삻 돌아보기

물레방아 공원(경남 함양 안의)

어저나 2009. 8. 11. 12:43

답사여행을 하다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사실을 알게되거나 만나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된다. 우리의 지식이라는 것이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잘 알면서 새로운 지식을 통하여 자신의 만족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이다. 이런 것 때문에 답사는 하는 것이다. 또 답사를 통하여 삶을 배우기도 한다. 이제까지 이성이라는 창고 속에 갇혀 있는 것들이 세상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내 아이들에게 우쭐하면서 내 자신이 역사학도로 과거의 삶에 대히여 많이 알고 있음을 자랑스러워 한다. 가장의 권위를 세우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 기행속에서 역사적 사실을 만날 때마다 아내에게 약간의 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나를 마음껏 뽐내기도한다. 그때만큼은 아내에 대한 승자로 군림하게된다. 부부끼리 그게 뭐그리 중요하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정작 약한 나에게 나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도구이기에 중요한 시간이다.

 

'물레방아' '물레빙아간은 1920,30년대 소설에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한다. 아주 에로틱한 장소이다. 동네의 청춘 남여의 은밀한 사랑의 장소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원래의 기능은 곡식을 찧는 장소이지만... 이제 물레방아를 보는 것은 흔치 않다. 도시의 경우는 찻집의 조경으로 이용될 뿐 다 허물어져 근대화의 그늘로 사라지게 되었다. 암튼 물레방아간은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며 동네 아낙들의 재잘거림이 들여오는 듯한 곳이다.

 

물레방아의 시작은 중국에서는  약 3000년전에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물레방아가 우리 역사속에서 생활의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년 하고 조금 더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레방아 시원기"

 

물레방아는 1789년 시신의 일행으로 중국(당시 청나라)을 다녀온 연암 박지원 선생이 중국의 사상과 문물에 관해 쓴 열하일기를 통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러한 물레방아는 연암선생이 1792년 함양군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여 재임(1792~1797)하면서 직기(베틀),풍구, 용미(인력 양수기)등의 농기구와 함께 만들면서 실용화되었습니다.

 

이 지방 노인들의 고증에 의하면 당시 최초의 물레방아가 만들어진 곳이 안심마을 근처라고 합니다. 물레방아는 평화롭고 넉넉하고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해 줄뿐만 아니라 이용후생, 경세제민, 실사구시로 요악할 수 있는 현실 개혁적 실학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양 산천 물레방아 물을 안고 돌고 우리 집에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도네.."라는 민요가락처럼 푸른산 맑은 물의 아름다운 고장 우리 함양를 저욱 살기 좋은 곳르로 만들고자 하는 군민의 의지를 담아 당대의 문필가요 농경문화의 선구자였던 선생의 사상괴 업적을 재조명하고 오늘날 농촌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정신적 지표를 삼고자 여기 용추계곡 입구에 물레방아 시원지를 복원합니다. 

 

2000년 6월

함양군수 

 

 

 

 

 

 

 

돌모리

이곳의 돌무더기는 임진란이 끝나고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왜병을 물리치려고 이고장은 물론 인근 지역 이낙네까지 힘을 합쳐 인근 아낙네까지 황석산성을 쌓았다. 이것을 본 마귀할멈도 합세하여 돌을 나르다가 잠시 휴식하고 있을 때 황석산성이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니 그 자리에 졸을 놓고 통곡하였다. 마귀할멈과 아낙네의 눈물이 돌에 스며들어가 돌과 돌이 붙어 지금과 같은 큰 바위기 되었다고 한다. 넓이는 수백 평 높이는 수십미터에 달하엿으나 도로확장등으로 훼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함양군수  용추계곡 자연보호협의회

 

 

 

용추계곡 입구에 계곡을 넘어 산길을 나무로 다리를 만들어 자연으로 들어가게 한다.

 

 

  

 

 

 

 

물내리의 보건소이다. 한옥으로 잘 단장되어 있어 눈을 잠시 머물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