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어저나 2009. 10. 23. 14:59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 단 3 : 13 ~ 18 )                    (2009. 10. 25)


한 그림에서 펌프가 그려져 있고 ‘부흥의 마중물이 되자’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참 멋있는 문구라는 생각과 교회를 알리는 현수막으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마중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습니다. 신문을 읽다가 행정도시 이전에 관한 인터뷰에서 중앙정부가 이전해야 지방혁신도시 사업도 활발하게 전개될 것이기에 먼저 정부가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펌프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려면 한 바가지의 물이 먼저 부어져야 합니다. 이 물이 바로 마중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의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부흥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갈망하는 자들은 ‘마중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한 바가지의 물’ 이 물은 먼저 쏟아져 나오기에 먼저 없어지지만 많은 물을 쏟아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이 마중물이 되기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사람들을 향해, 지도자를 향해 독설을 내뿜을 것이 아니라 자기희생을 통하여 그리스도 가신 섬김과 사랑의 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 속에 임하는 것을 바라면서 기꺼이 헌신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시대에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바르게 만들며 하나님의 영광을 믿음의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권능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게 했으며 하나님만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의 올곧은 기개가 살아있을 때 하나님은 삶 가운데 동행하시며 민족들 속에서 즐거이 행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이 없어질 때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 속에서 고통 받게 하셨으며 나라를 빼앗기게 되며 그들의 삶의 터전이 무너지며 성전이 허물어지는 비극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열왕기 상하의 말씀을 읽어보면 북쪽 이스라엘의 왕과 남쪽 유다의 왕의 기록이 나오는데 그들의 통치와 그들의 죽음의 기록에 이스라엘 왕들은 ‘여로보함의 길을 쫒아’ 행함으로 악을 행하여 범죄함에 이르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멸망의 길에는 항상 ‘여로보함’의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쪽 유다의 왕들의 기록을 보면 다윗의 길과 그 부친의 길로 행하였는지 아닌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실패한 왕들을 다윗의 길을 쫒지 아니하고 그 부친이 섬기던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믿음의 선조를 두고 계신 분들도 있고 이제 당대에 믿음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자손들이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할아버지를 쫒아 아버지를 쫒아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당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천대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믿음의 사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연극이나 영화나 드라마들 보면 모두가 다 주연에 주목하고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주연보다는 조연들의 움직임에 대하여 주목하게 됩니다. 그 극을 더 살아나게 하는 데는 조연들의 역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극을 ‘감칠 맛 나게’ 하는 것은 조연들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저도 어릴 때는 주연들의 움직임에만 주목했습니다. 이제는 극 중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야구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지금 미국은 월드시리즈를 앞에 두고 리그 챔피온 결정전이 끝났습니다. 내셔널 리그에서 필라델피아가 다저스를 꺾고 대망의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 선수’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게 되었기에 더욱 기쁜 일입니다. 근데 그는 선발투수도 마무리투수도 아닌 중간 계투입니다. 연극에 말하자면 주연도 조연도 아닌 단역입니다. 이 보직은 단 한 선수를 상대할 수도 있고 몇 회를 던질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팀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형태로 사용되던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우상인 ‘박찬호’선수가 그렇게 취급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맡겨진 것이 팀의 승리를 위한 최선이기에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주연의 찬란한 영광도 조연들의 빛이 아니라도 단역일지라도 팀의 월드시리즈의 우승을 위해 혼신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의 중심, 주연은 다니엘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주인공인 다니엘과 그의 믿음의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야기를 빼놓고는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왕도 빼놓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다니엘의 믿음의 세 친구로만 이야기하기에는 그들의 믿음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신바빌로니아가 종교관용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왕의 진미와 우상에게 드린 음식을 거부하기에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렴 없이 시험해보기를 간청했고 그들의 요구를 승낙 받았고 그들은 분정된 진미와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하였으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윤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단 1:17) 우리는 이 부분을 세심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혼합주의를 배격하고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믿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저에게 대통령, 국회의원, 국무총리, 장관, 총장, 교장이 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높일 것입니다. 정작 그 지위에 오르고 나며 하나님과의 약속에서 변명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 나라는 기독교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이곳은 기독교 학교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과 종교 문제로 다툼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냥 제 혼자 열심히 그리스도를 위해 순종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의 뒤에서 도움을 주겠습니다. 그러면서 더 조심하며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뒤죽박죽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얽힌 실타래를 풀기에는 너무 많이 꼬여있습니다. 정녕 믿음의 사람들은 다 숨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럼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해 나갑니까? 전 한 때 ’전병욱목사님‘의 지성적 야성에 매료된 적이 있습니다. 지성만으로 산지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야전군을 지휘할 야전 사령관이 필요한 때라는 말씀에 동의 했습니다. 아무도 무너진 제단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누가한단 말입니까? 전 어립니다. 저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돈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지식이 없습니다. 정녕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주님이 이루어주신 것과 같이 우리는 이룰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면 돌파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강한 돌파력으로 무너진 우리의 신앙을 회복할 때입니다. 변명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지금도 숨어서 회복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회복시키기 위해 힘을 합칠 때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체험 속에 갇혀 전체를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좀 더 멀리, 좀 더 깊이, 좀 더 크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른 종교와 혼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믿음으로 선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다니엘에게 지시과 학문과 재주에 명철을 더하여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영광을 높이는 자들에게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명철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어눌해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의 어리석음

느부갓네살왕은 성경에 나오는 바벨론 왕 중에 가장 유명한 왕이었습니다. ‘느보’라는 신의 이름과 그릇이라는 뜻의 ‘갓’과 지키는 자라는 뜻의 ‘네살’이 합쳐진 것으로 ‘느보가 왕권을 수호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전쟁을 통하여 고대 근동에 넓은 영토를 소유한 대제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행히도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하나님 능력과 세상의 지배자 되심을 보았지만 하나님을 많은 신들 중에 으뜸으로만 이해하는 어리석은 왕이었습니다.


그가 밤에 꿈을 꾸고 그 꿈을 알 수 없어 번민하던 중 모든 박사들이 해결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이 그 꿈을 가르쳐 주고 해석해 주었을 때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단 2:47)그는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는 많은 신들 중에 하나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신 중에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하신 한 분 밖에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외에는 다른 신은 없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은 결정적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두라 평지에 금 신상을 세우고 절하지 않는 사람은 풀무 불에 죽이기로 작정하고 그 명령을 시행했을 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고 왕은 그들을 괘씸히 여기고 풀무 불을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해 그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 가운데 함께 하였고 그들은 아무런 상함을 받지도 않음을 친히 목격했습니다. 또 그는 고백합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단 4:28~29) 이 말도 가만히 살펴보면 ‘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지만 자신의 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교만했을 때 들짐승과 함께 지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어서 일곱 때를 지나서 그가 회복되었을 때 그는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며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낮추심이니라.”(단 4:37) 그는 하나님을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모든 권력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의 한계는 하나님을 자신의 구원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신들 중의 하나로 보는 인식의 한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다니엘의 유다 민족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으나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런 유의 사람은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느부갓네살왕과 비교되는 사람들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이들은 영광과 존귀가 있었을 때 그 근원이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을 떠나지 않은 믿음의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들의 고백은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의 고백은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옵소서.” 이들의 고백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설혹 죽음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을 버리지도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입니다.


이들의 신앙이 참되다는 것은 이미 왕궁에서 보인바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체험했으며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라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축복 속에 거할 때만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려울 때 함께 하신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을 때도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하나님이 자신을 잊어버릴까 오히려 두려워하며 늘 정결한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하며 살아갔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돌아다 볼 때 축복의 말씀에는 아멘을 했지만 고통과 고난의 삶에서는 불평과 원망의 삶을 살지는 않았는지요? 지극히 낮아졌을 때 예전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았는지요? 혹 우리가 두 마음 갖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혹독히 훈련시키셨으나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도 원망과 불평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축복의 하나님으로 기억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풍요와 축복이 넘쳤지기만 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혼합주의 삶을 살게 되고 그로 인해 고통과 고난이 발생하면 하나님을 찾는 일을 반복적으로 했습니다.


우리도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돌아서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과 환란과 시련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참된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현재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우리는 현재에 머물러 있지 말고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생각해야 합니다. 영광은 사람들에게 쓰일 수 없는 말이지만 우리는 그의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택하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고난 가운데 그냥 두시지 않으심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원망과 불평의 삶으로 인하여 멸망 받는 백성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순례 하는 동안 좌절과 절망 속에 거한다 할지라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세상의 권위와 권력과 시기와 질투 가운데 구원하셨듯이 우리를 반드시 구원하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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