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생각대로 해"

어저나 2009. 12. 23. 10:59

“생각대로 해” ( 삿 21 : 25 )                              (2009. 12. 3)


광고에는 매우 강한 중독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틀 전부터 “생각대로 T” 광고를 계속 보고 있습니다. 광고의 진화를 볼 수 있습니다. ‘되고 송’에 이어 ‘바비디 바비듀바’ ‘생각대로 해 그게 답이야’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 감명 받은 CF는 버스광고 편입니다. 한 예쁜 아가씨가 버스에서 위 손잡이를 잡고 있는데 가만히 보면 손톱에 메니규어가 아니라 기름때가 묻어있습니다. 노래와 함께 자막이 나오며 그녀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생각대로 해, 보고 싶을 때 보자고 해, 감출 필요 없어, 너답게 웃으며, 너답게 걸어가,

그게 얼마나 예쁜지, 너 자체로 얼마나 예쁜지, 그러니까 네 생각대로 해!”

자동차 정비소에서 기름때 묻혀가며 자기의 길을 가는 대학생쯤 대는 여자의 멋진 모습이라고 해야겠지요. 자기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진정한 프로라 말할 수 있습니다.


라디오를 틀면 ‘생각대로T' 광고를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정답이 없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우리는 널 믿어. 네가 어떤 결정을 하던 널 믿어.” 이런 내용입니다. “생각대로 해 그게 답이야” 저는 광고의 이중성을 말하고 싶습니다. 감성이 중심이 되는 젊은 층을 마켓팅의 대상으로 두고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의지대로 살아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시스템을 갖춘 사회이기에 자기의 의사대로 뭔가를 결정한다면 획기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중독 시키고 있습니다. 젊은 층은 꽉 짜여진 사회의 틀로부터 부단히 독립하고 싶어 하는 감성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을 깊게 생각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생각대로 해 그게 답이야”

광고를 보면서,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과 인격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 사람의 생각을 모두 응원해주고 답이라고 말해서 해결될 수 있는 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개인주의가 더 깊게 확산되면서 남의 생각을 침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도 널 인정하니까 너도 날 인정해 주고 간섭하지마!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저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사랑할 때는 있는 그대로 받아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일 수도 있고 쉬운 일일수도 있습니다. ‘간섭’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세상에는 답이 없다’라는 메시지이고 자신이 답이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잘 맞는 메시지입니다. 세상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정말 없습니다. 일찍이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자연철학 중심의 사고방식을 인간 중심으로 사회 중심적으로 만들었던 최초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중심에 상대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도덕의 판단 기준을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가 현대에 오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답은 없는 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도 내 자신이 문제 해결의 답입니까? 내 생각대로 하면 됩니까? 분명 다 ‘아니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근원인 출발점부터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을 신봉하는 이들은 인간을 절대가치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시작에 관심이 많이 있습니다. 언제쯤 인간과 챔팬치로 분화되었는가에 대하여 연구합니다. 사람 형상을 하고 있는 작은 뼈 하나가 발견되면 그것을 토대로 형상을 만듭니다. ‘루시’ 90cm의 여자입니다. 턱 조각을 가지고 46%의 다른 뼈를 찾아서 사람의 모습으로 만들어 내었습니다. 진화론자는 이 화석들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얼마 전에 동물의 배설물에 머리카락 40여개를 발견해서 유전자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근원지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논쟁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생명체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생물과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에는 성령이 거하시기에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디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명확한 답을 갖고 있으며 그 답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결정권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믿음 안에서 결정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감성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이성을 주셨습니다. 그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성을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주재권 아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내 삶의 중심, 내 삶의 목적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해 나가야 합니다.


사사시대를 바라봅시다.

하나님은 왕을 두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왕이 되면 하나님이 왕이 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에게 여러 번 간청해서 왕을 세우게 됩니다. 그 왕만 있으면 해결될 것 같았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문제로 인하여 많은 위기를 경험하고 결국은 나라를 잃게 되는 아픔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사가 다스리는 시대 속에서 이스라엘 구원을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사사시대의 문제점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자꾸 잊어버리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범죄함으로 심판을 받고 백성들의 울부짖음에 응답하시고 한 사람, 사사를 택정하여 위기에서 구원하였으며 평화로운 삶을 살게 해 주었습니다. 사사는 왕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세를 통하여 통치 기반을 닦는 일이 없었습니다. 사사시대가 훨씬 민주적인 사회였습니다.


문제는 있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2지파가 연합하여 서로를 지켜주고 민주적으로 합의해서 살아가는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자기의 소견대로 행했다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지냈고 그들은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자 그들은 가나안의 사고방식과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고약한 삶의 방식을 버리게 하기 위해 광야에서 살게 하셨으며 이집트에서의 종 된 습관을 끊어버리게 하기 위해 광야를 보내게 했는데 그들은 다시 가나안에 오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이집트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기 위해 백성을 불러내어 구원해 주었는데 이들은 그것을 잃어 버리고 다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분노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처음 구원의 감격을 느꼈을 때는 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려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고 은혜가 떠나게 되자 옛 모습을 다시 호복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게 됩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고는 신앙을 끌어갈 수 없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품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내 소견대로 내 뜻대로 생활을 제단해 가지 말아야 합니다.


나오미 가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흉년을 만나자 이방 모압으로 떠납니다. 하나님의 약속한 땅을 버리고 약속의 땅이 아닌 이방의 땅으로 떠나 생활했습니다. 처음에는 가나안의 삶보다는 풍족한 삶을 살았지만 결국은 남편과 아들을 잃고 이방 여인인 롯은 데리고 귀향해야만 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마라’라 말하며 약속의 땅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는 축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의 생각에 분명 자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의 삶은 일시적으로 성공할 수 있으나 그 성공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과거보다는 현재, 현재보다는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힘들다고 지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내 생각대로 하지 말고 조금 더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소욕에 살지 말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기다리는 삶은 힘들지만 이루어집니다.


시므온과 안나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메시야인 예수님을 기다리며 성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의 약속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생각에 빠져들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 생각을 다 내려 넣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빠져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중심되심을 고백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되새기는 대강절 되기를 축원합니다.

 

내 생각, 내 행동이 답이 아닙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안에 있을 때 분명한 하나님을 향한 목적 의식이 있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으며 세상의 삶속에서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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