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예수의 수난 예고와 섬김의 삶

어저나 2009. 6. 27. 18:37

예수의 고난 예고와 섬김의 삶(막 9:30~37)              (2009. 6. 28)


1.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을 말할 때 항상 부활도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번째의 고난에 관한 큰 예언은 신적인 불가피성에 대하여 언급이 없기 때문에 첫번째의 예언(8:31)과 차이가 있고 오히려 그 신적 필연성에 확신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성취된 것(“넘겨진다.”)으로 설명이 나옵니다. 또한 사람의 의사에 방임된다고 하는 것과 폭력에 의한 죽음이나 부활에 관한 언급이 그 구성에 있어서 간결합니다.

 

2. 새로운 요소는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진다(저자의 표현은 “de- livered up”이다. 참조 14:41)입니다. “넘겨진다”(“to deliver up” 또는 “hand over”)는 법정의 맥락이나 또는 유대인의 순교 신학(Jewish theology of martyrdom)으로 볼 때에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 개념은 간단하게 한 사람의 신병이 다른 권력자의 손으로 넘어간다고 하는 것 이상으로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이 사실적으로 성취함을 의미합니다. 특수한 의미로서 유대인의 순교 사상에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보다 깊은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순교자가 넘기어지는 일을(제지하거나) 허용하시거나 합니다. “사람들의 손에”는 예레미야 33:24에 명백한 바와 같이 포기(abandonment)의 개념을 다시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24에 보면 “백성들의 손에 넘기어진 후 죽임을 당하고”라고 전문이 나옵니다. 유다가 배반하고 예수께서 체포당하신 후부터는 “넘겨진다”의 낱말과 배신 행위가 하나로 결합이 됨이 자연스러운 표현이 되었습니다.(참조, 3:19, 14:41) 그러나 성경의 이 용어가 지닌 배경은 그 사상이 더 심오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집니다. 그리고 역사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은 그 의미가 하나님의 종말사건에 집중하여 있기 때문에 궁극적 의미를 함께 지닙니다. 31절에 나오는 문절의 어구성은 이사야 53:6, 12(70인역으로)에 의한 영향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 곳에 보면 하나님의 종(the Servant)의 대속적인 죽음이 중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명백한 사실로서 하나님의 구속적 의지가 당신의 고난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3. 누가 큰 가에 쟁론의 이유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을 본 자와 산 아래에서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치료하지 못한 그룹간의 갈등이 아니었나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측근 그룹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 간의 갈등이 유발되었다 보면 됩니다. 세상에는 측근 그룹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류와 비주류들의 계파간의 갈등이 이루어집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 미국에도 ‘매파’와 ‘비둘기파’의 갈등이 이라크 전쟁을 통하여 첨예하게 대립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현재 진행령입니다. 대북지원을 놓고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층과 반대하는 층의 격렬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헤게모니 싸움’ ‘권력 투쟁’입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기존의 보수층과 새로운 보수층인 뉴라이트 전국연합이 광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젊은이에게 희망을 주던 일부 인사들이 ‘뉴라이트 운동’을 전개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명박 정권을 창출하는데 사상적 기반을 형성 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가 어떤 정치적 입장을 지니고 있느냐에 있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하면 잘 전할 수 있는 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 조금은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갔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눔과 섬김의 정신에 감동하여 일을 시작했는데 하나의 시민운동에 잘 모르고 첫발을 내 딛었는데 그것이 다른 보수잔체와 연계되어 일이 진행되어 아쉬움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논쟁점 등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라신 것은 상처받고 가난하고 억울하고 힘든 자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의 권력과 타협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나라(하나님의 나라)에만 온전히 추구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한 왕국을 세울려고 하셨다면 충분히 이루셨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정치화되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거를 통하여 국민의 권리의 신장을 위해서 직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 단체의 성격과 방향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세력이 기독교인인가 아닌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 이렇게 산다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평화의 나라가 임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정치 권력에 목표점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그들을 살릴 방도만을 찾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에게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남들보다 높아지려는 욕심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그들의 지위를 높이기보다는 그들의 지위를 낮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입니다. 


둘째로 더 많은 일과 겸손을 행하는 기회를 얻고 또 그것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는 사람 외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더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 가장 겸손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고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장 온유해질 것입니다.  그는 어린 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37절)라고 하셨습니다.  “겸손하고 온순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은 내가 인정하고 지지하는 그런 사람들이며 그것은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