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사슴이 시냇물 찾기에 갈급함 같이...”영락교회 베들레헴 성가대가 부른 곳을 듣게 되었습니다. 4부 합창으로 테너, 알토, 소프라노, 베이스 솔로로 이어지는 곡을 음미하면서 내가 갈망하고 있는데 그 갈망의 ‘생명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갈망하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새 삶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번에는 시편 42편을 수련회 기간 동안 나누면서 은혜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시편 42편에 보면 작게 42편을 간단하게 말하고 있는데,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합니다. 마스길이란 말은 ‘생각하다’,‘깨닫는다’라는 의미를 갖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반성적 시편’ ‘교훈적 시편’으로 분류됩니다. ‘영장’은 성가대 지휘자를 의미합니다. 지휘자가 있는 노래입니다.


이 시편의 주인공은 고라가 아닙니다. 이 시편의 주인공은 우리 모두입니다. 이 시편의 고백이 ‘고라 자손’‘다윗’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이 시편의 지은이 --- 다윗


다윗의 처한 환경 --- 다윗에 그 이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김을 받고 있던 자신의 아들에 의해 위기에 처한 다윗에 불렀던 노래입니다.


고라 자손 --- 노래하는 자들 중 정선된 무리입니다. 고라는 모세와 아론의 사촌형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만 불손하며 명예욕이 커서 르우벤 자손 다단과 아비랍과 그리고 온이 작당하여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 받은 유명한 족장 250과 더불어 모세와 아론에게 반역했습니다. 이유인 즉 모세 형제가 분수에 지나치게 굴며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인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 채로 땅에 삼킨바 되어 음부에 떨어졌습니다.(민16장)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살아남은 자가 성전에서 찬송을 부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남은 생 모두를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찬송하는 일에 자신의 일생을 모두 드리게 되었습니다. 구덩이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구원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들 역시도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멸망의 자식이며 어둠의 자식들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 그의 피를 의지함으로 ‘의의 자녀’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첫째, 천국으로 가는 순례자들은 여정 중에 수많은 시련을 경험하게 되며 고초를 경험하게 되어집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고난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이겨내야 합니다.(바울 - 빌립보서)


둘째, 신앙의 선진들의 체험을 깊이 있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그 분을 향한 갈망을 깊이 있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무나 다윗스러우며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셋째, 낙심에 빠질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제를 경험하여 의혹과 두려움에 맞서 싸우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신령한 노래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또한 신령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에 쫓기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더욱더 갈망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편 42편) (2009. 7. 10 저녁)


타는 목마름으로

                김남주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테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386세대의 대표적인 민중가요입니다. 대학교를 다닐 때는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지금은 간혹 섬뜻 섬뜻한 말들입니다. ‘친북 좌파’라는 말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다들 목말라했습니다. 갈증이 해결되는 듯 했지만 제 인생에 있어서는 서막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을 이야기하면 다들 책 한 권은 써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저 역시도 굴곡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임용고시의 발표로 하나님의 뜻이 교사에 있지 않고 중학생 때부터 서원하면 기도했던  목회자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총신신대원에 입학했습니다. 학기 중에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경기도 용인 양지에 캠퍼스가 있었습니다. 옆에 동기들의 도움으로 응급실에 갔습니다. 협압 170정도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습니다.


여러 병원에서 검사했지만 아무 병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동산병원에서 ‘정신과’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병명은 ‘공황장애’였습니다. 1992년입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꾸준한 약물치료가 있었고 상담이 이어졌습니다. 그 때 참으로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청교도 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모여서 교제했습니다. 그리고 양지에 있는 한국 최초의 교회인 복원된 ‘소래교회’가 있습니다. 거기서 밤마다 기도했으며 그 위에 가면 작은 기도실이 있는 데 거기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에 약에 의존하지 않을 정도로 호전되었습니다.


그때 그 시간은 하나님이 저를 처음 신앙의 때로 되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지만 많은 것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대원 졸업할 때 쯤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갈 곳 없이 버려지게 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시 병이 재발했습니다. 그전보다 몇 배나 더 강해진 채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공황장애는 심하면 ‘불안발작’을 일으키는데 곧 숨이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응급실에 몇 차례나 갔습니다. 많은 안정제를 투여해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를 만났고 아내는 정말 아무 없는 저와 결혼해 주었습니다. 물론 결혼 전에 저의 병세를 아내는 알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저의 보화입니다. 저의 두 아들. 영광교회는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아직도 ‘공황장애’는 완전하게 낮지 않았습니다. 계속적인 치료가 필요하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 내가 교만해질 때마다 저를 찾아오는 놈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게 되어집니다. 


이 갈망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대한 갈망입니다.

사슴은 목이 길지요(목이 길어 슬픈 짐승이여 노천명 시인) 사막과 황무지에 있는 숫사슴은 짝짓기 시절에 목이 탄다고 합니다. 그 갈증을 이기지 못해 물이 갈급해 해매이게 되는데 그들에게도 신기루 현상이 보이나봅니다. 앞발로 모래를 파헤치다가 목이 말라 그들은 서서히 죽어간다고 합니다. 다윗은 그의 사울을 피하여 황무지를 다니다가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 묘사할 수 있었습니다. 갈금함 같이 들짐승들이 헐떡거리는 모습을 말해주는데 ‘찾기에 갈급함 같이’보다는 ‘울부짖으며 찾음과 같이’로 번역하며 원문의 의미가 더욱 살아나게 됩니다.


이 갈망에 대한 응답은 ‘생수’입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인이 되묻습니다. “영원한 생명수를 주소서”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네 남편을 데려오라” ‘동문서답’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그녀의 영혼의 치료가 없이는 그녀의 갈증을 해결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생수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성령안에서, 진리안에서’ 예배할 때 육신과 영혼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대한 갈망 (시편 42:1~5)        (2009. 7. 11)


1. 목말라 하는 거룩한 사랑

(1) 다윗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에서 쫓겨나 황무지인 요단으로 추방되었을 때 그는 애절하게 하나님에게 자신의 갈급함을 드러냅니다. 3절에 “네 하나님이 어디 계시뇨?”조소와 비웃음에서 그는 절망합니다. 절망의 정도가 커질수록 나약한 인간은 절대자를 찾는 것 같습니다. 온갖 영화를 다 누린 다윗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모양입니다. (다윗 문학 공동체에서 준대상을 받았습니다. 그 때 컴퓨터를 통하여 대상을 타면 30만원을 준 다 길래 공모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준하가 태어나기 전이었습니다. 출산 준비금 이었습니다.)


들꽃이 될망정 

        이원보


아무도 찾지 않는

한적한 곳의

들꽃이 될망정

향기롭고

곱게 

필 수만 있다면

하늘을 향해 피어올라

행복한 입을 열어

사랑노래 드리리라.


그 때 기독교 문화 연구소에서 세미나를 했는데 ‘복음주의 선교’에 대한 글이 신문에 실렸고 홍보 포스터가 각 교회에 보내져 제가 목사란 것을 알고는 상을 줄지 말지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상금 유용하게 잘 썼습니다. 지금 활동을 하지 않기에 미안합니다.


(2) 갈망의 대상은 무엇이며 그가 그렇게 찾기에 갈급해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갈망의 대상 : 생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함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뵈옵는 것은 위선자에게는 두려움이 되고 의로운 자에게는 염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갈급함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면서 처음에는 하나님이 두렵게 느껴졌는데 아마 죄에 대한 각성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사랑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어집니다. 사랑에 깊이 빠져 은혜의 바다를 건너다 교회의 바르기 못한 것을 보면서 (교회 수련회 때, 교회 행사 때 우리 가족 모두가 예수가 믿지 않기에 어른들이 직분자의 자녀들을 잘 대해주고 저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을 때 섭섭함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교회 일을 더 열심히 했음에도 칭찬의 대상이 아니라 염려의 대상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성가대 연습도 더 열심히 했는데 칭찬은 직분자 자녀들이 더 많이 들었습니다. 어른들 간의 다툼, 교리적 논쟁) 교회와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합니다. 죄악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찬송합니다. 반복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반복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정도는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갈망의 정도 : 사슴이 사막에서 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사슴이 오아시스을 찾았다 할지라도 굶주린 늑대와 사자들이 우글거립니다. 하지만 자기의 목숨을 내걸고 목을 축입니다. 생명을 담보로 한 갈망입니다. 이영식목사님은 성주에 있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마을에 도착했으나 곧 체로되었습니다. 그는 목사였고 대구형무소 형무과장이었습니다. 총살형을 받기 전에 연설을 했습니다. 그의 일제시대의 행적과 장애인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연설에 감동한 북한군은 이영식목사님을 풀어 주었다고 합니다.


2.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것을 슬퍼하는 사랑

(1) 하나님의 집에서 쫓겨 나 있는 동안에 그는 지독한 슬픔에 빠져듭니다. “내 눈물이 주 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눈물이 나의 빵이 되었다’입니다. 식사를 거를 만큼의 슬픔이 그에게 있었지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조롱에 대하여 심한 고통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전종갑과의 만난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가서 불국사에 대웅전에 갔을 때 친구에게 같이 절하자고 했을 때 그 친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음 해 1977년 1월 1일 학생예배에서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절 보았습니다. 그 때 그 친구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비방을 했을 때 그 친구가 참 많이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논산 훈련소에서의 감격적인 만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3주차 그 친구는 1주차 눈물의 상봉이었습니다.)


(2) 쓰리고 아픈 추억은 나와 함께 성일을 지키고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떠올리고 은혜의 시간을 누리고 있습니다. 고통이 있다고 해서 늘 아픈 것은 아니지요. 그 속에 다시 새살이 돋아나 납니다. (연예에 대한 추억)


(3)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살아 숨쉬는 모든 곳에서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네가 어찌하여 숙이느냐” 문맥을 고려할 때는 슬픔의 무게 때문에 슬픔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심히 우울하고 슬픈 상태를 가르킵니다. 신앙으로부터 온 믿음의 마음과 불신앙 상태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혼할 때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결론 : ‘그 얼굴의 도우심’ ‘그의 얼굴의 구원들’ 하나님 구원의 완벽성을 말해 줍니다. 값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대하여 감사하며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리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대한 갈망 (시편 42:6~11)        (2009. 7. 12)


(1) 다윗은 자기의 영혼이 낙담하는 것을 불평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서 자신을 위로한다. 그는 박해자의 격노함으로 ‘요단땅’으로 ‘헤르몬 땅’으로 ‘미살 산’으로 도망다니면서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다윗에게는 광야가 있었기에 성군이 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많이 받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낙담만 하고 있으며 안 됩니다. (임용고시 문제 간증 하나님은 더 축복된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위기일 때가 기회입니다.)


(2) 그의 근심과 구원

다윗은 근심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고 그로 인해 낙담했습니다. 이 시편의 배경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입니다. 그 반역은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데서 부터 유래합니다. 다윗의 죄를 가증히 여기신 하나님은 아들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백주에 대낮에 압살롬이 자신의 후궁들을 취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 나단에 의해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있으셔서 용서해 주시지만 그 죄에 대한 대가는 지불해야 합니다.


‘주의 폭포 소리’의 문자적인 뜻은 ‘당신의 바다 회오리 소리’입니다. 정황으로 볼 때 ‘요단 강물 줄기’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강줄기를 폭포에 비유한 것은 작은 물줄기라 할지라도 자신을 크게 꾸짖는 것처럼 들린다는 표현입니다.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테흠 엘 테흠 코래) ‘깊음이 깊음을 부르며’ 주의 폭포소리가 빠르게 다가와 요단강 골짜기에 부딪히며 바다의 파도가 바위에 부딪힘 같이 요란스럽게 내려오는 ‘요단강 급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다윗이 큰 고통 속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에서 오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했습니다.

‘그럴지라도 여호와께서 그 인자하심을 베푸시리라’ 폭풍 뒤에는 평온이 올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총 베푸시는 것을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파도와 바람과 폭풍과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게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 일을 낮에 행하실 것이다. 다윗은 그 인자하심에 감격해마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안에 살고 거동하는 우리 생명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위로의 장본인이시며 수여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만 기도로서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3) 다윗은 그의 원수들의 무례함을 원망하면서도 그의 친구이신 하나님  에서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우리는 원수의 무례함을 당할 때가 많이 있다. 원수의 의도적인 비난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등용문 학원에서 자기 아내가 하나님의 교회나간다고 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을 하였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결 론 : 그는 두 번 반복하여 말함으로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하는고 반드시 승리하고 그의 원수를 물리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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