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변질된 기독교의 본질 회복

어저나 2009. 10. 31. 21:42

변질된 기독교의 본질의 회복 ( 행 2 : 43 ~ 47 )         ( 2009. 11. 1 ) 


대학교 다닐 때 누구나 다 한 번쯤은 이상사회를 꿈꾸었을 것이고 그 중에서 ‘공산주의’(사회주의)가 이루어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최종의 유토피아, 이상사회인 공산 사회는 프롤레타리아가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그들이 생산을 통하여 얻은 이윤을 분배하는 그 사회로 나아서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을 통해 기득권을 쟁취해야 하지만 그들의 나약성으로 그들의 전위조직인 ‘공산당’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공산당이 혁명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합니다.


공산당이 혁명을 주도하여 혁명에 성공하면 그들은 기득권을 다시 ‘프롤레타리아’에게 넘겨주어야 하지만 혁명세력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게 되는 것을 역사를 통하여 보아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꿈꾸던 이상사회(유토피아)는 오히려 더욱 지배와 억압이 심해지는 ‘권위주의 체제’로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꿈꾸던 이상사회가 아닌 것을 우리는 실제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꿈이 얼마나 비이상적인지를 보고 있습니다.


본질의 변질

우리는 역사 속에서 처음에 추구하던 가치가 변질되어 원래의 형태를 잃어버리는 것을 목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인 20억 명의 정도의 신자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안식교,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등 우리가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기독교의 정의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삼위일체 유일신인 하나님을 안식교,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은 다 인정하기 때문에 포괄적 영역으로 그들을 기독교의 범주 안에 넣습니다.) 


기독교가 거대한 종교 집단이 되고 성장, 진화하면서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시대마다 변질되어 가는 것을 역사를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초기의 그리스도 공동체는 사회학자들이 인정하는 원시 공산제 사회였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공동선을 추구했으며 공동 분배의 삶을 살았습니다. 초기의 공동체는 ‘생활 공동체’였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저는 이 말씀에 감명을 받고 이러한 공동체의 삶을 오랫동안 꿈꾸어 왔습니다. 그래서 ‘떼제 공동체’‘모라비안 공동체’ ‘브러더 호프 공동체’등의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삶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들을 살기 위해서는 강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을 약속하셨고 그 성령의 임재가 잃어 났을 때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부정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드렸습니다. 그들의 삶의 원동력에는 성령의 강한 임재가 있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구원의 은혜에 감격에 깊게 잠겨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강원도 태백에 있는 ‘예수원’을 많은 사람이 동경합니다. 예수원의 설립자인 R.A.Toray 3세(대천덕 신부)는 성공회 소속의 신부입니다. 토레이 삼세는 그의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 부모님이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셨는데 그의 부모님은 자녀들이 자유주의 물결 속에 빠져가는 미국의 학교에 보내지 않고 잘 알려지지 않는 ‘조선’의 평양에 학교를 보냈습니다. 당시 평양은 성령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조선의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령의 임재에 대한 강한 갈망이 있었으며 그는 성공회 신부이었지만 오늘날에도 오순절의 강한 성령의 역사가 계속 일어난다고 믿고 있었으며 실제로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생활 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고 회복되어지는 것은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부인할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첫 번째의 큰 변질

기독교가 오랜 박해를 경험하면서 삶과 신앙과 생활의 터전과 교회는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박해의 시대가 가고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였습니다. 이제 핍박받던 그리스도인이 양지로 나와 교회를 세워가면서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주력하게 되었습니다. 서서히 기독교는 ‘건물 중심적인 교회’로 바뀌어가게 되었습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건물뿐만 아니라 가정 공동체를 통하여 신앙을 키워갔으며 가정 공동체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강한 교회였습니다. 가정 공동체의 쇠퇴는 기독교가 가지는 양 날개에서 한 날개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외부적으로 강하게 성장하였지만 신앙의 힘이 약해지며 서서히 국가 권력과 결탁하고 이방 종교를 수용하는 형태로 변질되어져 갔습니다. 성직자들이 사람들을 지배 예속의 관계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세의 봉건제 사회를 지탱시켜 나가는 힘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신앙의 발견과 자유는 엄격히 통제되는 시대를 맏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보이자 그리스도의 참 정신의 회복을 부르짖는 운동들이 나타나게 되어졌는데 이것이 ‘수도원 운동’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경건의 삶과 신앙의 회복을 위해 더 깊은 영성을 위해 기도와 말씀 연구에만 집중하는 이들이 나타났으며 또한 그러한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운동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변질에 대한 회복운동은 자신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을 쫓아가는 운동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수도원들이 사랑과 자기희생의 삶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의 큰 변질

첫 번째의 큰 변질이 기독교가 국교화 되면서 일어났다고 볼 수 있으며 두 번째의 큰 변질은 기독교가 세상 권력의 정점을 차지하면서 나타났습니다. 교황권이 점점 비대해져서 교황이 왕위에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교황은 막대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부정과 비리, 부패의 길을 가게 되어졌습니다. 성직을 매매하기도 하였으며 영주들을 통하여 막대한 종교세를 징수하였으며 ‘이단논쟁’과‘마녀사냥’의 미명하에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교황들은 그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성지회복이라는 미명하에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이 성지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회복하려고 했으며 성지회복을 통하여 성지 순례객을 보호하며 여행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미명하에 막대한 돈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소년 십자군’을 모집하여 어린 생명들을 전쟁터에 보내기도 했으며 많은 이방인들을 죽였습니다. 이슬람권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무참히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그리스도가 명령하지 않은 일이며 ‘선교’와 ‘성지 회복’이라는 말로 포장한다 해도 정당화 될 수 없는 행위들이었습니다.


세상권력과의 결탁은 인류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되었으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게 하였습니다. 구원이 마치 사람들의 선행과 자선에 있는 것처럼 설교하고 ‘연옥’이라는 것을 만들어 인간의 행위에 대한 처벌 기준과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선을 강조하게 되어 외식적인 사람들을 만들어 내게 하였습니다. 구원이 교회나 자신의 선행에 있지 않음을 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곳곳에서 봉기하여 참된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 종교개혁의 깃발을 내걸게 만들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시기에 많은 생명들이 무참히 죽고 전쟁과 살인과 묵인되는 어둠의 시대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의 큰 변질

종교 개혁을 통하여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을 회복하게 된 것은 정말 잘 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교회나 우리의 선행과 같은 행위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온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원리입니다. 우리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란 말씀이 참 됨을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 말씀을 위하여 주고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우리는 어려움 중에서도 우리에게 참된 신앙을 가르쳐 준 믿음의 선배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들은 죽음과 어둠의 고통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전수해 준 그들의 신앙을 쫓아 살아가야 합니다.


세 번째의 큰 변질은 기독교와 과학의 결합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이 쇠퇴해져 가면서 인간 중심의 철학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져 갔습니다. ‘경험론’과 ‘합리론’“그들이 참된 앎의 중심이 무엇인가?”에 답변을 추구하면서 도구화된 지식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일부는 이신론(우주의 절대 자연법칙이 신이라고 주장)으로 나타났으며 또한 지식을 도구화하여 실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진리만이 참된 것이라고 말하는 실용주의의 흐름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며 윤택한 삶을 살아가게 하였지만 사람들의 삶들을 예속화 하는 문제를 일으켰으며 증명되지 않는 지식은 인정하지 않는 상대주의적 사회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절대론 기반을 허물어 버려 사람들이 추구하는 참된 가치의 기준을 발견하기 힘든 시대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오히려 도덕적 타락과 물신 숭배주의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러한 이성 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기독교는 경건주의 운동을 바탕으로 신앙 공동체의 회복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18세기에 두 차례나 큰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미국에서도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퀘이커’‘모라비안’등 경건한 삶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공동체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와 과학의 결합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오늘날 우리는 원하던 원치 않던 ‘진화론’을 수용하고 살아가는 사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의 몸부림

지난주는 ‘종교개혁주일’이었습니다. 올해는 ‘갈뱅’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로서 우리들에게는 의미 있는 해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역사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목회자로서의 반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유산에 대한 참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들의 신앙도 박제화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개신교도들입니다. 우리는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도이지만 그들의 신앙과 차별화된 ‘믿음’원리를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입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기뻐했듯이 우리를 또한 ‘프로테스탄트’의 후예임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정신의 회복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져야 우리의 신앙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 중에서 차별화된 기독교인이지만 독단적인 개별화된 기독교로 전락하는 것 같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보편적인 원리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의 논리를 중심으로 보편성의 원리를 파괴해가는 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위기는 ‘보편성’을 잃어가고 있는데 우려를 금할 길 없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절대적 진리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소수이지만 교회들이 ‘유일성’에 근거한 듯이 절대적 진리로 포장한 ‘독자성’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교회만이 오늘날 혼란의 시대에 절대적 대안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정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회들마다 자신들의 조직 원리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동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중심이 조직된 원리인 ‘프로세스’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과정 중심주의’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시기를 놓쳐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변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이단인지 아닌지를 놓고 고민하고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목회자가 바뀔 때마다 교회의 ‘프로세스’바뀌어 교인들이 힘들고 노년층과 장년층, 청년층들이 공유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프로세스’는 초신자들이나 전도 중심적인 차원에서는 매우 유용한 도구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프로세스’가 중심이 된다면 교인들의 이동을 매우 힘들게 하며 다른 곳에 가서 적응하지 못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마치 구원이 ‘그 교회’에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구원은 교회의 조직 원리나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혈 위에 세워진 것이며 교회가 그리스도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성장 과정 중심주의로 흘러가면서 방향성을 잘못 잡아 가고 있는 듯합니다. 여기에 깊은 우려는 표하는 것은 작은 교회들이 없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들은 조직 원리를 강화해 나갈 뿐만 아니라 막대한 자본으로 자신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해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독자성에 빠져 보편성을 상실하는 교회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보편성을 잃은 교회에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운동이었습니다. 개인의 억눌린 신앙의 양심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참 정신의 비판과 혁명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데 있었습니다. 종교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자신의 이권을 차리기 위해 면죄부를 만들고 세금을 신설해서 많은 사람들은 도탄과 실의에 빠지게 하는 것에 대한 정당한 항거였습니다. 자신들의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을 이용한다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신흥 종교 귀족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배타성을 지니고 있으며 남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독자성을 강조하는 무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만이 성결한 마냥 자신들만이 이 시대의 대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낮은 자들의 친구이자 구원자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삶을 통하여 사랑을 증거 하셨습니다. 자신이 친히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십자가의 위대한 사랑으로 종결을 맺습니다. 십자가 끝에는 고통과 형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요즘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의 찬양을 통하여 내 맘이 많이 잠잠해지고 주님과 동행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여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함께 하시는 분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송은경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에 땅에서

주께 사랑 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 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죽일까? 살릴까?  (0) 2009.11.14
느후스단과 십자가  (0) 2009.11.14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0) 2009.10.23
넘어질 까 조심하라!  (0) 2009.10.20
누구에게나 성장통은 있다.  (0) 2009.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