삻 돌아보기

개실마을 김종직 선생의 종택을 다녀와서

어저나 2009. 6. 9. 17:40

 

고령에 딸기 따러 감

고령에 딸기 따러 간단다. 아침에 뜨이지 않는 눈에 힘주고 고령으로 내달렸다. 길이 좋긴 좋았다. 집에서 출발해서 1시간도 되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미 다른 분들은 다 와 계셨다. 조금 기대하는 마음으로 딸기 하우스로 들어갔다. 작년에 많이 땋기 때문에 올해도 많을 줄 만 알았다. 작년에는 딸기 정말 많이 있어서 욕심이 나서 계속 일을 했던 것 같다. 또 유기농이라 바로 목이 마르면 먹으면서 일했다. 돈도 내는 것이 아니라 따면 다 내 것이 되었기에 많이 따려고 애썼다. 그런데 하우스 안에 들어가 보니 웬걸 작은 것 밖에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도 유기농이라 그 자리에서 바로 먹어 보았다. 달콤하니 맛이 있었다. 열심히 했지만 작은 것, 덜 익은 것이 많아서 수확량은 떨어졌다.


애들은 신이 나 내 보다 더 많이 땄다. 아내는 정말 열심히 일 하고 있었다. 작년에 내게 면박을 줬다. 그 많은 시간에 뭘 했냐고? 올해도 그 소리 들었다. 올해는 집집에 신랑들도 동참했다. 내보다 물론 연배가 많은 듯했다. 처음 만남이라 좀 어색했지만, 유승자 선생님 신랑이 여기서 조금만 가면 김종직 선생 종택이 있는 ‘개실 마을’이 있으며 거기에 가면 자전거, 뗏목도 탈 수 있다며 우리 애들하고 가지고 했다. 좀 미안했지만 아이들 핑계로 개실마을로 향했다. ‘점필재’ 조선 유학의 출발점인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좀 설래기도 했다.

 

 유기농이라 농약은 전혀 쓰지 않는다. 그 자리서 따 씻지 않고 먹어도 된다.

 

 

 

 

 

 

 

 

 

 

 

 

 

 

 

 

 

 

 

 

 

 

 

 

개실마을을 찾아서

저번 직장에 선생님이 자기가 ‘김종직(점필재)’ 선생 후손이라고 얼마나 자랑하던지 듣기 싫어 자리를 피한 적도 있었다. 속으로 우리 선조는 성리학을 고려에 들이고 바로 ‘정몽주’와 ‘길재’ 선생의 스승인 ‘이색(목은)’ 집안이다 하면서 크게 말하고 싶은 적도 많았으나 괜히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 것 같아 참았다. 어찌 되었던  ‘점필재’선생은 조선 성리학의 중심이었다. 그는 무오사화로 인해 ‘부관참시’ 당했던 사람이지만 그이 뒤를 수많은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성립과 ‘주리론’(이황)과 ‘주기론’(이이)로 이어져 사상학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큰 인물로 다가온다.

 

 

김종직(점필재)
‘김종직’ 그는 밀양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김숙자’는 선산사람이었다. 조선 초기(16세기)에는 남자들이 결혼하면 부인이 사는 곳으로 가서 살았다. 아마 김종직 선생의 어머니가 밀양  박씨이었기에 그가 밀양에서 태어난 듯하다. 그는 성종 때부터 정계에 ‘사림파’들이 득세하던 시절 관직에 진출하여 그의 후학들을 정계로 불러 모았다. 이들 세력들이 급성장하자 기존의 중심 세력이었던 ‘훈구파’들이 사림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일어났던 일이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이다. 이는 사초 때문에 발생했는데 바로 그 유명한 ‘조의제문’이다.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항우’가 ‘초나라’ 회왕(의제)를 죽인 것을 빗대어 쓴 글이다. 이 글 때문에 김일손, 권오복 등이 죽음을 당하고 김종직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참혹하게 찢기는 일이 벌어졌으며, 정여창, 김굉필, 이종준 등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중종이 즉위한 뒤 김종직의 죄가 풀리고 관직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송시열과 김수항의 건의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개실마을은 ‘김종직’ 선생의 무덤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자녀들을 다 죽이려 하는 순간 이들이 도피해 들어간 곳이 지금의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 1리 지금의 ‘개실마을’이다. 이런 아픈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마을이었기에 더 정숙해 보였으며 그의 후손들도 그를 기리기 위해 마을 잘 보존하며 다양한 민족적 전통을 공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의 방문이 잦아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이 있을 건데 종가에서 여러 가지 사실을 물었을 때에도 자세히 말씀해주시고 설명도 해 주셨다. 참으로 고맙고 정다웠다.

 

김종직 선생 종택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6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으며,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은 김종직의 종택이다. 5대손 김수휘(金受徽)가 1651년(효종 2)에 이곳으로 이주·정착하면서 신축하였다. 김종직과 그의 부인 하산조씨(夏山曺氏)와 남평문씨(南平文氏) 세 분이 입향되어 있다. 선산김씨 문충공파에서 관리하고 있다.


안채·사랑채·중사랑·고방·대문간·묘우(廟宇) 등이 튼口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있고 건물을 돌아 들어서면 정면 8칸, 측면 1칸의 정침(안채)이 있다. 정침은 각주 위에 3량가구이며 맞배지붕으로 뒤쪽에 툇간을 두었다. 서쪽으로부터 2칸의 부엌, 2칸의 방, 2칸의 대청과 건넌방이 있으며, 전면 좌측에 중사랑채와 우측으로 고방채가 있다.


사랑채는 일자형으로 동쪽 끝에 2칸의 마루를 두고 왼쪽에 방을 꾸몄다. 묘우에는 김종직의 불천위신주(不遷位神主)를 모시고 있다. 전체적으로 동향이며 건물 주변에는 토석담장으로 둘러져 있고 정침 뒷편에 대나무 숲이 있다.  안채는 1800년 경에 사랑채는 1812년경에 지어졌다. 1992년 정침 기단과 담장을 보수하였다.

 

        두산 백과사전 EnCyber & EnCybe.com,

             

 

           

 

           

 

             

 

              

 

            

 

도연재

마을 바로 앞 낡은 비석 2개가 고즈넉히 세워져 있는 건물은 도연재 라고 하는데 이 건물은 김종직 선생의 과업을 기리기 위해서 지방 유림들이 건립한 강학지소다. 1886년 김종직 선생의 15대 주손인 김창현때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문은 안으로 굳게 잠겨 있어 관람이 쉽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재목을 후하게 써서 지은집으로 특징적인 것은 정면에 높은 누마루를 놓은 수법이 독특하다고 한다. 그밖에 남아 있는 김종직의 유품은 수필, 당후일기, 교지 , 첩지, 서찰, 호구단자등이며 세대별 고문서 114점과 김종직 선생의 수택유품등이 남아 있다.

            

 

           

 

                   

개실마을 

 ▶ 무오사화때 화를 입은 김종직선생의 5대손이 1650년 경에 이 마을에 피신하여 은거하며 살 때 꽃이 피고 아름다워 아름다울 가(佳) 골 곡 (谷)을 써서

     가곡이라 함. 

 ▶ 또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골이라하여 개화실 (開花室)이라고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개에실이 되고 개애실 마을 중 아랫 마을 이라 하여 아릇 개실

     하가  또는 하가곡이라 함

 ▶ 합가리의 중심마을이며 선산 김들의 집성촌 마을 임

     

        

 

         

 

        

 

 

택과 전통체험의 만남-고령 개실마을

         http://www.gaesil.net 

         자세한 정보가 실려 있습니다.

위  치 :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1리 개실마을


문  의 : 개실마을 054)956-4022

  

    대나무로 된 뗏목 체험도 재미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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