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우리가 경계할 것 (막 9:38~40)

어저나 2009. 7. 4. 15:35

우리가 경계할 것 - 편협한 고정관념 (막 9 : 38 ~ 40)           (2009. 7. 5)


‘나, 너, 우리’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배운 단어였습니다. ‘우리나라, 무궁화, 태극기’란 단어를 배웠습니다. 아마 공동체 주의,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을 강요하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우리 가족’ 등 대부분 나와 관계된 말을 표현할 때 ‘우리’를 넣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곤혹스러울 때는 ‘아내’를 말할 때입니다. ‘우리 아내’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의 내자’ ‘저의 집사람’ ‘저의 와이프’란 말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단어 속에 담긴 의미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점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공동체 중심주의로 서로의 협력을 강조하며 서로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협동하고 상호 부조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인 ‘두레, 울력, 품앗이, 대동계’ 등 좋은 풍습이 많이 있습니다. 단점은 공동체주의를 뛰어넘어 개인의 생활의 통제를 가하며 하나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집단주의’ 나갈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전체주의’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파시즘, 나찌즘, 군국주의’입니다. 이런 집단주의는 배타적 성격이 강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입장을 강조하며 획일화를 추구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단 종교들은 ‘집단적 폐쇄성’과 ‘교주중심주의’를 가지고 있으며 자기의 논리만 일방적으로 말하지 남의 의견을 듣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 내에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파별로 분열되는 것에도 이런 ‘자기 우월성’에 입각한 생각 때문에 많이 발생합니다. 정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경에 대한 확실한 오류 등이 문제였다면 어찌할 수 없겠지만 개인의 ‘보스’ 중심의 운영으로 벌어진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 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러한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항의함

좀 과격하게 말하면 요한이 예수님에게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행위를 하지 말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금하였느니라’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함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에게 부여되지 않은 권한을 행사하느냐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눈꼴사나워서 못 보겠으니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말입니다. 다분히 예수님이 동조해 주시리라고 생각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답변이 나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아마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일시적으로 멍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은 하나님 나라의 운동은 하나님을 중심하는 것이지 어느 특정 집단이나 내 자신의 이익과 권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적은 내부에 있다.’란 말이 있습니다. 같은 집단 내에서 이념과 노선 때문에 서로를 질시하고 타협을 거부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먼저 제자들의 오류를 찾아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해 보겠습니다. 

제자들의 문제점

첫째, 자신들만이 예수님의 대행자이며 그의 능력을 소유할 자라고 하는 고정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천국을 전파하게 했으며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비유의 해석을 들어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었다는 특권의식이 서서히 몸에 베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겸손함이나 자기의 부족함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다른 제지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특별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소녀가 죽음에서 살아나는 곳, 변화산 사건,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에는 천국 열쇠를 주겠다는 예수님의 말씀 등 그르면서 제자들 사이에서도 우월성을 지니게 되어졌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 라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집단 내에서도 서열의식을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제자집단만이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이며 어느 누구도 예수 이름으로 함부로 귀신을 쫓는 행위를 하거나 병을 고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타당하게 보입니다. 일정 기간 훈련받고 그 집단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집단 내에서 인정하는 사람만이 세움을 받는 것은 타당합니다. 예수님은 70명의 사람들을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일이나 병을 낮게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을 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과연 열두 제자들에게만 주워진 특권이었을까요?  이 대답은 오로지 예수님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답변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아니다(NO)’입니다.


둘째 자신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전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며 우리자신들처럼 정당하게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올바른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7월 4일 한겨레신문에 갈릴레이 재판이 공개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갈릴레이는 1633년에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고발되어 종교재판으로 유죄 평결을 받았으며 1992년 요한 바오르 2세에 의해 360년 만에 공식 복권되었습니다.

피카노 주교는 ‘갈릴레이 재판 사건은 과학이 교회를 가르칠 수 있다고 자만하지 말 것과 동시에 교회가 더욱 큰 겸손함과 신중함으로 과학적 문제에 접근하라고 가르친다’고 해석했다. 피카노 주교는 길릴레이 종교 재판의 최후 진술도 공개했다. 갈릴레이는 유죄 평결직후 심판관에게 ‘두 가지를 청구합니다. 하나는 나의 정직한 믿음이고, 또 하나는 기톨릭 신앙입니다.’고 말해 과학적 신념과 종교적 신앙을 모두 인정해 주기를 요구했다.’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오류에 대해 명백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특권의식, 자기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는 사람은 적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 사건들의 결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아집과 오류 속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잘못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일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 진리에 관한 부분입니다. 상대적 진리, 문화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우리의 그릇된 사고방식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 하에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39절)고 하셨습니다.  선을 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다소 결점이나 변칙적인 모습이 있다 해도 선하거나 선을 행하는 것이 금지되어선 안 됩니다. 그 점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가 가려진다 해도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말했습니다.(빌 1:18)


첫째  우리는 기적을 행할 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한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둘째 종교단체가 다르다 해도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사단과 대항하여 싸우기로 동의했다면 서로서로를 같은 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나와 함께 아니 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 12: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사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비록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아도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우리 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열려 있는 너그러운 정신으로 12제자의 고정 의식인 협소한 배타주의를 반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확신이 없으면서 예수님을 대변하여 당연히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자부하였으나 제자들의 행동은 권한의 남용입니다. “그를 금하지 말라”의 권면의 내용에는 큰 일이 행하여졌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고 있다는 긍정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시선과 안목이 넓어져야 합니다. 부단히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사회 속에 거하면서 올바른 관점에 있는가? 에 대해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안 그르면 의도하지 않았지만 남에게 아픔과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