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갈 망

어저나 2009. 7. 3. 17:54

갈  망 (요 3 : 1 ~ 15)                                          (2009. 7. 5) 


요즘 ‘사이코패스’란 말이 많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직접 저에게 질문하면서 진단하기도 합니다.  ‘사이코패스’란 반사회적 인격 장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평소에는 정신병질이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가 범행을 통하여서만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얼마 전 ‘강호순 사건’이 있고나서 사회에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이코패스라는 테스트도 있습니다.


* 당신이 잠이 안 오길래, 아파트 베란다에 나왔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칼로 찌르고 죽였다. 당신이 그 모습을 보고 신고하려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대었는데,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남자가 당신 아파트 쪽으로 손을 일정하게 움직이며 가리켰다면 왜 그랬을까?


- 일반인들의 답 : 다음은 너의 차례다. 신고하지 마라. 거기 가만히 있어라. 등

- 사이코패스는 : "내"가 있는 층수를 세려고


* 산타클로스가 남자아이에게 축구공과 자전거를 주었다. 그런데 그 남자아이는 기뻐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 일반인들의 답 : 다른 것을 갖고 싶어서. 이미 가지고 있어서. 애가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 사이코패스는 : 다리가 없어서


이런 질문에 답하다보면 내 자신이 이상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중, 고등학생들이 읽는 책 중에서도 괴담이나 정신분열자들이 할 수 있는 살인 등을 추적하고 수사하는 것들이 많이 읽혀지고 있으며 TV에서도 C.S.I나 슈퍼 내추럴, 크리미널 마인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드라마들이 방영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인기를 끌고 학생들이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실제로 그 범인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가 물질적이고 개인주의로 흘러갈수록 사회적 문제를 양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간혹 청소년들에 의해 일어나는 범죄는 지능화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실을 들여다보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주면 자신의 책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녀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사고를 주입시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게끔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육체적 건강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건강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에게는 이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영적 건강이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영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로 인해 육신의 병을 가질 수 있으며 정신적인 문제로 고민하게 되는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질병을 치유해 주실 때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치유는 영적인 치유를 통하여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제적 가치가 우선시되고 모든 것들을 경제적 가치로 평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맘몬(돈)’을 숭배하거나 이것에 현혹되는 삶을 살아서는 되지 않습니다. ‘돈’을 가지고 인생을 평가하거나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돈’을 가진다고 해서 자신의 모습과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1위입니다. 근데 자살하는 사람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부자이고 지식인이고 사회적 명망가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니고데모 - 바리새인, 유대인의 관원

오늘 말씀에 예수님을 몰래 찾아오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이라면 그 당시 사회의 지도층의 일원입니다. 그들 역시도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으며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큰 구원자가 빨리 나오기를 바라며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십일조와 기도와 금식을 하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대한 열심히 강한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아니라 자신의 열심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비판했고 예수님도 그 무리들에게 마태복음 23장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철저한 자기 위선과 가면을 벗으라고 예수님은 말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적대적 관계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근본 이유는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이나 사회적 영향력의 축소를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도 구원의 대상이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불경건하고 믿음이 전혀 없는 자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의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0절 말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를 강조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의롭게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수님도 인정하는 바였습니다. 문제는 자신들의 의로운 삶들을 말하지만 자신의 의로움과 반하여 자신의 불의함을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식인들의 자기 한계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사람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더 많은 교훈을 얻기 위해 예수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보다 중요한 것은 니고데모의 신중성을 보여줌과 아울러 예수께서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들을 통해 당신의 교훈들을 확증하셨다. 니고데모가 예수의 표적들을 통해 예수의 탁월하신 교훈 능력을 인정하였던 것은 중요한 통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예수의 교훈보다는 표적 자체에 더 큰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행하는 이 표적은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는 말 속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랍비’가 되려면 수년간의 교육을 받아야하며 율법학자단에 가입하여야 하며 서품을 받아야 하는 당시의 관례를 볼 때 40세가 넘어야 랍비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랍비라는 칭호를 받았을 것이고 지식인층에게도 그의 명성이 널리 알리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이 당대 사람들에게 새롭고 자신들의 주장하는 것을 넘어선 것을 보고 예수님의 교훈을 받고자 했을 것입니다. 지식인들에게는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가 강렬합니다. 우리 사회도 지식에 대한 욕구는 어느 사회보다 더 강합니다. 아마 그래서 불교, 도교, 유교, 그리스도가 더 빨리 접목되고 확산되어져 나갔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과의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다른 사상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수용할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배척의 시간이 지나면 그 사상들이 풍성히 꽃 피우고 널리 퍼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민족의 개방성과 조화성을 말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들의 한계성과 지식의 부정확성을 고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율법의 말씀을 연구했는데 예수님은 율법에서 말하는 의와 신을 뛰어넘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교화시키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러 왔습니다. 주류사회의 지식인이 비주류 사회의 사람에게 자문을 청하러 온 것입니다. 역사학자로 말하면 서울대 사학가 출신 교수가 대구의 알려지지 않은 향토 사학자에게 찾아와서 묻는 모양새입니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서울의 대형 교회 목사님이 평신도에게 묻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서열의식’에 갇히게 되면 참된 진리를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전 공자의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권위의식, 서열의식을 벗어나야 참된 진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 우리교회는 학력이 유학을 갔다 온 박사쯤 되어야지, 석사는 되어야지 막연하지만 면접을 치를 때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기에 외적인 요인도 중요하지만 형식과 기준이 말씀 중심적이어야 하지 세상의 학문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튼 현대인들은 많이 갈급한 것 같습니다. 아니 예수님 당시에도 갈급함이 있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 뿐 아니라, 4장의 수가성의 여인, 제자들, 수많은 병자들, 여자들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문제들을 도외시한 채 자신의 권력 유지와 지신들의 권위를 앞세우며 힘든 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기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며 영적인 갈구를 해결해 주는 예수님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최근 ‘비정규직법’에 대한 처리를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정부, 여당, 야당, 노동계가 모여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했지만 정작 주체인 비정규직의 사람이 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노동현장에서 가장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정규직 직원들입니다. 이들은 노조를 통해 합법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고통 받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대승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몰론 멀리 바라보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피해를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작 자신이 그 자리에 있다면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로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이 말들이 예수님이 진정 아파하시고 자신의 친히 고난 받으시면서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당장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으며 우리가 알 지 못하는 어려움 속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우리 역시도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갈망(갈급함)이 생겨나는 이유   

니고데모를 통하여 보았을 때 그가 밤중에 예수님을 만나야만 했던 이유는


첫째, 지식과 현실의 부조화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충분히 교육받았고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사회에서도 존경받을 만한 위치였습니다. 자신의 의를 주장할 만한 종교적 의무도 성실히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그가 자신들의 입장에서 볼 때 비주류의 사람인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가 이런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만난 건 아마도 지식인층이 가질 수 있는 지적 호기심일 수 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단순한 지적 호기심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이 행하시는 표적은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표적이란 기적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동일하게 이루어질 때 쓰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사랑한다라 말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의 문제 육신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만 의롭다 생각하며 제사장 집단이 ‘사두개인’들과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타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민중(오클래스)들을 무시했습니다. 자신의 의라는 것이 구원을 이룰 것이라 믿으며 살아가고 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는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으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심판받게 될 것이란 말씀을 듣고는 가슴이 찔렸을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하며 그의 경고를 무시했지만 니고데모는 자신의 한계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분이 하시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이 말은 그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다른 종교적 지도자들과는 현격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 갈 때 자신 지식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사회적 정의에 대해 주저앉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중간층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상층에 진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저도 한 때 그런 사람들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이용하여 사회의 권력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니고데모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유약한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서 말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도 현실의 부정과 부패를 알면서도 타협해 사는 유약한 사람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무튼 니고데모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깊이 그에게 빠져들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둘째는 갈망하는 대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있을 때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랍비’ ‘하늘에서 오신 선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 이고 하나님이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이 바로 자신과 대화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구원자를 바로 옆에 두고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참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더 속이 타들어 갑니다. 자신이 알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였을 때 더 갈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수학을 가르치다가 막히는 문제가 생기면 수업을 하지만 머릿속에는 계속 풀지 못한 문제를 가지고 애타합니다. 수업 마치고 다시 해결하려고 수많은 책들을 찾아봅니다. 유사문제를 찾아 해결해 보려는 시도를 합니다. 어떤 경우는 며칠을 그 문제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해결을 시도하고 잘 되지 않으면 멍해집니다. 수업하다가 애들이 그럽니다. 선생님 지금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습니까? 온통 내 생각 속에 그 생각만 가득하게 됩니다. 이런 답답함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찾아가게 됩니다. 해결해 줄 만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계산합니다. 잠정적으로 내 결론에 긍정적으로 답할 사람과 부정적으로 답할 사람을 나누어 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상처를 덜 받고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까?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대상을 자신의 관점으로 나누는 것이 올바르지 않습니다. 바르게 판단해 줄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내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 줄 사람을 만나고자 노력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렇게 하면 인생의 성공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니고데모의 선택은 올발랐습니다. 근데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의아해 합니다. 처음 듣는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야 합니까? 우리는 성경의 스토리를 알고 있으니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 중생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알고 있지만 거듭나야 한다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예상외로 많습니다. 존경의 대상, 경배의 대상을 찾았을  지 몰라도 자신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듭남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셋째는 거듭남의 진리를 몰라서입니다.

대상은 바로 찾았으면 거듭남의 삶을 알아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고 구원의 기쁨을 얻을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구원은 지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식은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길만을 제시해 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판단은 자신이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는 있으나 그 의가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의한 구원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거듭남의 비밀을 깨닫지 못해서입니다. 마치 이 의식이 신비스러운 의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맘에 성령이 오셔서 내주하실 때 그 구원의 신비는 풀려지게 됩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삶으로의 여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이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영광의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아직도 여러분의 육신의 법을 쫓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법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거듭남의 비밀을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예루살렘에 왔을 때 등장합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 중에 예수를 믿는 자가 있느냐? 했을 때 니고데모가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예수님을 판결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을 변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의 확실한 신앙을 보여주는 대목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장례를 정중하게 치렀다는 내용이 성경이 나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그는 예수님의 거듭남의 비밀을 듣고 신앙이 점차 자랐으며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은 것으로 확실시 됩니다.


거듭남의 비밀과 함께 자신의 죽음을 예고함

예수님은 구원의 완성을 위해 자신이 죽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지 인류 구원의 일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아마 제자들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면서 말씀을 깨닫고 가슴 아파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자기 구원의 시작은 거듭남에서 시작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것이 갈급함을 푸는 열쇠입니다. 여러분들이 갈망하는 것이 거듭남, 성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갈망해야 찾아오십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갈망하면서 주님의 보내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